수련회 특강 - 주님의 일꾼으로 쓰이자!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이사야 43:21을 반향한다.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이사야의 “찬송”이라는 단어는 베드로가 “아름다운 덕”이라고 번역한 것과 동일한 아레타스[aretas, 70인역]이다). 그 구절은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구속(redemption)을 약속하며(사 43:14), 하나님이 그 자신을 위하여 그분의 백성을 용서하고 속량할 것이고, 그분의 영광이 전파될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사 42:8, 12; 43:7; 43:25; 44:23) 문맥에 맞게 인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바벨론으로부터가 아닌 어두운 가운데서 속량하였고 그들을 당신에게로 불러냈고,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였다(참조, 고후 4:6; 엡 5:8; 골 1:12–13; 살전 5:4–5; 요일 2:8–11).
아레테(aretē)는 “탁월함, 인정과 찬송에 합당함”을 의미하고(빌 4:8, “무슨 덕이 있든지”; 벧후 1:3, 5), 그러한 의미가 확실히 이 문맥에 잘 어울린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은 그분의 모든 덕, 즉 그분의 완전함을 선포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실상, 하나님이 우리를 속량한 목적은 단지 우리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너희가…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that you may declare)라는 어구에서 베드로가 “그것”(that)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가리키는 바와 같이, 우리가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참조, 사 43:7, 25; 48:9–11; 계 4:11). 우리 자신의 영원한 복지를 추구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옳은 일일지라도, 일생을 위한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목표를 결코 제공할 수 없을 것이다.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우리의 시도에 대한 답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