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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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끝에 있을지라
느1:1-11
저는 요즘 호통판사 천종호 판사의 영상을 정주행중에 있다. 이분은 아이들이 잘못해서 법정으로 오면 법정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이 클수록 야단을 많이 친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갈곳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 위탁 가정을 운영하고, 위기에 선 사이에 노출된 아이들과 축구단을 만들어서 모임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분 간증을 듣다가 보니까 처음 소년부로 가게 된 것은 특별한 사명 때문이 아니었다고 한다. 특별한 소명없이 소년부로 갔는데, 나오려고 하니까 이 아이들을 ‘나마저 돌아서 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라는 무거운 마음이 오랜 시간 아이들을 재판하게 되었다고 했다.
1517년 비텐베르그 성당 문에 반박문을 붙인 루터의 이야기를 우리는 영웅담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당시 루터는 종교개혁과 같은 생각은 1도 없었다.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의문점과 의견을 게시판에 붙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시작으로 루터는 정치적으로 몰리게 되었고 결국 종교개혁의 걸음을 걷게 되었다.
우리는 소명이나 사명하면 창조 전부터 예비하신 어떤 특별한 의미만을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특별한 이끄심이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뜻밖의 상황이나 형편에 의해 부름을 받기도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소개한 적이 있는데, 지금 아프리카에서 차동차 정비로 선교를 하는 자매가 있다. 어느 날 교회에서 단기 선교를 떠났는데, 선교사님들이 차가 고장나면 수리가 수개월이 걸리거나 돈이 없어서 수리하지 못하는 모습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자매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했던 일은 자동차 자격증을 따는 일이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 이분법적 세계관에 놓여서, 거룩과 세속을 구분하였다. 목사가 하는 일은 거룩한 것이고 성도들 직업은 세속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아모스는 뽕나무를 기르다가 부름을 받았고 사도 바울은 텐트를 만들며 사역을 하였다. 우리는 이분법적 구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다.
성경에는 이사야나 에스겔과 같이 오늘날 목사와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느헤미야와 같은 평신도 사역자도 있었다. 사실 저는 평신도라는 말도 좋아하지 않지만, 일반적인 이해 때문에 평신도라는 말을 쓰고 있다. 원래는 성도나 그리스도인이 맞다. 기능이 다를 뿐이지 목회자나 평신도의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 역할에 있다. 그리고 섬김의 자리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과거에는 한 번 목회자는 영원한 목회자였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왜 사역을 하고 있나 싶은 몇몇이 있다. 그들은 모두 부모님의 서원 때문에 사역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부름과 상관없이 말이다.
찬양 사역자중에 강명식 목사님이 계신다. 그런데 이분은 스스로 찬양사역자라 말한다. 그 당시에는 전도사나 목사가 아니면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기도 했고 조금 더 성경적인 사역자가 되고자 신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음악사라고 말한다. 지금도 찬양 사역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소식
1절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유대인들은 에스라-느헤미야를 한권으로 읽었는데, 요즘은 저자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더 많다. 아무튼, 1절을 읽어보면 느헤미야서의 저자가 느헤미야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부분은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년’이렇게 되어 있는데, 히브리성경에는 ‘아닥사스다’라는 말이 없다. 아마도 번역자가 2:1절에 아닥사스다라는 인명이 나오기 때문에 독자들을 위해 추론의 영역에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하게 살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기슬르월’과 ‘궁’이라는 말이다. 기슬르월은 바벨론식 달력이다. 나중에는 이 달력이 유대력이 된다. 스가랴 7:1에서 기슬르월이 나오는데,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해서 9번째달이라며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그런데 느헤미야 시대에 와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별 다른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산궁할 때, ‘궁’이라는 말은 ‘비라’다. 이 말은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성경에 나오는 외래어다. 그리고 ‘아닥사스다’라는 이름도 페르시아 연호다.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국제적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또 나쁘게 말하면 친페르시아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언어적 표현과 낯설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런 느헤미야에게 우연히 소식이 들려왔다. 예루살렘을 돌아보고 온 여러 사람 가운데 하나니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예루살렘의 형편을 질문하게 된다. 2절인데, 여기서 한 가지 수정해야 할 부분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이렇게 되어 있는데,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그러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을 물은 것이다. 히브리성경에도 ‘민 하세비’로 되어 있다. 그들은 포로 귀환자들이다. 느헤미야는 원래 남아 있었던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느헤미야의 관심은 오직 성벽과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3절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그들 형편이 환난과 조롱 속에 있었고, 바벨론 침공에 무너지고 불탄 성벽(우리 성경은 ‘성’이라고 번역했지만, 호마트는 벽을 말한다-과 성문은 그대로 있었음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는 말이 미완료형이다. 성경에는 몇 마디로 기록되었지만, 그들에게 자세히 예루살렘의 형편을 들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서론에서 말씀드린 자매가 선교지에서 고장난 자동차를 보았다면, 느헤미야는 성벽을 보았다. 그 말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우리는 사역을 너무 거창하게 여긴다. 아주아주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마치 어린 마리아처럼 천사가 찾아와야 일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우리 눈에 부족함이 보이고 천종호 판사님처럼 ‘나까지 외면하면 안 되겠다’는 부담이 섬김의 자리에 우리를 부르기도 한다.
그 당시 성벽은 여러 적으로부터 보호와 안전을 보장하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오랜 시간 성벽이 없었다는 것은 여러 어려움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벽이 상징하는 것은 ‘구분’이었다. 후반부로 가면 느헤미야서는 유대 민족을 하나로 묶는 것이 나온다. 우리 목사님께서 주일날 설교중에 말씀하신 ‘세골라’라는 말이 기억나는지 모르겠다. 느헤미야서는 ‘골라’를 중심으로 공동체가 형성된다. 그리고 이 골라가 예수님 시대로 넘어가면서 배타주의를 낳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느헤미야서는 성벽을 중심으로 민족을 하나로 묶어준다.
은보 가족 여러분, 요즘은 교회가 외적으로 내리막을 걷고 있기 때문에 신학을 하려는 사람도 많이 줄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일하겠다고 서로 다투던 시대도 지나고 있다. 예전에는 조금만 은혜받아도 신학교에 가려고 했다. 예전에는 교회에서도 웬만해서는 교사나 피아노 반주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교회마다 반주자 찾기가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지금 외적인 무엇인가를 섬겨라고 설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느헤미야의 마음을 구하였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일은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일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다.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이 감동하시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섬기는 것이다. 어쩌면 이 시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해서 헌신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저는 지금에 한국교회는 여기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사람이 없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그만큼 줄어들고 있다는 말이다.
바라기는 우리 은보 공동체에는 느헤미야의 마음이 부어지기를 소원한다. 모두가 스스로 주의 일을 감당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인가 부족함이 보이고,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무작정 섬겨서는 안 된다. 해야 할 것이 있다. 무엇일까?
4절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먼저 느헤미야는 슬퍼하며 울기 시작했다. 에스라는 겉옷뿐 아니라 속옷도 찢으며 울었다. 정말 아픈 현실로 받아들였다는 의미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자신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뜻을 찾으며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바벨론 포로기부터 금식이라는 기도는 구원을 구하는 방편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멸망일뿐 아니라 성벽이 무너지고 지도자가 죽었던 날도 기억하고 금식을 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구했다. 바리새인들이 금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느헤미야도 금식하며 예루살렘의 회복을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열심과 머리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기도를 중심으로 일으키시고 일하시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인맥이나 수단을 앞세우지 않았다. 아닥사스다왕의 허락을 받았지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인맥이 없었다.
오늘부터 우리는 두 가지를 구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부족한 부분이 눈에 보일 수 있도록 구하고 무엇인가 보이거나 바람이 생겨도 내가 앞서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에는 사람의 일은 사라지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가득 역사하기를 원한다.
2. 언약의 하나님께 기도하다
5절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5절부터는 기도의 내용이 나온다. 5절부터 11절은 “아나 아도나이”로 시작한다. 아나는 ‘바랍니다’ ‘바라건대’와 같은 감탄사다. 우리 성경에는 잘 번역되지 않는 말이다. 그리고 11절도 발음상 “아나 아도나이”로 시작하며 시작과 끝을 묶고 있다. 그 내용은 언약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느헤미야서에는 언약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느헤미야서는 오경의 영향이 지대하다. 특히 신명기에 말씀하신 언약의 내용이 많이 나타난다.
여러분 포로기 이후로 기록된 성경을 보면 기도문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야베스의 기도라든지 이런 기도문에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나타난다. 그 첫 번째 내용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로 시작된다. 이 말은 무작정 하나님이 무섭다는 내용이 아니다. 이것은 느헤미야의 신앙 고백이었다. 느헤미야에게 하나님은 경외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크신 하나님이셨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나 사건 앞에 함몰되어서 크신 하나님을 잘 바라보지 못한다. 하나님이 더 크신데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사건을 크게 본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현실이 눈물이 날 만큼 아파하면서도 하나님을 더 크게 보았다. 기도는 하나님을 크게 보지 않으면 진실한 기도를 올려 드릴 수가 없다. 하나님을 크게 보지 않으면 의심하는 마음으로 구하거나 소 뒷걸음질하다 쥐 잡듯이 행운을 바라며 기도하게 된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5절은 열왕기서에서 솔로몬이 드렸던 기도를 떠올린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 성전에 이름을 두시고 하늘에 계신다. 왜냐하면, 성전이 하나님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도 성벽과 성문이 크신 하나님을 채울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약의 성취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원래 언약은 일방적인 약속이 아니다. 서로가 지켜야 할 의무다. 그런데 그 언약을 이스라엘이 깨뜨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다시 택한 곳으로 모아 달라고 기도하였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언약을 알았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무엇을 잘못했으며 그 잘못 때문에 포로가 되었음을 알았던 것이다.
7절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신명기 향기가 많이 난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아서였다. 이것이 큰 죄였다. 그래서 여러 나라 가운데로 흩어진 것이다.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한국교회를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조금전에 말씀드렸듯이 외적으로 수가 줄어든 것으로 흥왕을 판단하지 말고, 영적인 영향력과 열매를 살펴보았으면 좋겠다. 마태복음 7장을 보면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삶을 말씀하시면서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기준을 말씀하셨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거짓의 특징은 능력은 있다는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행한 많은 일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없었다. 모두가 자신에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세계 어느 교회들보다 열심이다. 목회자의 학력도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 예배당도 크고, 예배도 많고, 헌금의 종류도 많다. 신학교도 많고 선교사도 많이 파송했다. 교회 내적으로는 여러 행사가 있고 모임이 있다. 그리고 어느 민족보다 뜨거운 성정 때문인지 열정적으로 일한다. 그런데 열매가 점점 없어진다. 기독교가 자리 잡을수록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드러나야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있다. 교회가 세상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하는데 세상이 교회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그 안에 저와 여러분이 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슬퍼하며 한국교회를 위한 기도를 올려 드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우리가 느헤미야서를 묵상하는 동안 우리 안에 작은 울림을 하나님이 주셨으면 좋겠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작은 울림이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우리 작은 울림을 통해서 한국교회에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세상은 계속해서 소망이 사라지고 있다. 오래 지속된 코로나로 아우성이다.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산다. 서민들은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이 시궁창과 같은 이때에 하늘의 하나님 크고 위대하신 그분의 마음이 부어지고, 한국교회가 다시 언약 위에 세워지는 역사를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3.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9절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을 향해 생각만 바꾸어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른다. 기도할 때에도 기도하고자 마음만 먹어도 정말 기뻐하시는 것 같다.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느헤미야는 1장에서 미완료형이라는 문법을 의미 있게 사용한다. 그리고 미완료의 문법 빈도수도 많다. 무게 있게 사용되는 의미뿐만 아니라 수에서도 앞도적이다.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할 때 ‘있을지라도’가 미완료형이다. 아직도 이스라엘이 하늘 끝에 있어도 내게로 돌이키기만 한다면, 하늘 끝에 있어도 거기로부터 모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택한 곳으로 모으신다는 말씀을 느헤미야는 강력하게 구하고 있다.
혹 우리 가운데 여러 문제로 마음이 낙심되고, 특히 죄의 문제 앞에서 죄와 싸우기를 포기한 심령이 있는가?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은 아직도 우릴 기다리고 계신다. 나를 향해 포기할 줄 모르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늘 끝에 있어도... 우리가 다시 주의 말씀 앞으로 돌아가면 우리를 다시 모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다. 다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를 원한다. 다시 우리 중심을 주의 말씀 앞으로 돌이키기를 원한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교회가 흥왕하는 것이다.
『결론』
느헤미야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응답하셨다. 그것은 왕의 술 관원이 되는 일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이었다.
11절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소서’라고 강하게 구하였듯이, 다시 주의 말씀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고, 그 마음으로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