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존재로서 그리스도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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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엡 6:5-9
제목: 사회적 존재로서 그리스도인의 삶
찬송: 217, 218
중국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 온 한 상인이 닭장만한 조롱(새장)을 지어 놓고 자기 고향에 서식하는 새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다 큰 아들이, 새 밥을 줄 때마다, 놀고 먹는 이 새들을 그렇게 부러워 하더래요. 이 새들은 날마다 놀고 먹는데, 자기는 밤낮 일만 한다고 신세한탄을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어느날 아버지는 이 아들놈이 새에게 밥을 주러 들어간 틈을 타서, 조롱 문을 밖에서 걸어 잠궈 버렸습니다. 그리고 끼니때마다 그 아들에게 진수성찬을 넣어 주면서 어디 네 맘대로 편히 쉬어 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날때까지는 잘 지내더래요. 그런데 나흘째가 되니 안에서 난리를 치더래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 먹으면 좋을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죠. 닷새쯤 되니 도저히 견딜수 없다고 꺼내달라고 같다고 애원을 하더래요. 그리고 이레가 지나니, 죽을 수 있게 칼 한 자루 넣어 달라고 간청을 하더랍니다. 임어당(林語當)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공(可恐)할 것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이 ‘조롱인간(鳥籠人間)’으로 비유했습니다. 하루 종일 먹이를 찾아 나르는 개미를, 일할 수 없는 일정 공간 안에 넣어두고, 생존에 필요한 먹이만 시간 맞춰 주었더니 닷새만에 스스로의 발을 자르는 자학(自虐) 행위를 하더래요. 일주일이 지나니, 상대방의 몸을 해치는 타학(他虐)행위를 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프랑스의 사회학자 ‘플라스티에’ 는 그의 저서 ‘4만시간’ 에서 20세기 말이 되면 인생 60만 시간 중 노동 시간은 4만 시간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나머지 56만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문명의 가장 큰 숙제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의 경고가 마치 현실이 된 듯,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 노년을 보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죠. 은퇴를 하고도 30년에서 40년을 살아야 하는 거예요. 아무런 할 일이 없이 긴긴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몹시도 괴로운 일인 것입니다. 굳이 ‘조롱인간’ 이나 ‘여가(餘暇)아노미 현상(現象)’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도 우리는 이제 그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죠.
남새밭에는 며느리풀이라는 잡초가 있다고 합니다. 특정 잡초 이름이 아니구요, 며느리로 하여금 풀밭을 매게 하기 위해 시어머니가 손대지 않고 남겨둔 일정 영역의 잡초를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흔히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부려먹고 구박하기 위해 이 며느리풀을 남겨뒀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오해라는 거죠. 사시사철 시집이라는 울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 며느리에게 차리리 할 일이라도 있는 것이 낫다는 것이죠. 그래서 고문에 가까운 시집살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시어머니의 배려가 며느리 풀이라는 거예요. 같은 맥락에서 옛날에 쌀 방아를 찧고, 찧은 알곡을 말로 되어 푸대에 담을 때 시어머니들은 한 말당 탈곡되지 않은 뉘 한줌씩을 섞어 넣었다고 합니다. 뒤주에서 쌀을 퍼다가 밥을 할 때 뉘를 가리게 함으로써 힘든 것들을 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는 거죠. 며느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는지, 배려차원에서 했는지는 여러분이 알아서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잠언 21:25은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잠언 10:4은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노동을 신성한 것으로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동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의 결과로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이전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일감을 주셨습니다. 성경을 한번 볼까요?
창세기 1:22 (NKRV)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창세기 2:19 (NKRV)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 각 생물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 노동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아담이 일하기전에 하나님은 먼저 일하셨죠. 창세기 1:1 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일하셨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은 죄의 결과가 아니예요. 또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생계의 수단도 아닙니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성한 복’ 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노동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동은 우리로 하여금 지루함과 악, 빈궁을 몰아낸다” 공감이 가는 말씀이죠.
오늘 이 ‘일’ 에 대해서 살펴 볼 건데요, 이 일을 행함에 있어서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본문에 보면 ‘종’ 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바울이 에베소서를 쓸 그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존재했죠. 주석가들에 의하면 당시 로마제국에는 약 6천만명에서 7천만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로마를 움직여 가는 사람들은 바로 이 노예들이었습니다. 노예라고 하니까, 막노동만 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예요. 노예 중에서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온 상대국의 엘리트 계급들이 상당했습니다. 그들은 비록 신분은 낮았지만,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에 가정에서 자녀를 교육하는 가정교사나 전문교수, 행정가의 일을 하는 자들도 있었구요, 사람을 고치는 의사의 직업도 당시 노예가 담당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들에게 인권이 없었다는 거예요. 봉급도 물론 없었구요, 쉬는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인격적인 대우는 물론 기대할수 없었구요, 그들에게는 그저 주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만이 강요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제국안에 전파되기 시작하자, 많은 노예들이 그리고 주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안에는 많은 노예들이 있었어요. 당시 에베소와 로마에 있는 교회에는 성도수에 80%이상이 노예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예와 주인이 교회안에서 한 성도로 만나게 된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이제 주인과 종으로 만난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자로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궁금한 건, 그러면 우리는 2천년전에 존재하던 주인과 노예사이의 이 갈등을 왜 알아야 하는가? 하는 점이예요. 왜 이 본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하면 이 본문 속에 노동의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지가 나와 있구요, 비록 주인과 노예 사이는 아니지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고용주와 피고용주가 귀 담아 들어야할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씀을 드리자면, 노예제도가 완전히 폐지된 것은 놀랍게도 불과 1세기도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노예제도 폐지를 처음으로 선언한 것은 1862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노예 해방령에 동참한 주는 북부에 있는 주들이었고, 켄터키주와 델라웨어 주는 완강히 버텼습니다. 켄터기주가 노예제도 해방에 비준한 것은 1976년이 되어서였구요, 델라웨어 주는 1901년, 미시시피 주는 1995년이 되어서야 비준했다고 합니다. 미국만 그런 것이 아니죠. 인도는 1947년 법으로 카스트제도를 폐지했지만, 여전히 지금까지 사회 곳곳에 그 뿌리가 깊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사농공상의 구분이 엄격했었는데, 그것이 없어진 것은 1세기 남짓이죠. 그리고 오늘날에는 비록 이런 제도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경제적 빈곤층에 대한 인권침해나 사회적 차별이 존재합니다. 결국 시대를 막론하고 타락한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이름만 다를 뿐이지, 차별과 억압이 존재해 왔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빚어진 제도적 모순과 사회적 불평등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할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바울은 종들에게 말을 합니다. 5절을 볼까요? 에베소서 6:5 (NKRV)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이 말씀에서 바울은 ‘순종’을 말합니다. 6장 1절에서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셨던 것과 똑같이 그리스도인이 된 종들을 향해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상전’ 이라고 번역 했지만, ESV성경에서는 earthly 라고 번역했어요. 이 땅에 상전이라는 말이죠. 이 말은 주인은 이 땅에 주인도 있지만 하늘의 주인도 있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예요. 우리가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도 마땅히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에서는 부모이구요, 직장에서는 boss가 되겠죠. 오늘 본문에서는 주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듭나기 이전에 노예와 주인의 관계속에서의 복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하는 차원에서 이 땅의 주인들에게 순종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5절 말씀에서도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어떻게 하라구요? 네, ‘그리스도께 하듯하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정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깨뜨리면 안되요. 가장의 권위,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구요, 또한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리고 사회에서도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칭찬받고 인정받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충성된 일꾼인데, 사회에 나가서는 영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인다면 그는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인 거죠. 오늘날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 권위의 상실에 있습니다. 국가권력의 권위가 도전을 받는 일이 빈번하죠. 경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경찰이 음주단속을 하는데 저항하고, 지시에 따르지 않습니다. 미국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가정에서도 가장의 권위가 도전받고 교실에서 선생님들이 스승으로서 존중받지 못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구요. 자,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한다구요? 네, 그들과 달라야 한다는 거예요. 예수 믿고 나서 달라졌다는 말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요? 남편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또 직장에서 그리고 여러분이 맺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속에서 그런 말씀을 들을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5절 말씀을 보면, 종들에게 ‘성실’ 을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sincere’ 라는 단어가 쓰였어요. ‘성실한’, ‘진실한’, ‘거짓이 없는’, ‘충심으로’ 라는 뜻이죠. 본문에서 바울이 의도한 뜻은 6절에 나와 있습니다. 눈가림만 하거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인이 보고 있을 때는 열심히 하는 척 하지만 주인이 보지 않을 때는 꾀를 부리고 그러지 말라는 거죠. 보상이 주어지거나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만 아니라 그 주인을 세우신 하나님을 보고 성실히 행하라는 겁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종이든 자유자이든, 고용주이든, 피고용주이든, 모두 그리스도의 종임을 알아야 해요. 일을 시켜보면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시키는 것도 제대로 성실히 하지 않는 사람. 둘째는 시키는 것만 딱 하는 사람, 셋째는 시키지 않아도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45–46 (NKRV)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잠언 25:13 (NKRV) 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성실해야 합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추숫날에 얼음 냉수 같다고 했어요. 시 37:3은 말씀하기를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실은 주인이 보든 보지 않든 상관없이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 5:10에서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그때에는 모든 사람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일상에서 펼쳐지는 사건과 또 모든 관계에 있어서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신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이 살아가게 하는 동기가 되는 거예요. 또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장래에 신원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18에 보면,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고 했습니다. 나를 선대하고 관용하는 주인에게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주인에게도 그리 하라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 그리고 상주심을 믿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어떤 Boss 아래에 있던지 우리가 궁극적으로 기쁘시게 해야할 분은 하늘 아버지입니다. 이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9절 말씀을 보면 상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와같이’는 NIV성경에서 in the same way라고 번역했는데요, 상전들도 종들에게 위에 말씀드린 원리대로 하라는 거예요. 항상 주인되신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인식하라는 것이죠. 네가 하는 그 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하나를 더 말씀했는데요, ‘위협을 그치라’는 거죠. 골 4:1은 말씀하기를 ‘상전들이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권력이나 재물을 손에 쥐면 거만해지거나 안하무인으로 행하기 쉽습니다. 또한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압력을 행사하거나 재물로 사람을 움직이려고 하죠.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의와 공평으로 행하라는 거죠. 왜냐하면 너희들이 이 땅에서는 주인일지 모르지만, 너희에게도 주인이 있다는 것, 하늘 상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사람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아질수록 그리고 가진 권력이 클수록, 또 많은 부를 소유할수록 더 잘해야 합니다. 자신도 하나님앞에 종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어떤 회사의 부장이 어느날 부하직원이 중대한 실수를 저지를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불러다가 혹독하게 질책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친구가 은밀히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더래요. ‘여보게, 조심하게. 자네, 그녀가 누군지 아는가? 그녀는 회장님 딸이야’ 라고 힌트를 주더랍니다. 여러분, 그 부장이 어떻게 했을까요? 조금도 달라짐이 없이 원래대로 혹독하게 질책 했을까요? 아마 그 부하직원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이라도 변하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바울이 9절에서 상전들에게 위협을 그치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네가 부리는 그 ‘종’ 이 누군지 아느냐는 거예요. 그 ‘종’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죠. 상전들이나 종들이나 다 하나님을 모시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주인이라고 종은 억압하지 말고 존중하라는 거예요. 그들의 임금을 떼어 먹거나, 노동력을 착취하지 말라는 거죠. 이번에 전 국민의 바램속에 나로호 발사가 성공적으로 이뤄져서 전 국민이 국가적 자긍심과 함께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곧 이어 그 일에 종사한 엔지니어들이 밤샘 작업을 하면서 일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지불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폭로했습니다.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하면서 추가노동에 대한 무보수의 열정페이를 요구한 것이죠.
야고보서 5:4 (NKRV) 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일꾼의 삯을 제때 주지 않는다거나 떼어 먹는다거나 너무 박하게 준다거나 하지 말라는 거예요. 실재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기업주의 회사들이 더한 경우가 많아요. 근무조건도 더 열악하고 일도 더 많이 시키면서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정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은혜페이’ 정도가 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눈앞에 이익만 생각하고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않거나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잘 생각해야 해요. 내가 owner라고 할지라도 나 역시도 하나님 앞에서는 종이라는 것을요. 내가 사장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저 하나님앞에 사장으로 고용된 직원인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 8절에서 너희가 무슨 선을 행하든지 다 그대로 받을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죠. 중요한 것은 노동을 함에 있어서 주인으로 부름 받았든, 종으로 부름 받았든, 고용주이든 피고용주이든, 피차 주께 하듯 해야 한다는 거예요. 주님은 너희에게 하늘 상전이 계심을 알라고 했습니다. 바라기는 추숫날에 얼음냉수와 같이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분들 다 되시기 바랍니다. 공평과 성실을 먹을거리고 삼으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고, 어디를 가든지 사랑받고 존경받는 분들 다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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