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27 새벽]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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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422 거룩하게 하소서
본문 마5:5
하나님, 오늘도 호흡하게 하시고 새 아침을 주셔서 하루의 첫 시간에 이렇게 주님의 전에 나와 기도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시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우리의 삶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불충함, 우리의 죄성을 용서하여 주시고, 하나님 주시는 새 힘과 능력으로 오늘을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가르치신 귀한 말씀으로 산상보훈 혹은 산상수훈이라 불리우는 본문이다. 그 중에서 3절부터 10절까지는 팔복선언에 대한 말씀으로, 여덟까지 복있는 자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부분이며, 오늘은 팔복 중 세번째인 온유한 자에 대해 말씀을 살펴보려고 한다. 주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온유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전을 찾아보니 ‘온유하다’ 의 정의는 성격이나 태도가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한다. 주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으리라고 선언하셨다. 즉 사전적 정의를 그대로 따른다면, 주님은 성격이나 태도가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 셈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과연 온유한 자들에게 복이 임하는 시대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시대는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시대이다. 강한 자, 힘쎈 자, 권력을 더 많이 거머쥔 자들이 활보하고 다닌다. 힘도 없고, 빽도 없고, 돈도 없는 자들은 무시당하고 조롱당하고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적 특징은 비단 오늘날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대에도 그러하였고, 그리고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인류역사의 시작부터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세상에서는 강한 자들에게 복이 있는 것 같다. 남의 위에 군림하고 억압하려는 자들에게 복이 있는 것 같다. 남의 것들을 강탈하고 휘어잡으려는 자들이 진정 복있는 자들처럼 보여진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니 참으로 이상하다. 이 시대의 정황과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주님께서는 시대착오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 인간을 잘 모르셔서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상적인 말씀을 주시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 이것은 단지 사전적 의미처럼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다거나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모나지 않고 성격이 부드러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천성적으로 부드러운 성품을 지닌 자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강팍하고 완고할 수 있다. 사람들 앞에서는 고분고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강팍하고 완고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인관계에서는 온순하다 해서 다 하나님 앞에 온유한 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복 있다고 말씀하 시는 온유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첫 번째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한 자는 강포한 자의 반대말이다. ‘강포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몹시 우악스럽고 사납다는 의미를 가진다. 특별히 성경 속에서 ‘강포하다’ 라는 단어는 대부분 보복과 복수에 사용된다. 뭔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뭔가 손해를 보는 상황에서 내가 받은 피해와 원수를 직접 갚는 행위와 관련이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가 강포한 자라면, 온유한 자는 그 반대이다. 뭔가 불의한 일을 당하고, 악을 당하여도 저항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는 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를 수 있다. 단지 피해를 입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복수하지 않는 모든 자들을 온유한 자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냥 손해만 보고 끝내면 다 온유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온유한 자란 그저 사회적 약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한 자란 아무런 잘못이 없이 불의를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대항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그의 갚아주심과 위로를 바라는 자들을 가리킨다. 베드로전서 2:23 말씀에 예수님처럼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는 자가 온유한 자 이다. 예수님의 마5:39 말씀처럼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 뺨을 돌려대는 자가 바로 온유한 자이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사람이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이와 같이 살아갈 수가 있는가? 이 세상에서 저런 식으로 한 대 맞을 때 다른 쪽을 갖다 댄다면 분명 멍청하고 어리석은 자라고 손가락질 당할 것이다. 왜 그렇게 피해와 손해를 감수하면서 대응하지 않느냐며 바보 취급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주님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속된 표현으로 단지 바보 멍청이가 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누가 놀려도 허허 웃고, 누가 때려도 허허 웃는 그런 상태가 되라고, 아무런 생각도 없고 기준도 없이 그냥 웃는 바보가 되라고 말씀하는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분의 자녀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동안 생각도 없는 바보 멍청이들, 누가 때려도 허허 웃는 뭔가 나사 빠진 모양대로 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뭔가를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아버지께서 온 우주의 유일하신 재판관이시니 그분께 판결을 맡기라는 것이다. 때로 손해를 보고, 놀림을 당하고, 어려운 일을 겪고, 힘겨운 상황에 처해도, 재판관 되시는 하나님께 탄원하며 그분께서 친히 원수를 갚아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이 일들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의 갚아주심을 확실히 믿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불의를 당할 때에 그 억울함을 참지 못하여 어떤 식으로든 반응한다. 그래서 보복을 감행하거나 소송을 준비하거나 뭔가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뭔가 자기가 손해입은 것들을 매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방법을 모색한다. 또한 직접적으로 보복까지는 안하더라도 상대에 대한 악한 마음을 계속 마음의 품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굳이 어떤 액션을 취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상대를 향한 악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이것을 참된 온유라 말할 수 있을까? 내가 굳이 법정 소송이나 대응을 하지 않았다더라도, “으휴 저놈, 상대를 말아야지!” 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온유인가? 결코 아니다. 참된 온유란 복수의 마음까지도 완전히 버리는 것, 상대의 불의를 완전히 용서하며 도리어 복을 빌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성품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의 대신 갚아주심, 그리고 상급을 바라는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온유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 선언은 무엇인가? “땅을 기업으로 받으리라” 는 것이다. 이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에는 어느정도 이해가 되는 상황일진 몰라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와는 다소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에서는 어떠한가? 힘이 있고 권세가 있는 자, 강포한 자만이 땅을 차지한다. 불의한 방법으로 이 세상의 부와 권세와 물질을 차지하고 성도들을 핍박한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아무 힘이 없고 약하다. 불의한 일을 당하여도 세상적 방법으로 맞대응도 못하고 한숨만 쉬고 탄식할 때가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이 지금 당장 이 세상을 차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 이 땅을 차지하게 될 주인공은 바로 ‘온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시편37:11 말씀에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여기서 말하는 땅, 곧 온유한 자들이 차지하게 될 땅은 종말론적인 새 땅이다. 즉 교회의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모든 성도들을 불러모으사 거룩하신 주님과 함께 들어가 살게 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한다. 그곳에는 완전한 의가 거하며 고통과 저주가 없다. 거기에는 오직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 받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 영광스러운 날에 오직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갚아주심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묵묵히 견뎌온 모든 성도들의 눈물을 주님은 친히 닦아주실 것이다.
그러면 또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주님의 재림의 날이 언제 임할지도 모르는데, 그때까지 성도들은 계속해서 핍박만 받고 괴로워하며 살아야 하나? 언제까지 손해만 보면서 피해만 입으면서 살아야 하는건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현재 이 세상에서 천국의 복을 미리 조금씩 맛보고 있다.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긴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을 약간씩 누리고 있다. 그것은 롬14:17 에 기록된 대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비록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세상의 강포자들에 의해 핍박 받고 불의한 일들을 당하고 있으나,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보호와 통치를 받으며 살고 있다. 따라서 온유한 자란, 비록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고는 있으나, 불의한 일을 당하나, 장차 미래에 이루어질 새 땅에 들어가게 될 것 뿐만 아니라 또한 지금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을 누리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여러분, 그렇기에 오늘 말씀을 굳게 붙들기를 바란다. 온유한 자만이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갚아주심을 바라며 억울한 일, 괴로운 일, 손해보는 일을 당해도 하나님 주시는 위로를 바라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란다. 유일한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탄식을 들으시고 악인에게 그 원수를 갚아 주실 것이다. 또한 그처럼 어려운 일을 당하는 그 때에도, 결코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늘 우리에게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심을 기억하며, 이러한 위로와 평강의 복들을 이 땅 가운데 살며 누리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