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믿음이 흔들릴 때

시편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40 views
Notes
Transcript
내 믿음이 흔들릴 때 / 믿음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신뢰하자.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대로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것만 같다고 느끼곤합니다.
기도도하고 예배도 빼먹지 않고, 성경 묵상도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에는 관심이 없으신 것만 같고, 침묵하시는 것만 같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 나의 삶이 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삶에 받아들이기 힘든 불행한 일들이 갑자기 일어나기도 합니다.
주님께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 거 같은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면 참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믿음의 흔들리는 것을 느낍니다.
어느날 나도 모르는 사이 심각한 건강의 위기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예기치 않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계속된 실패 앞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친구를 예전에 한번 소개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친구는 정말 착하고 재능이 넘치고, 주님께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새벽예배를 가다가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치고 말았습니다.
차에 치인 사람이 전신 마비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그 친구는 젊은 나이에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어땠을까요?
차라리 나이트에서 놀다가 돌아가는 길에 사고가 났다면 자기 자신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고 새벽예배 가는 도중 사고가 난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했겠습니까?
또 제가 아는 목사님은 이제 막 군대에서 제대한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름에 물놀이를 하다가 수초에 발이 걸려 죽은 것입니다.
목회 잘하시고, 정말 화목한 가정이었는데 갑자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아마 이 목사님은 자신이 지은 죄부터 생각해보셨을 것입니다.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나 생각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악인들이 그렇게 많은데 가만 내버려두시고, 왜 하필 자신의 아들인지 이해할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20년 넘게 키운 아들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시편 1편을 보면 의인은 흥하고 악인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이게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꼭 그렇치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실과 믿음의 괴리 여기서부터 우리 믿음의 위기가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요?
[본론]
오늘 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다윗왕에게 하신 약속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나는 내 종 다윗을 찾아서, 내 거룩한 기름을 부어주었다. 내 손이 그를 붙들어 주고, 내 팔이 그를 강하게 할 것이다.’
35,36절입니다.
‘그 자손이 영원토록 이어지고, 그 왕위는 내 앞에서 태양처럼 있을 것이니, 저 달처럼 구름 속에 있는 진실한 증인처럼, 영원토록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이다.’
이게 모두 다윗왕조를 향한 주님의 약속입니다.
다윗 왕조가 영원토록 이어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반대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38-40절을 보면 주어가 모두 주님입니다.
38절에서 주님은 자신이 기름부어 세운 왕에게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물리치시고, 내버리셨습니다.
여기서 ‘기름부어 세운 왕’이란 다윗의 후손 왕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다윗의 왕조에 분노하여 그들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39절을 보면 주님은 다윗왕조와 맺으신 언약을 파기하시고, 그의 왕관을 땅에 내던져 욕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왕관을 땅에 내던져 욕되게 하셨다’는 것은 다윗 왕조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다윗왕조가 끝장났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할까요?
40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성벽이 무너졌고, 요새가 폐허로 변했습니다.
분명 다른 침략자들이 그렇게 한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을 주님이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벽이 무너지고 요새가 폐허가 되니 이제 이스라엘은 한낯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약탈을 당하고 이웃에게 수치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27절에 보면 분명히 다윗왕조를 세상 왕들 가운데 가장 높은 왕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제는 세상의 가장 낮은 수치거리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주신게 아니라 대적들, 원수들의 손을 들어주셔서, 그들이 기뻐 날뛰게 하셨습니다.
22절에서 원수들이 그를 이겨내지 못하며, 악한 무리가 그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이 깨져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칼이 되어주셔서 대적들을 무찔러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주님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칼날을 무디게 하셨고, 전쟁터에서 도와주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왕조의 영광은 끝이 난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기원전721년 멸망했고, 남유다는 586년 바벨론의 침략을 받고 완전히 멸망해버렸습니다.
남유다의 예루살렘은 산 꼭대기에 있어 전형적인 철옹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나라도 결코 자신들을 멸망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비참하게 무너져 폐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절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도 허무하게 무너져 참혹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결국 나라는 망하고 성전은 무너지고 자신들은 이방인들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시편의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당시는 전쟁에서 지면 그 나라가 진것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신이 진 것입니다.
그 나라의 신이 다른 나라 신에게 수치를 당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베론의 마르둑 신에게 모욕을 당한 셈입니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가진 것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부심까지 모두 잃어버린 비참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성품을 생각할 때 이런 비극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89편 2절을 보십시오.
‘주님의 사랑은 영원토록 굳게 서 있을 것이요, 주님께서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하늘에 견고하게 세워 두실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은 팩트입니다.
이런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이 다윗 왕국과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 왕국이 멸망해버렸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이 영원하다는 말은 거짓말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악인들이 판을 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할까요?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시긴 하신 것일까요?
우리같았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그러나 놀랍게도 오늘 말씀 속 시인은 끝까지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46절입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영영 숨어 계시렵니까?
언제까지 주님의 진노를 불처럼 태우려고 하십니까?
이것을 보면 앞서 시인이 주님께 버림받았다고 말했던 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믿기 때문에 지금 자신들이 겪는 일을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게 될 때 하나님께 따지는 그 자체가 불신앙은 아닙니다.
억울해 미치겠는데 하나님 앞에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불신앙이 됩니다.
오늘 시편의 시인처럼 주님께 계속해서 부르짖어야합니다.
주님, 이 고통의 끝은 언제입니까? 언제까지 제게 숨어 계시렵니까? 언제까지 주님의 진노를 받아야 합니까?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힘이 없으셔서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화가나셔서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신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 진노하신 것이며, 그 진노로 인해 우리를 심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30-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내버리고 내 규례를 따라서 살지 않고, 내 율례를 깨뜨리고 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나는 그 죄를 물어 채찍으로 치고 그 죄악을 물어 매질할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이런 수난을 겪게 된 이유는 그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나온 수많은 예언서들은 모두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수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화려한 예배를 드리고, 성전에 많은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실제 그들의 삶 속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심지어 이스라엘의 제사를 혐오한다고까지 하셨습니다.
아무런 삶의 변화가 없는 제사를 받고 싶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이 되길 바라셨지만 도리어 그들은 종교적인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하나님의 백성은 종교적인 의식만 잘 치루는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백성은 삶에서 하나님이 드러나는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 잘 드리고, 기도 많이하고, 묵상도 열심히 하는데 거룩한 삶은 없는 그런 종교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겪는 고통은 하나님의 마음이 변해서 일어난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과 신실하심이 넘치시기에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신 이유는 그들안에 있던 지독한 고집인 마음의 독을 빼내는 과정이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기 유리한대로 말씀을 해석했던 그들의 고집스런 독을 빼내시는 과정이 바로 이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독일에 있을 때 아이가 엄마한테 장난감 사달라고 길거리에서 떼쓰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완전히 길 바닥에 드러누웠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그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갑니다.
아마 한국엄마같았으면 창피해서라도 아이보고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독일엄마는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자 우스운 일이 일어납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가 이 아이가 눈치를 슬슬보더니 알아서 일어나서 엄마한테 달려가더라구요.
엄마의 무관심은 그 아이의 고집을 꺾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그들을 버리신 게 아닙니다.
그들에게 강한 매를 드신 것입니다.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그냥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또다시 주님께 외치는 것입니다.
47, 48절입니다.
내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모든 인생을 얼마나 허무하게 창조하여 주셨는지를 기억해 주십시오.
산 사람치고 어느 누가 죽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제 목숨을 스올의 손아귀에서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셀라)
시인은 인간의 일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근거로 주님께 호소합니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연약한 인생인데 빨리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어달라는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지, 죽고나서 회복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의 유한함과 연약함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한 게 70년입니다.
그렇다면 한 두 세대가 바뀌고도 남을 시간입니다.
10살때 끌려간 사람은 80살이고, 20살때 끌려간 사람은 90살입니다.
태어났더니 이방땅 바벨론인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시간은 너무 긴 고통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 지배하에 있던 시간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입니다.
그 긴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버리고, 친일 세력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광수같은 소설가가 대표적인 사람이죠.
그 사람이 처음부터 친일을 했던 게 아닙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우리나라가 독립할 것이라는 소망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소망이 끊어졌기에 그는 실리를 취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70년입니다.
소망이란 소망은 다 끊어지고도 남을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가면서 소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주님이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근거가 무엇일까요?
49절입니다.
주님, 주님의 신실하심을 두고, 다윗과 더불어 맹세하신 그 첫사랑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소망을 품은 것은 하나님의 성품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주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을 신뢰하고, 주님의 맹세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란 단어는 약속이 없다면 마치 희망고문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주님의 성품을 믿었기에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인은 다시금 주님의 약속을 믿고, 주님께 원수를 갚아달라고 당당히 요청합니다.
더이상 내버려두시지 않고 원수들에게 받은 그 치욕을 기억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여러민족이 그들에게 안겨준 모욕과 치욕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있었습니다.
유다민족이 끌려갈 때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채 쇠사슬에 묶여 끌려갔습니다.
일본군이 우리나라의 명성왕후를 시해했던 사건을 잊지 못하듯, 그들도 이 장면을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자신들이 받은 치욕을 하나님께 고발하는 것일까요?
시인은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치욕을 자신의 치욕으로 여기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두 분 모두 지금은 잘 회복하셨습니다.
교통사고를 냈던 그 친구는 이제 자식도 낳고 장애인 봉사도 하며 신앙생활 잘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잃었던 그 부모님도 여전히 목회를 잘 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잠시동안 우리를 벌하시고, 우리에게서 멀어져 계실 때가 있지만,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언제든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집을 꺾으시고,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의 독을 제거하시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고통과 고난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명확히 주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 분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며,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성경에 얼마나 많은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까?
그것이 고난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고난이 파놓은 구덩이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위로도 그 위에 더욱 넘쳐납니다.
내가 기대한 대로, 내가 소망한대로 아직 일이 잘 풀리지 않을 지라도 주님의 성품을 믿고 주님의 약속을 신뢰합시다.
오늘 말씀 마지막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합시다.
주님,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십시오. 아멘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