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31 예수님의 세례식
누가의 설명(눅 3:21)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 의해서, 그것이 스스로 세례를 받은 것이든 아니면 요한의 지도 아래 함께 물에 들어간 것이든, 세례를 받은 여러 명 가운데 한 명인 것을 나타낸다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라는 문구는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요한의 세례를 선택했음을 말해주며, 14, 15절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요한의 선포한 메시지와 또한 그것이 파생시킨 개혁운동과 동일시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13절 서두에 있는 “이 때에”는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한창 세례를 주고 있을 때를 가리킨다.
“말려”에 해당하는 디에콜루엔(διεκώλυεν)은 미완료인데, 여러 번 완강히 말린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의를 이룬다”는 것은 요한의 세례에 순종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구원 역사적인 의미를 충족시키시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모든 의를 이루신 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첫째, 자신을 사람들과 같은 죄인의 처지에 놓으신다(고후 5:21). 둘째,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선언하신다(요 1:31–34). 셋째,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실 준비를 갖추신다. 넷째,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심으로 그의 사역을 인정하시고 그의 메시지와 자신의 메시지를 연결하신다. 다섯째,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세상에 나타내신다(요 1:31).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구원 역사의 수행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절차이다.
요한은 자기가 예언했던(11절) 자신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의 자발적인 낮아짐에 동의할 수 없었고, 11절의 빛에서 이해했을 때, 그의 말은 아마도 ‘당신이 내가 베푸신 물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령과 불로 베푸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 같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예비적인 사역이 막을 내림과 함께 예수님이 새로운 시대를 가지고 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수님은 지금은 그가 낮은 지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와 요한이 함께 ‘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당혹스러운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등장하는 두드러진 두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루다’라는 표현은 주로 구약의 예언이나 상황(참조, 5:17)과 예수님의 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 ‘현실화하다’ 혹은 ‘성취하다’ 정도가 마태에서 의도된 의미일 것이다. ‘의’라는 표현은 마태에서는 ‘옳음’(being good), 즉 법적인 옳음의 의미(legal correctness)라기 보다는, 순종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관점에서 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의 동의어로 보인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이사야에 있는, 자기 백성을 대표하여 그들의 죄를 지고 가는 ‘종’의 영향을 이 본문에서 발견하기도 했다.
요한복음(1:32–34)은 적어도 세례 요한이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의 설명은 마가의 설명과 유사하다(특별히, 비록 가능성은 낮지만, 많은 후기 사본들에서 발견되는 ‘그에게 열리고’[open to him]라는 표현이 진정성이 있는 것이라면). 17절에 있는 삼인칭형태의 선포는 공적인 계시를 제안하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공적인 계시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지위가 그의 사역을 통해서 공적으로 언급되어지지 못했다는 사실과 자신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한참 후에야 그의 메시아 됨을 알아차렸다는 사실(16:13–20)과 조화시키기 어렵다. 그러므로 마태가 이곳에 등장하는 용어들을 변화 산 장면에 등장하는 단어들과 동화시키기는 했지만(17:5), 공적인 선포로 보이는 이 언급들은 아마도 예수님 개인에게 선포된 것으로 마태는 의도한 것 같다. 이 단락의 전체 요점은 예수님의 사명의 공적인 계시라기 보다는 예수님의 ‘임명’(commissioning)에 있다고 하겠다.
‘하늘이 열리고’라는 표현은 에스겔의 최초의 환상을 염두에 둔 표현 같은데(겔 1:1) 그것도 또한 강가에서 발생했다
하나님의 영의 강림은 아마도 오랫동안 부재했던 선지자적인 영감의 선물을 다시금 부어주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으나, 그 보다는 약속되었던 메시아의 보내주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이전에는 성령을 경험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가정할 필요는 없다. 보여진 환상은 그의 메시아적인 사역을 위한 임명을 상징하는 것이지 어떤 새로운 영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상징으로서 ‘비둘기’는 유대적 사고에서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몇 몇 후대 유대적 저술들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아마도 창세기 1:2에서 수면 위를 ‘운행하는’(hovering)는 성령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세 가지 일이 일어난다(16–17절). 그 세 가지 일은 하늘이 열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함, 그리고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림이다.
첫째, 하늘이 열린다(16절a). 하늘이 열린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세계로 내려오시는 것을 상징한다(시 18:9, 16–19; 144:5–8; 겔 1:1; 사 64:1). 여기서 “열리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오크떼산(ἠνεῴχθησαν)이 수동태인 것은 하나님이 하늘을 여시는 주체자이심을 암시한다
하늘이 열리는 것은 이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지는 것을 예고한다(27:51).
둘째,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온다(16절b). 이 표현이 어떤 뜻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비둘기의 일반적인 상징이 평화라는 점을 고려할 때 성령이 주시는 평화(샬롬)를 의미할 수도 있고, 이 표현을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는 것(창 1:2)과 연관 지어서 하나님의 [재]창조를 의미할 수도 있다.
셋째,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린다(17절). 이것은 시편 2:7과 이사야 42:1을 인용한 것이다. 시편 2:7은 왕으로서의 메시아를 예언하며, 이사야 42:1은 종으로서의 메시아를 예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과 권한을 가지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께 모든 권한을 주셨지만 예수님은 권한만을 행사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철저히 순종하시는 아들이시다. 그리하여 장차 아버지께서 예정하신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신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이러한 세 가지 일은 하나님의 삼중적 계시로서 예수님이 가지신 신적인 권위를 확증해 준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이 어떠한 메시아이시며 어떻게 구속의 사역을 수행할 것인지를 보여준다. 한편, 이런 일들을 예수님과 세례 요한만 보고 들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보고 들었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사람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볼 때 예수님과 세례 요한만 보고 들은 것 같다.
시편 2:7은 다윗 계열의 왕을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하고 그를 메시아로 이해하는 한편, 이사야 42:1은 그곳에 등장하는 종을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로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은 세 가지 주요 개념으로 상술될 수 있다. 예수님은 다윗 계열의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자신의 백성들의 죄를 지고 가는 사명을 가진 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