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잘 먹고 잘 살던가(느2: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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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일시 : 2022년 7월 31일 주일
제목 : 혼자 잘 먹고 잘 살던가
본문 : 느헤미야 2장 9-20절 *구728
결단찬양 : 주는 완전합니다
[도입]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이 뭔지 아십니까? 물론 허기질 때 먹는 라면도 맛있고, 또 추위 속에서 먹는 라면도 맛있지만, 제 기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은 남이 끓여온 라면에 “야~ 한 젓가락만.”이라 말하며 먹는 그 라면일 것입니다.
사실 제가 그렇게 말해본 적은 없는 듯합니다. 라면을 그리 썩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먹는 것 자체에 있어 큰 관심이 없기에 늘 한 젓가락을 내어주는 쪽이었지, 취하는 쪽은 아니었기에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주변 친구들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야~ 나 한 젓가락만 먹을게.”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 라면이 정말 맛있는건가 보다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종종 드라마나 영화 또는 영상매체를 통해 그러한 장면을 보게 될 때, 한 젓가락을 취하는 사람은 분명 “한 젓가락만 먹을게.”라고 말했지만, 막상 집는 모양새를 보면 한 봉지를 다 집어가는 듯합니다. 그럼 내어주는 쪽은 어이상실한 표정과 얼탱이 없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죠. “니 다 먹어라.”
음식에 있어서는 공감하지 못했지만, 저는 카페에서 주로 이런 일들을 경험하곤 합니다. 밥 먹는 속도가 상당히 느리고 길게 먹는 편인데, 음료도 그렇습니다. 저는 카페에 가서 음료를 시키면 1시간은 기본이고 때로는 2시간이 지나도 컵에 음료가 남아있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물론 저도 나름의 직장생활을 하기에 상대방과 속도를 맞춰 마시고, 또 가능한 사용한 컵은 그대로 반납하고 돌아오려는 노력을 하지만, 어찌되었든 제 성향은 느립니다.
그러다보니 음료 마시는 속도의 차이가 친구들하고도 꽤 납니다. 그럼 이미 다 마신 친구가 “야~ 좀만 마실게.”라고 말하며 자신의 컵으로 제 음료를 담아가는데, 보통 한 방울 남기고 지들이 다 가져갑니다. 아주 꼴불견이죠. 제가 음식엔 큰 관심은 없지만, 커피는 정말 좋아하기에 그들의 행동이 어이가 없습니다. 그럼 전 말합니다. “야 됐다~ 다 마셔라.”
좋게 말하면, 주변 사람들과의 상생이지만, 사실 상생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약탈 당한겁니다. 한 두번이면 장난이려니 하고 넘어가겠는데, 지속적으로 반복이 될 때, 그럼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인내 속 기도로 나아간 느헤미야]
사실 오늘 본문은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의 마인드와는 반대의 상황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부어주시는 그 은혜가 차고 넘치길 소망합니다.
9절과 10절을 봅시다.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쪽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저번 주 우리는 느헤미야가 왕의 조서를 받아 길을 떠났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조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 길을 막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긴 자들이 등장하는데, 누구입니까? 바로 “산발랏, 도비야” 입니다.
그런 자들을 뒤로 하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였고, 사흘이라는 시간을 재건하지 아니하고 지나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느헤미야가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12절입니다.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그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밤을 택하여 예루살렘의 무너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마음 아프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삶의 터전이 다시 돌아왔을 때 무너져 있을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생각만으로도 마음 아픈 일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어느정도였냐면, 14절을 보니, 탄 곳이 너무 많아 더이상 앞으로의 진전이 불가능할 정도라 말합니다. 얼마나 마음 아픈 일입니까?
16절입니다. “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족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알리지 아니하다가”
이 16절의 말씀이 더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왜요? 성전이 다 타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을 보았고, 그것때문에 마음아파 이 먼길을 나아왔으나, 느헤미야가 사흘간 어떤 일을 했는가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는 인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도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들에게 함께 기도하며, 함께 슬퍼하자 말할 수 있었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 생각하여 이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자신이 행했는가, 또 어떻게 자신이 지내고 있는가. 그저 사흘의 시간 동안 인내했고 기다렸습니다.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기도할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때 때론 인내가 필요합니다. 중보기도의 제목을 나누며 함께 기도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하나님과 단 둘만의 대화의 묵상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를 나눌 적절한 때를 느헤미야는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이르자 느헤미야는 어떻게 말합니까? 17절과 18절 함께 읽겠습니다.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우리가 당한 일, 즉 성문이 무너지고 성전이 불탄 것을 너희도 보지 않았느냐? 자! 이제 우리 일어나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건축하자! 이런 수치는 두 번 다시 없어야 하지 않겠냐? 이는 우리의 힘으로만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그 능하신 손이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우리 함께 일어나 함께 건축하자!”
희망이 없던 곳에, 모든 것이 불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던 죽은 땅 위에 느헤미야는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을 희망으로 보지 않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앞서 등장했던, 산발랏과 도비야 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둘에 더하여 게셈까지 등장합니다. 이 셋이 모여 어찌 말합니까?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이미 조서에는 왕의 도장이 찍혔으니 그 어느 누구도 막을 자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산발랏과 도비야 그리고 게셈의 눈에는 여전히 느헤미야는 아니꼬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일을 진행할 때, 그것이 선할지라도 누군가 아니꼽게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모여 예배드리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이 될 수 있습니다. 예배가 악하거나 저주스러운 것이 아닌데, 분명 선하고 또 사모해야 하는 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이고 악한 것일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입술을 열어 찬양하는 것, 또 몸을 움직여 율동으로 하나님 앞에 내어드리는 것이 분명 아름다운 고백이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행동이나 누군가는 이를 악하다 말할 수도 있으며, 선하지 않으며 오히려 분위기를 해한다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선한 일,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결코 순탄한 길만을 걸을 수 있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느헤미야에게도 동일했습니다. 분명 예루살렘에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는 것은, 예배당을 다시 세우는 것은 필요했고 귀했고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산발랏과 도비야 그리고 게셈은 이를 불편하게 보았다는 것이지요. 이때 느헤미야는 어떻게 외칩니까? 20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그가 의지하고 그가 믿고 그가 바라보는 이가 누구입니까? 이런 핍박 속에서 담대히 이 일을 행함은 느헤미야가 누구를 바라보기에 가능케 됩니까? 바로 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가능케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 결코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당장 돌아오는 수련회 앞에서도 선한 모습만 나올 것이라 장담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노력하겠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임하는 시간이 되도록 노력하겠지만, 우리를 방해케 하는 무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그러한 모든 순간 속에서 우리가 의지하고 믿고 바라보아야 할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어려움 마저도 희망으로 바꾸시며, 놀라운 은혜로 바꾸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적용]
사랑하는 청소년부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진리를 지키기 위해 힘쓰다 보면 어떻습니까? 기독교는 이기적인 종교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래서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종교가 기독교인 것처럼 비춰지기도 하지요. 진짭니까?
여전히 세상은 우리를 향해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말하지만, 실상 우리는 어떻습니까?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삶을 살아냅니까? 그들이 비웃을 때 느헤미야는 어찌 행동했습니까? 함께 일어나 함께 건축하자 외쳤습니다. 결코 혼자 힘으로 삶을 살아내지 않았으며 함께 상생하며 성장하는 일을 도모했습니다. 사람들과의 함께만 추구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도 함께 하심을 믿고 의지하며 나아갔습니다.
세상의 어떤 조롱과 비난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시며, 또 우리와 함께 하는 우리 친구들 또 우리 선생님들이 있음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상생하며 살아가는데 기쁨과 감사를 누리는 친구들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