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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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 Ton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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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0.02UNLIKELY
Fear
0UNLIKELY
Joy
0UNLIKELY
Sadness
0UNLIKELY
Language Tone
Analytical
0UNLIKELY
Confident
0UNLIKELY
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0.09UNLIKELY
Conscientiousness
0.13UNLIKELY
Extraversion
0.44UNLIKELY
Agreeableness
0.6LIKELY
Emotional Range
0.23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 .5
.5 - .6
.6 - .7
.7 - .8
.8 - .9
> .9
여름수련회가 이제 2주 앞으로 다가왔어요.
코로나도 그렇고 여러 고민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있잖아요.
알바 시간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미리 포기하지 말고 시도해주세요.
직장인들 휴가 최대한 안쓰게 하려고 공휴일이 있는 월요일 그리고 가까운 서울로 장소를 잡았어요.
긴 말하지 않고, 딱 두가지만 말할게요.
지난 2년 동안 수련회를 하지 못했죠? 수련회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지난 2년간 경험 했을거에요.
기회가 왔을 때 잡으세요.
은혜 받는 자리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 미리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날을 절대 스스로 포기하지 마세요.
이번 여름 수련회 주제는 ON AIR에요.
주제의 의미와 중심구절은 후에 운영팀에서 전달해줄거에요.
보면서 기도로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래요!
위기 의식 없는 삶
함께 다니엘 1장 1절을 함께 읽을건데요.
여러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읽어주세요.
함께 읽을게요.
“유다 왕 여호야김이 삼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상상하면서 읽었죠? 어떤 그림이 그려졌어요?
여호야김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왕이 된지 3년이 되던 어느 날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성을 에워싼 그림이 그려졌나요?
바벨론이 왜 예루살렘을 에워쌌을까요?
공격해서 지도에서 지워버리려고 한거죠.
바벨론 사람들은 지금 눈에 불을 키고 당장이라도 공격할 수 있는 준비태세를 완전 갖췄어요.
자 또 상상하는거에요.
그렇게 성을 빼곡히 에워싸고 날 죽일 듯이 쳐다보고 있는 바벨론이 내 앞에 있어요.
최강대국.
붙었다 하면 다 이기는 바벨론이 내 앞에 있어요.
그 모습을 여러분이 예루살렘 성벽에서 내려다 봤다고 생각해봐요.
어떤 느낌일 것 같아요? 눈 마주치면 진짜 맞을 것 같은 분위기에요.
겁이 나지 않겠어요?
악명 높은 바벨론이.
그 거대한 제국이 지금 작은 왕국을 둘러싸고 공격하려 하고 있어요.
전쟁이 벌어지면 내 목은 더 이상 여기가 아닌 땅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전혀 겁먹지 않았어요.
그렇게 바벨론이 날 죽일 듯이 몰려와서 화가 잔뜩 났는데도 평온해요.
무서워하지 않아요.
그 전에도 수없이 공격과 침입과 포위를 당했었어요.
극심한 재난도 여러번 당했어요.
그런데 그 때 마다 “나의 하나님께서 보호 하셨고, 끝내 승리를 경험하게 해주셨거든요.”
그래서 바벨론이 쳐들어 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겁먹지 않아요.
하나님이 또 보호하실 것이라 지레 짐작한거죠.
문제는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그들을 향해 경고 하셨다는거에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
법을 지키겠다고 말로만 떠들면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 수차례 경고를 하셨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었고, 하나님이 또 지켜주실거니까.
라는 안일한 마음.
위기 의식 없는 생각으로 있었어요.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죠?
2-3절이에요.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바벨론의 손에 넘기셨어요.”
“왕과 수많은 백성이 끌려갔어요.”
여러분 성경 한 번 볼래요? 그들이 어디로 끌려 갔다고 나오죠?
“시날 땅”이죠?
혹시 시날 땅이 어떤 땅인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 있을까요?
힌트를 주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정면으로 반박 했던 장소에요.
무엇인가를 높이 쌓았던 장소에요.
그 것 때문에 우리가 지금 외국어를 공부하고 있어요.
맞아요.
그 땅은 바벨탑이 쌓였던 곳이에요.
하나님의 목적에 반기를 들고.
흩어지지 않고 모여 자신들의 위대함을 드러내려 했던 그 장소에요.
이스라엘은 상당한 모욕감을 느끼고 있어요.
바벨론은 저주 받은 백성.
절대 구원 받을 수 없는 이방나라였기에 하나님이 막아주셨어야 했어요.
결국 전쟁에서 승리해서 웃는 것은 나였어야 했어요.
그런데 지금 전쟁에서 졌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고 포로까지 되어 버렸어요.
나의 자녀가 바벨탑이 쌓였던 바로 그 장소로 끌려 왔어요.
비참함 속에 부모들은 이런 질문을 하나님께 던져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맞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우리를 이 저주 받은 땅으로 오게 하셨는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일까?
“지금까지 하나님을 따른 것이 다 헛수고였다!”
자신들의 불순종을 전혀 기억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냈을거에요.
치밀한 세계관 전쟁
바벨론은 포로로 끌고 온 사람들 중 똘똘한 소년들을 선별해요.
그리고 바벨론식 교육을 통해 그들을 개조하는 전략을 사용해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해 식민지로 삼고 사용했던 전략과 같아요.
이스라엘.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시키려 해요.
일본이 한글이 아닌 일본어를 공부하게 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우리에게 강요하기 시작했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날려버리려고 한거에요.
읽고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바꿔어 버리려 한 것이죠.
겉 모습은 한국인.
유대인이지만 말과 생각 그리고 모든 행동은 일본인.
바벨론인으로 개조해버렸어요.
교육을 통해 사람을 바꾸는 것을 실제로 실천한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는 것 알아요?
(쉬고)
초중고등학교 때 이미, 하나님의 흔적을 지우고, 세상 문화를 따르고 가치있게 여기도록 교육 받아왔어요.
대학교에 가고 ,직장에 가고 또 새로운 곳에 적응하고 그 곳만의 문화를 알아야하죠.
그 문화는 절대 그리스도인의 문화.
하나님의 문화들이 아니에요.
세상을 기준으로 삼은 문화들이에요.
유대인 소년들은 3년이라는 시간동안 갈대의 문학과 언어를 배웠고, 이방 종교와 마술에 능숙한 사람들이 되었어요.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요?
초등학교 6학년, 중고등학교 6학년 대학교까지.
최소 14년에서 18년이라는 시간을 세상 문화.
즉 바벨론의 문화를 배웠고 그 안에 살아왔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 왔어요.
물론 그 시간 동안 매주일 교회와서 예배도 드렸고, 여름성경학교 수련회 등을 통해 말씀을 꾸준히 들어왔어요.
하지만 세상 문화를 학습해온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시간을 비교하면, 절대적으로 세상 문화에 쏟은 시간과 에너지가 훨씬 더 많을거에요.
그럼 질문.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 중 어느 편이 더 익숙하고 편할 것 같아요?
우리의 삶은 환경에 정말 많은 영향을 받아요.
환경에 영향을 받는 삶에 대해 한번 나눠볼까요?
첫째, 제가 필리핀에 있었을 때에요.
이상하게 제 주위에는 게이 친구들이 많았어요.
어딜 가도 게이들이 먼저 다가왔어요.
처음엔 진짜 경기를 일으킬만큼 싫었어요.
남자 친구의 그 요염한 손동작과 끈적거리는 눈길.
그리고 저를 향한 이상한 집착이 진짜 너무 싫었어요.
진짜 쎄게 걷어찬 다음에 추방 당하고 싶을 정도로 소름끼쳤어요.
그런데 있잖아요.
지나 갈 때마다 마주치게 되니까요.
뭔가 이상하게 정이 드는거에요.
아 오해하지 말아요.
저 결혼했어요.
그래서 어느 날 이제 그 게이 친구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버거킹을 갔어요.
그리고 물어봤어요.
“야 너는 왜 게이냐? 너 원래부터 그랬어? 원래부터 남자가 좋았어?” 그랬더니 그 친구가 이렇게 대답을 하더라구요.
“아니.
난 여자가 좋았는데 지금은 남자가 좋아.
사실 형이 2명 있는데, 형들이 게이야.
형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또 계속 보다보니 나도 그렇게 됐어”
그 친구는 환경적 요인으로 게이가 되었던거에요.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처럼 이성을 좋아했던 사람이었는데, 환경에 따라 변하게 된 것이죠.
둘째, 저는 대학교에 입학하자 마자 C.C.C를 찾아 갔어요.
예쁜 누나가 강의실에 들어와서 “끌리면 오라”라고 말하고 나가서 ‘저거 뭐지?’하고 찾아간 것도 있었지만, 대학교 특유의 음주문화에 제가 동화될 것이 염려가 되어서 기독교 동아리를 찾아 갔어요.
사실 대학교가 그렇잖아요.
보는 사람 없는 곳. 나를 아는 사람이 적은 곳 그리고 신앙의 홀로서기를 처음 경험해야 하는 곳.
그러한 음주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넘어지는 것이 정말 싫었고 염려가 되었기 때문에 저는 동아리에 가입을 했어요.
그 곳 덕분에 저는 저의 믿음을 지키고 환경을 넘어 많은 것을 배우며 성장할 수 있었어요.
셋째, 이건 여러분에게 적용되는 환경적 요인이에요.
지난 2년 반 동안 모일 수 없었어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죠.
집합 금지 명령과 함께 교회들이 폐쇄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교회 문을 닫았어요.
그리고 온라인 예배로 전환이 되었었어요.
처음에 우리 어땠죠?
현장 예배를 그리워했고, 모이지 못하도록 하는 정부의 지침을 이해하면서도 모이기를 간절히 원했었어요.
그렇게 온라인 예배가 진행이 됐어요.
한주 두주, 한달, 두달.
육개월.
일년.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렸을 때 여러분 마음의 변화가 생기지 않았었나요?
어쩌면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죠.
“내가 예배를 드리는지 안드리는지 누가 알거야.
오늘은 온라인 예배 드리지 말자.”
“오늘은 좀 피곤한데, 소파에 누워야겠다.
아 옷 갈아입기 귀찮다.
아 씻기 귀찮다.”
이 정도까지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 같기는 한데 “잠시 신앙생활을 쉬어볼까?” “이참에 청년부 가지 말아야겠다.”
(쉬고)
다시 질문할게요.
여러분 세상과 하나님 중 어느 쪽이 더 익숙하고 편안한가요?
여러분 환경 혹은 여러 다른 이유들로 예배를 향한 마음이 좀 변하지는 않았나요?
예전에는 주일에 예배를 빠지면 안된다는 인식이 우리에게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이동하면서 온라인으로 예배 드리면 되니까.
온라인 예배가 있으니까.
대안을 생각하고, 나의 믿음과 삶을 타협하며 조금씩 바꾸어 가고 있지는 않았나요?
하나님보다 세상이 더 가깝게 느껴지고, 그 곳의 문화를 따르는 것이 더 익숙한 것이 저와 여러분이에요.
갈대아의 문학과 언어 교육은요.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의 읽고 생각하는 모든 모습을 바꾸어 버렸어요.
살아가는 환경이 이스라엘이 아닌 바벨론이 되다 보니까요.
처음엔 어색했던 바벨론식 표현과 옷들이 이제는 원래 내가 입었던 것처럼, 나의 언어였던 것처럼 너무나 편안해졌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들의 세계관이, 하나님이 최우선 순위였던 그들의 삶이 세상으로 가득 차 버리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4명의 유다 청년들에게 또 위기가 찾아왔어요.
이름이 변경되었어요.
지난 주 기도카드에서 보았던 것처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사탄의 자녀로 바뀌게 된거에요.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제 그들은 겉모습만 유대인일뿐, 모든 것들이 바벨론화 되어버렸어요.
저와 여러분도 자칫하면 이렇게 될 수 있어요.
겉모습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세상화가 되어버릴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다니엘과 이 세친구를 통해 나의 모습을 반드시 돌아보아야 해요.
“나는 어떠한가.
겉모습만 제외하고 모든 것들이 세상과 밀착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보다 세상이 더 편하고 익숙하고 가깝지는 않은가."
세상이 더 편하고 가까운 것은 어쩔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교육을 받으며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왔기 때문이에요.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것들을 주입하고, 그것을 따라야 한다 말할거에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가치가 없다 이야기 할거에요.
다니엘과 세친구는 3년이라는 시간을 바벨론식 교육을 받아야 했어요.
제대로 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름부터 바뀌었어요.
이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사탄의 아들’ ‘이방 신’으로 불러요.
그런데 여기 끝이 아니에요.
또 이어서 위기가 찾아왔어요.
이것은 포로가 된 것보다, 이름이 바뀐 것보다 더 큰 어려움이 있는 위기였어요.
바로 음식이에요.
1장 5절이에요.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다.”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을 바벨론식으로 바꾸겠다는 것이죠.
교육과 이름을 바꾼 것을 넘어 이제는 먹고 마시는 것까지 관여하며 껍데기만 빼고 모든 것을 바꾸려는 의도로 음식을 왕이 지정해주기 시작했어요.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 음식은 정말 민감한 문제에요.
교육을 받는 것도 이름을 바꾼 것도 받아드렸던 다니엘과 세 친구가 거부하기로 결정을 해요.
왕이 주는 식단을 포기해요.
왜 그 음식을 포기했을까요?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 음식은요.
단순히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음식을 먹으면서 “내가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것을 확신”했어요.
왕이 주는 음식들은 이방신의 제사에 올랐던 음식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부정하다 말씀하셨던 동물들의 고기도 있었어요.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을 먹는다는 것은, 유대인의 삶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음식 먹는 것을 포기했어요.
그들은 선을 넘지 않기로 결정한거에요.
한계선을 정했어요.
나라가 망해 끌려온 것에도 하나님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받아드렸어요.
이름을 바꾸었을때도, 나는 유대인으로 살아가면 되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니까 받아드렸어요.
그런데 음식은 받아드릴 수 없었어요.
그들이 세워놓은 한계선에 다다르자 “이것만은 받아드릴 수 없다.”는 마음으로 저항 하기로 결단해요.
사랑하는 여러분.
저도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서 참 많은 결단을 하며 살아요.
말씀을 듣고 “이번 한주는 이렇게 살거야!”라고 결단해요.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아요.
왜 우리가 결단한만큼 살지 못하는 줄 알아요?
저와 여러분에게는 마지노선이 없기 때문이에요.
한계선.
내가 이것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내 신앙에 이 것은 절대 받아드릴 수 없다.
라는 그 마지노선의 경계가 있었는데 희미해졌기 때문이에요.
사실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선이 있었어요.
아니 있어야 해요.
하나님께 나를 내어 드리는 삶을 살기로 한 우리이기에 각자가 정해 놓은 받아드릴 수 있는 그 선이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결정적일 때 보이지 않는거에요.
선택의 순간에 그 선을 잊는다는 거에요.
왜요? 희미해졌기 때문이에요.
선을 넘지 않기로 결정은 했지만, 그 선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선을 넘어요.
저항하지 못해요.
시험대에 오르다.
이제 다니엘과 세 친구는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어요.
자신들이 정해놓은 한계선 앞에 선 그들은 결단해요.
자신이 서 있는 그 시험대에서 힘껏 저항하기로 마음 먹어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놓은 자신들의 정확한 선이 있었어요.
그 선을 지키기 위해 죽을 수도 있지만,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환관장을 찾아가 자신들의 결단을 말하기 시작해요.
환관장은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고 아끼는 초엘리트 학생 네명이 찾아왔을 때 기뻤을거에요.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들을 듣고 수용해줄 용의가 있었어요.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환관장의 얼굴이 미묘하게 복잡해지기 시작해요.
왜냐하면 자신이 아무리 이들을 사랑하고 아낀다해도, 자신의 목숨이 더 중요하거든요.
왕의 눈밖에 나고 싶지 않았던거에요.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으면 환관장의 자리를 빼앗길 뿐만 아니라, 죽을 수도 있었거든요.
환관장을 고민에 빠뜨린 네 친구의 요구는 모두가 아는 것처럼 “왕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였어요.
채식을 먹일순 있죠.
그런데 만약 살이 빠지거나 피부가 퍼석해지거나 이러면 왕이 바로 알아볼 것이고, 그러면 환관장은 소환 당할거에요.
하지만 환관장은 그 네명에게 설득 당했고 결국 10일 동안만 채소를 먹이기로 했죠.
그 결과? 훨씬 더 윤택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되었다라고 성경을 이야기 해요.
혹시 여러분 중에 채식주의자 있나요? 그쵸.
고기를 먹는 즐거움을 버릴 수는 없죠.
안 먹어봤다면 모를까, 한번 먹어봤으면 끊을 수 없고 계속해서 생각나는 것이 고기죠.
저는 인도에 있었을 때 한 7개월동안 강제 채식주의자가 되었었어요.
저는 닭발 빼고는 다 잘먹어요.
외국에서도 음식을 가리지 않고 엄청 잘 많이 먹어요.
기숙사에서 살면서 학식을 먹으러 내려가면, 커리 5종류와 난 그리고 라씨만 있어요.
그리고 아주 작은 후라이드치킨 조각들이 있어요.
처음에는 커리랑 난만 먹었어요.
그리고 채소들만 먹었어요.
여러분 저는 채식이 그렇게 다이어트에 좋은 것인지 몰랐어요.
인도에 갈 때 75키로 정도였는데, 7개월간 채식을 하니까요 68키로가 되는거에요.
그렇다고 제가 안먹은게 아니에요.
진짜 산처럼 쌓아놓고 먹고 모자라서 통에 담아서 방으로 가져가서 먹기도 했어요.
먹을때는 배가 부른데 금방 꺼지더라구요.
그리고 제 인생 최고로 좋은 피부를 가지게 되었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 채식을 하는 것이 꼭 몸의 불균형을 가져오고 하는 것은 아니구나! 라는 것을 그 때 알았어요.
하지만만저는 열흘동안 채식을 한 결과가 살이 더 오르고 윤택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솔직히 전 동의하기가 어려워요.
저는 7개월을 먹었잖아요.
근데 고작 열흘인데 그러한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은 이해하기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여러분 오늘부터 우리가 열흘간 채식을 하면 피부가 좋아지고 막 살도 오르고 할 수 있을까요?
뭐 샐러드를 한끼 먹을 때마다 1Kg씩 먹으면 찌긴 하겠죠.
그런데 쉽지는 않을거에요.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먹기 시작했어요.
그들도 그런 변화까지 생길 것을 몰랐을거에요.
채식을 하는 열흘동안 거울을 보며, 달라지는 서로의 얼굴과 모습을 보며 그들은 “하나님이 정말 일하고 계시는구나!” “비록 나는 이런 상황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를 깨달았을거에요.
나라의 멸망.
포로 그리고 세뇌교육을 받고 있죠.
시날 땅에 끌려가는 자녀들을 보며 “하나님 계시지 않는다!”라고 절규했던 사람들과 다르게 이들은 그 현장에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는거에요.
갈대아식 세뇌 교육 그리고 이름을 바꾸는 것은 준비 단계였어요.
그것까지 수용하고 나니 본격적인 시험대.
왕의 음식을 먹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어요.
그 시험대 위에서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선을 지키며, 저항했어요.
그리고 시험을 이겼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러한 시험의 순간 앞에 설 때가 많아요.
그 선을 넘어설 때도 있고, 아니면 버텨낼 때도 있을거에요.
오늘 이 네 사람은요.
그 선 앞에서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지키기로 결정을 했어요.
모든 상황과 현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걸기로 했어요.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숨겨놓았던 자신의 계획을 보여주세요.
여러분 2절, 9절, 17절을 한번 봐주세요.
2절.
주께서.. 넘기시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9절.
하나님이.. 하신지라.
“환관장의 설득 역시 그 네사람이 논리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도우심이에요.”
17절.
하나님이.. 주시고.. 하시고.. 주셨다.
“네 사람은 3년 내내 채식을 했어요.
그리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래서 환관장의 큰 자랑거리가 되었어요.”
내가 꿈꾸었던 미래가 절대 아니었던 삶이지만.
모든 것들이 끝장난 것 같아 보였던 나의 삶이었고, 원하던 공부도 직장도 아니었지만 이 네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했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결단하고 부던히 노력했어요.
바벨론에서 중요한 위치에 올라갈 것을 기대하지 않았고, 그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했어요.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에 남을만큼 크게 사용하셨어요.
그들은 끝까지 그 선을 지켰어요.
겉은 유연하게 대처했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을 굳건히 세우고 버텨냈어요.
여러분이 이 네 친구였다면 어떠했을 것 같아요.
갑작스럽게 주위 사람들이 다 죽고 포로가 되어 타지로 끌려갔는데, 이상한 옷을 입히고 공부를 시켜요.
멘붕오지 않았을까요?
제가 필리핀 처음 갔을 때 그랬어요.
선교사님을 필핀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선교사님도 필리핀에 가신지 한달밖에 되지 않았고 집에서 공항으로 운전해서 오시는데 길이 막히고 잘 모르실 때였어요.
저는 공항에 도착해서 나왔는데 영어 한마디도 못하죠, 온통 삐끼들이 달려들죠.
그 때는 카톡도 없었죠.
진짜 초멘붕이었어요.
필리핀 공항에 사람이 정말 많았는데요.
그 안에 따로 떨어져서 미아가 된 느낌이었어요.
선교사님이 언제 올까?에서, 나는 여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냥 포기하게 되더라구요.
그렇게 3-4시간을 말도 통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동공 지진 상태에서 계속 서 있었요.
이게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 아닐까요?
그런데 이 네친구는 그런 멘붕 속에서 멘탈을 다잡고 다시 일어섰어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거든요.
이 네사람처럼, 필리핀 공항의 국제미아 양휘석보다 더 최악과 멘붕의 상태에 빠지셨던 분이 있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요.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있는, 완전히 망가진 세상에 오셨어요.
얼마나 낯설었을까요?
망가진 세상으로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인간의 몸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에 기꺼이 들어오셨어요.
망가지고 오염된 세상을 바라보는 창조주의 마음 어떠했을까요.
죄 속에 신음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비참함을 감수하며 오셨어요.
그 분이 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기 위해서였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우리를 위해 오신 그 분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있어요.
우리가 지켜야 할 선을 반드시 지켜내는거에요.
여름수련회의 부제목은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에요.
여러분 우리는 선을 지우고, 경계를 무너뜨리는 바벨론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하나님 안에서 내가 선을 긋고 그 위에 매일 우리가 덧칠하지 않으면요.
우리는 선을 넘나들다 흔적도 없이 아스러지는 인생이 되고 말거에요.
이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세상 문화의 흐름을 따라가라고 계속해서 압박할거에요.
세상 흐름에 뒤쳐지면 안되겠다는 불안감 속에 살아가도록 만들거에요.
그 때 이 것을 꼭 기억하세요.
바벨론과 같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 계시다는 것.
마귀가 세상의 권세 잡은 자가 세상의 주인 같지만, 사실은 진짜 주인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세요.
위기의 순간에 그 사람의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에요.
다니엘과 세 친구는 위기의 순간.
말씀을 기준 삼아 선을 세우고 그 선 앞에 서서 저항했어요.
그들의 믿음의 진가가 드러난 순간이에요.
바벨론에서 살아가는 것 정말 어려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리 포기해서는 절대 절대 안돼요.
수련회 가는 것 아직도 고민해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시작되었어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시계는 흘러가고 있어요.
여러분 지금부터 결단하지 않으면, 매일 그어진 나의 선을 보고 거기에 덧칠을 계속하지 않으면요.
수련회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가 때려박히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요.
저와 여러분은 바벨론에서 살아가는 바벨론인이 되고 말거에요.
여러분에게 허락된 선. 말씀 앞에 그린 나의 선이 무엇인지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해요.
내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헐 선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그 시간이 바로 수련회가 될거에요.
세상에서 넘어질지언정 굴복해서는 절대 안돼요.
다니엘과 세 친구는 넘어졌어요.
하지만 굴복하지는 않았어요.
그 선을 긋고 앞에서 저항했어요.
하나님이 없어 보였던 그 순간에 그들이 보였던 그 행동들은 그들을 말할 수 없는 회복과 은혜의 길로 인도했어요.
이제 그 행동과 저항을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때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순간과 행동 그리고 저항을 보고 계시며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고 계셔요.
그 힘을 경험하고 누리고 재확인하는 이번 한주의 삶 그리고 여러분을 위한 여름 수련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기도회
다 듣고 계신 나의 주님께
- 나를 위한 기도
> 너의 모든 한탄과 불평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모든 것들을 듣고 계셨다.
> 그것을 신뢰하는가?
신뢰하는 내가 되기를 기도하라
> 세상과 동화되지 마라.
너에게 귀를 기울이고 눈을 고정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매달리라
> 선을 다시 그리라.
선명해질 때까지 덧칠하라
> 그 은혜가 있기를 기도
2. 세상의 유혹 시험이
- 수련회를 위한 기도
> 여러 관계적인 고민, 알바, 직장 등으로 인해 수련회 결정을 하지 못하는 청년들이 있음
> 스스로 그 은혜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기를
> 또 수련회를 가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갈 수 있는데 왜 스스로 포기하는가
> 수련회를 기대하는 우리 가온누리가 되기를, 갈 수 있는 결단을 할 수 있기를
>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이미 흐르고 있다.
- 수련회를 위한 기도
> 서로를 향한 관심과 마음이 회복되어지는 수련회가 되기를
>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공동체로 만들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 공동체로 회복되지 못하도록 막는 수많은 영적 공격들을 거뜬히 이겨내고, 관계 회복을 경험하는 수련회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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