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2)

느헤미야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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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가 다 형제라
성경 : 느5:1-13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보면 일반적으로 ‘악의 평범성’을 떠올린다. 아이히만은 나치에서 일한 지금으로 말하자면 공무원이었다. 그는 유대인을 직접적으로 죽이지는 않았다. 그가 한 일은 유대인들에 재산을 몰수하고, 수용소로 이송하는데 기여했던 인물이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대인들이 나치에 소속된 사람들을 심판하면서 이 사람도 국제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는 일을 감당했던 이 사람이 너무 평범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냥 자신에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요즘 인터넷 댓글을 보면 관상가들이 참 많아 보인다. ‘관상은 과학이다’그러면서 본인이 생각하기에 악한 사람을 조롱한다. 그런데 아이히만은 너무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사람이 재판을 받을 때 했던 아이히만의 증언이었다. 사실 나치와 독일 사람들도 잘못했지만,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앞장선 사람들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마치 일제식민지 시절 친일 활동을 하며 조선인들을 괴롭히고 학살하던 것과 같았던 것이다.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공동체는 또 한번의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 4장을 설교할 때, 다 살펴보지 못했다. 그 빠진 내용 중에 이스라엘은 무리를 나누어서 서로 밭을 갈거나 경비를 섰다. 그래서 그들은 한 손에는 광이와 한손에는 칼을 들고 성벽을 건축해야 했다. 다시 말해 산발랏과 도비야와 같은 심리적 공격이나 외부적으로부터 경계를 서면서 성벽을 재건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부에 문제가 생겼다. 사실 외부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내부적으로 단합을 이루기 쉽다. 그러나 내부에서 문제가 생기면 하나가 되는 것이 참 어렵다.
사실 나라를 다스리며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민생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지난 정권이 대선을 앞두고 코로나 방역 조치를 완화했다면, 이재명씨가 당선될 확률이 높았다. 개인사업자들과 소상공인들이 코로나 영업 조치로 불만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도 오랜 방역으로 지쳐 있을 때였다. 먹고 사는 문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중요한 문제다. 이런 문제가 성벽을 건축할 때 일어나고 말았다.
원망하는 사람들
1절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최근 금리가 인상되면서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은 참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평범한 상황에도 빚이라는 것은 삶을 무겁게 만드는데, 그 빚에 빚이 더해지면 정말 숨이 막힐 때가 많다. 예루살렘은 오랜 시간 황폐하였다. 그리고 페르시아에서 돌아온 사람들도 성전을 회복하고 자신들에 가정과 일을 돌보아야 했다. 그 일에 너무 함몰되어서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자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보내기도 했다.
약속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지만 일반적으로 농사가 잘되는 지역은 극히 일부분이다. 약속의 땅에 젖과 꿀이 흐른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채우신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특히 예루살렘은 농사가 잘 안되는 것이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러니 물질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농사가 실패하면 할수록 빚은 늘어났고, 땅 주인이 소작농으로, 소작농이 노예로 팔려 갔다. 그래서 오병이어를 일으키신 예수님을 임금삼으려는 마음이 컸던 이유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 느헤미야 시대도 이와 같은 상황이었다.
한날은 성벽을 건축하고 있는 느헤미야에게 백성들이 찾아왔다. 데모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심각한 빚을 지고 있는 백성과 아내들이었다. 그리고 비명에 가깝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다.
① 2절을 보면, 아무 땅도 없고 노동을 통해 하루 하루를 사는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하루를 일하지 않으면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② 3절을 보면, 밭과 포도원 그리고 집을 담보 잡힌 사람들이었다.
③ 4절을 보면, 밭과 포도원은 소유하고 있지만, 세금을 내기 위해서 빚을 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이들 모두가 절박한 상황에 있었다. 그런데 하루하루가 어려운 사람들이 성벽 재건에 동참하면서 삶이 더 어려워진 것이다. 그리고 또다른 이유는 이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앞장선 사람들이 귀족이나 유대 지도자들이었다. 그들 때문에 백성들이 더 고통 속에 있었고 백성들이 바라본 느헤미야라면, 일을 성취하고 리더십 있게 움직이는 ‘그’라면 우리를 도와줄 수 있겠다는 바람으로 찾아왔을 것이다.
사실 귀족과 방백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이자놀이를 하고 있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가난한 백성들이 아내와 함께 느헤미야를 찾아왔던 것이다.
4절 “....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5절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녹을 먹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느헤미야에게 왕에게 바치는 세금 때문에 삶의 터전이 담보 잡혔다고 말한다. 그리고 5절에서는 유대 지도자 그룹들의 사채 때문에 사람들이 종으로 팔려나갔다. 그리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땅과 소유물이 이방인들에게 넘어갔다.
특히 5절 하반절에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라는 말씀이 우리 성경은 일반적인 종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말은 성적인 도구가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에 종됨이라는 말이 이 페르시아 시대에서는 겁탈이나 성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특히 에스더 7장 8절에서 “ 하만이 에스더가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렸거늘 왕이 이르되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하니”할 때 강간이 바로 ‘종된’과 같은 말이다. 정말 끔찍하다. 자녀가 종이 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인데, 딸이 성적인 도구로 팔려 나가는 현실은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야 하는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이것이 이방인들 때문에 생긴 문제만은 아니었다. 사실 유대 리더 그룹이 더 문제였다. 그들은 지금 느헤미야와 함께 하나님께서 성벽재건에 대한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잘못 살아오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이유는 제사장의 나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통해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생명을 흘려보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생명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자를 내지 못하면 그들의 소유를 돌려주지 않았다.
레25:36-37, 39-40절
이스라엘도 돈을 빌릴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종이 되어도 종이 아닌 형제로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희년이 되면 다시 돌려주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자를 받았고, 종으로 삼았고, 그들의 담보물을 돌려주지 않았다.
저는 야고보서 설교를 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았던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다. 제 인생에서 통장 압류를 3번 정도 당해봤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사람을 붙여 주셨다. 그분들은 저에게 아무런 담보 없이 돈을 빌려주셨다. 사실 그냥 주신 것이었는데, 제가 돌려 드렸다.
지난 교회에서도 가정에 문제가 생겨서 돈을 빌렸다. 신용이 낮다보니 이자가 높은 돈을 빌렸다. 그러니까 달달이 이자는 나가는데, 원금이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그것을 알게 된 목사님께서 돈을 빌려 주신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목사님은 돈이 없는데, 큰 돈을 주셨다. 알고보니 어느 권사님께 제 사정을 말씀드리고 돈을 빌리신 것이다. 그래서 그 돈을 은행에 다 갚고, 사례비를 받을 때마다 50만원 상려금이 나오는 달에는 100만원씩 권사님께 갚았다. 제 평생 은인이시다. 그래서 이번 5월에도 찾아 뵙고 생선구이를 대접해 드렸다.
그리스도인에게 돈은 생명을 살리고 사람을 남기기 위해 주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2. 화가난 느헤미야
6-7절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이 내용을 알게 된 느헤미야는 너무 화가 났다. 화가 안 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때, 느헤미야는 바로 반응하지 않고 깊이 생각한다.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감정적인 반응만을 보인 것이 아니었다. 이 순간 잘못하면 성벽 재건 자체가 수포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깊이 스스로 되물었던 것이다. 지금 성벽재건이라는 중심에 이자놀이 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한 느헤미야는 귀족과 방백들을 꾸짖었다. 그리고 꾸짖음도 모자라서 대회를 열어서 온 이스라엘 앞에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이렇게 한 이유는 이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느헤미야 입장에서는 이 일이 참 힘들었을 것이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느헤미야 본인은 예루살렘에 오지 않아도 잘 사는 사람이었다. 페르시아 왕의 곁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마음 때문에 왕을 설득시키고 어려운 걸음을 하였는데, 이제 성벽 재건을 시작했는데 이런 일이 터진 것이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원망할 때 인간적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저는 한 번씩 하나님께 농담할 때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 목회 선배님들처럼 북만쳐도 아이들이 몰려 오던 시절에 저를 부르시지,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 부르셨나요?’하고 말이다.
예전에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프로그램이 ‘남자의 자격’이었다. 방송인들이 음악감독 박칼린씨와 함께 합창하면서 인기 몰이를 하게 되었다. 그 맴버중에 부활이라는 그룹의 김태원씨가 있었다. 저는 이 프로에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사람이 김태원씨라고 생각한다. 예상치 못한 인기도 받았지만, 정기 검진을 하면서 위암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것도 개복하지도 않고 내시경수술이 가능한 시기에 발견 된 것이다.
저는 세례 문답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시간에 꼭 해드리는 말씀이 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고자 하면 반드시 시험이 있습니다. 가족이 갑자기 반대하거나 가정에 어려운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말이다. 믿음의 일을 위해 헌신해도 느헤미야처럼 어떤 사건이 생길 수 있다. 기도 많이 해도 삶에 시험이 찾아올 수 있다. 그때 느헤미야처럼 그 일을 포기하면 안 된다. 느헤미야처럼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인데, 짐 엘리엇과 동료 선교사들이 에콰도르 밀림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갔다. 그런데 모두 순교하게 된다. 그런데 그의 아내들이 그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고 당신들이 죽인 사람이 남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부족을 주님께로 인도하였다.
듣기 좋아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은보교회 와서 보니까 성도님들이 참 성숙하신 분들이 많으시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나 가정이나 어떤 문제가 생기면 느헤미야와 같은 시선으로 바로 볼 수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실패할 때에는 실패하게 하신 이유가 분명히 있더라.
10, 12절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 /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 내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그 말대로 행하겠다고 맹세하게 하고”
느헤미야가 있을 때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여러분이 있을 때 교회에 문제가 나타나고, 여러분이 있을 때 가정에 문제가 일어난 것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이기에 하나님이 부르셨음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적임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다. 교사로, 성가대로, 예친 리더로 부르신 것은 적임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기질을 통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던 이자놀이가 예루살렘에서 정리하게 되었다. 정말 예루살렘이 겉모습뿐만 아니라 거룩한 성으로 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3. 총독 느헤미야
14절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녹을 먹지 않았다는 것은 페르시아에서 월급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사심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총독들과 같이 자신이 속한 지역에서 세를 거두어 착복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14절을 보면 느헤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뇌물이나 눈먼 돈을 받지 않았다는 의미다.
사회에서 계급이 올라가면 뒷돈이 들어온다. 그 뒷돈이 감사 인사 수준이 아니라 뇌물의 의미로 다가온다. 인사 고과 반영을 위해 인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6절 말씀을 보면,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 성벽 공사에 집중하며 땅을 사지 않았다고 말한다. 성경은 언약의 땅에서는 땅을 사고팔지 못하도록 했다. 경제적 측면에서 가난한자를 보호하는 법이기도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언약의 땅에서 우리 예수님이 오셔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총독은 좋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좋은 땅을 사서 이득을 취하여 이익을 챙겼다.
예나 지금이나 큰 돈을 벌려면 땅을 사야 한다. 땅을 사는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더 좋은 집을 사는 것도 죄가 아니다. 내가 구입한 땅이나 집이 재개발될 수 있다. 감사한 것이다. 그때 자장면 한그릇 꼭 사주셔야 한다. 그런데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정보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부당한 통로로 얻은 그 정보력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이다.
지금도 정보력으로 도로가 어디로 나고, 어디가 재개발이 되고, 성서 어느 지역이 명동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알고 돈을 바라고 들어가면 안 된다. 세상은 그것을 능력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죄라고 읽으신다. (오늘의 한 줄 카피라이터)
그리고 18절 말씀을 보면 다른 총독들처럼 과도한 예전을 받지 않았다. 백성들이 힘겹게 사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익을 취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은 부당하게 지계표(경계)를 옮기는 자를 심판하신다. 그렇게 취한 이득은 반드시 쏟아 놓게 되어있다. 그런 돈은 헌금으로 받으시지 않으신다. 믿음은 반드시 돈에 의해 드러나게 되어있다.
<결론>
오늘은 요셉 이야기로 결론을 삼고자 한다. 요셉은 총리에 오를줄 몰랐다. 그 당시 애굽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었다. 그런데 요셉은 자신에 지위를 이용하여 배를 불리지 않았다. 성실히 하나님이 주신 꿈을 살았다.
살찐소와 마른소의 꿈을 통해 풍년동안 곡식을 창고에 모으고, 흉년일 때 그것으로 생명을 살렸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 되도록 만들었다.
요즘 경재적으로 참 어려운 시기를 살고 계신 것을 알고 있다. ‘힘드시죠’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상한 법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럴 때일수록 다 주님께 맡겨 드리고, 더욱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역사는 드러날 것이다. 우리 은보 식구들의 사업장과 직장을 통해 생명이 살아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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