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품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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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 나라는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새벽기도에 오신 성도님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번째 교훈은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면 나와 다른 사람도 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55절에서 58절까지는 다윗이 어떻게 사울 밑으로 들어가 이스라엘의 군대에서 직함을 맡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이 부분을 보면 지난번에 다윗이 수금을 연주하는 자로 사울의 궁에 들어갔었는데, 왜 이 부분에 사울이 왜 갑자기 다윗을 처음 보는 것처럼 이야기 하나 라는 논쟁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이전에 수금을 치는 자로 사울을 본적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대해 학자들이 여러 결론을 내렸는데 첫 번째는 55절에서 58절에 다윗에게 출신을 물어보는 것은 수금을 연주할 때 와는 다른 맥락에서 본격적으로 포상을 하고 군대장관으로 세우기 위한 절차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사울이 악령이 들려서 편집증적인 증세를 보여서 다윗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다윗의 출신을 물어보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랬든 저랬든 이제 다윗이 본격적으로 사울의 휘하로 들어가서 군사지도자로서 활약하는 계기가 됩니다.
18장 1절에 보시면 다윗이 사울의 부름을 받은 이후로 다윗과 요나단의 만남이 나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소위 퀴어신학자라고 해서 성경을 통해 동성애를 입증 하려는 학자들이 이 장면을 보고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 관계였다고 그렇게 해석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다윗은 밧세바라는 여인을 보고 성적인 죄를 지은 이성애자입니다. 여기서부터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동성애로 여기는 것이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는 것은 남녀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도와 성도간의 교제의 사랑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자신의 갑옷과 무기를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을 향한 전적인 인정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요나단은 언약백성을 지키고 복음의 대적에게 승리를 거둔 다윗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누구입니까? 요나단 또한 전쟁의 영웅입니다. 사울의 군대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춤해있을 때 무기를 드는 자와 단 둘이서 블레셋 진영에 가서 이십명이나 죽이고 그곳에 하나님의 떨림을 전달했습니다. 요나단의 기선제압으로 인해서 블레셋 군대가 물러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요나단도 이스라엘 군에서 용맹하고 영향력있는 그런 영웅입니다. 요나단은 왕자고 다윗이 데뷔하기 이전에 블레셋 전에서 전과를 올린 전쟁영웅입니다. 요나단이 생각했을 때 뒤늦게 나타난 다윗이 경계가 되고 눈꼴시릴 수 있었습니다. 왕궁에서 수금이나 타는 놈이, 베들레헴에서 양치기나 하던 천한 놈이 어쩌다가 골리앗 한 번 이긴 것 가지고 되게 으스대네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왕자고 전쟁영웅이고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고백으로 복음의 대적에게 승리한 다윗을 동역자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다윗을 구약교회의 동역자로서 함께 복음을 대적하는 이들과 싸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습니다. 요나단이 자신의 군복이나 무기를 다윗에게 주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다윗에게 그것을 주려면 먼저 무기와 갑옷을 벗어야 하지 않습니까? 옷은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지입니다. 요나단이 이것을 벗었다는 것은 자신의 지위나 명예나 이런 것을 내려놓고 겸손함으로 동역자를 받아들였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 내가 이런 사람인데, 내가 너랑 급이 다른 사람인데 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섬길 동역자가 생기는 것이 너무 기쁘고 행복하고 그 사람 앞에서 낮아져 함께 교제할 수 있습니다.
(적용) 교회 생활하다보면 내가 세상에서 이 정도 지위에 있는 사람인데 내가 이정도 되는 사람인데 저 사람이 나와 급이 맞는 사람인가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많이 배우지 못하고 어려운 형편 가운데 있는 사람보다는 세상적인 급이 높은 사람과 어울리고 싶기도 합니다. 혹은 나보다 더 뛰어난 달란트를 가진 사람을 보면 내가 교회 생활을 이만큼이나 했는데 뭐 좀 한다고 저렇게 나서나 저러면 안되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죄인이다보니 그런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속에서는 불쑥 불쑥 올라옵니다. 그럴 때마다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사명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나의 명예, 나의 지위, 나의 경력 이런 게 우선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 나라의 일부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면 함께 이 나라를 섬길 동역자의 존재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의 영웅인 요나단이 새로운 영웅인 다윗을 경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관계를 맺고 자신의 것을 내어준 것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동역자를 더 소중히 여기게 되고 품을 수 있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함께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 동역자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품을 틈이 없는 것입니다.
2- 자신의 나라를 세우면 사람을 품을 수 없다. (설명) 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자신의 나라를 세우면 사람을 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 나보다 못한 사람도 잘난사람도 품을 수 있습니다. 동역자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아닌 나의 욕망을 위한 나의 나라를 섬기는 사람은 절대 사람을 품을 수 없습니다. 5절에 보시면 다윗이 군대의 장이됩니다. 6절에 보시면 군대의 장이 된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 대해 승리하고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에 대적하는 세력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좋은 일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이것을 두고 노래를 합니다. 그 노래의 내용은 7절에 나옵니다. 바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라는 노래입니다. 이노래를 들은 사울이 이 말을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화가나서 말합니다. “다윗은 만만이고 나는 천천이면 그가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또 뭐가 있겠느냐?” 사울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 자기 나라가 중요합니다. 자신은 천천이라고 하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하니까 자기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나라라 빼앗길까봐 겁도 나고 화도 났습니다. 9절에 보시면 이날부터 사울이 다윗을 주목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날부터 삐뚤어진 마음으로 다윗을 본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7절에서 이스라엘 여인들이 진짜 사울이 다윗보다 못하다고 노래를 했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랬겠습니까? 왕의 이름을 놓고 다른 사람이 더 뛰어나다 잘났다고 하면 무슨 죄가 됩니까? 왕의 대한 반역죄가 될 것입니다. 이런 노래를 사울이 있는 곳에서 온 백성이 다 있는 자리에서 부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이 노래에서 나오는 천천이요 만만이요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통적인 시 형식입니다. 우리가 시편을 보면 평행법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시가 가진 문학적 규칙성, 운율 등을 평행법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36절 11절에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이르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들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이것은 비슷한 것을 나열한 유의적 평행법입니다. 교만한 자와 악인들이 비슷한 말이고 손과 발이 신체를 언급하는 것으로 비슷합니다. 비슷한 내용을 규칙적으로 반복해서 교훈을 더 확실하게 드러냅니다. 119편에 163절에 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라고 말씀하는데 거짓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과 율법을 사랑하는 것이 나옵니다. 이것은 반대되는 것을 나열한 반의적 평행법입니다. 반대를 이야기해서 원래 하고자하는 의도를 더 강화해서 설명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보신 사울이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자는 만만이요 라고 했을 때 이것은 점층적 평행법입니다. 숫자가 가면갈수록 커지면서 교훈을 강화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사울보다 더 낫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사울이라는 인물과 다윗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누가 잘했다 못했다가 아닙니다. 사울과 다윗을 통해 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천천이요 만만이요라는 문구는 실제로 다른 성경에도 쓰입니다. 시편 68편 17절에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라고 나옵니다. 시편 144편 13절에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천이요 만만이요 하는 것은 누가 누구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입에 익어서 자주 부르는 민요입니다. 절대 사울을 업신여기고 다윗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시의 특징입니다. 사울은 이것을 알았겠습니까 몰랐겠습니까? 물론 사울도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시의 양식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사울의 마음속에는 다윗이 나의 왕위를 빼앗을 것이다. 라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이것은 히브리 시 평행법이고 다윗과 사울을 비교하는 것이 절대 아닌데 하나님 나라가 아닌 자기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이게 평행법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인기를 독차지해서 사울의 나라를 빼앗아가는 것으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앞서 나온 요나단과는 참 대조적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세울 동역자를 발견해서 너무나 기쁜데 사울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조차 말도 안되는 핑계 거리로 나쁜 마음을 먹고 다윗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적용)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아닌 나의 나라 나의 욕망의 나라를 구축하려고 하면 주변 사람이 거슬리기 시작합니다. 나 외에 다른 사람이 관심을 받고 칭찬을 받으면 그것을 견디지를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좋으면 사울도 천천을 죽이고 다윗이 만만을 죽이고 가면 갈수록 하나님 나라가 힘있게 뻗어나가는구나 할 수 있는 것을 삐딱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주인공이 아니라 자기 욕망의 나라가 주인공이니까 동역자가 미워보이고 싫어 보이고 그 꼴을 보기가 싫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우선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나의 욕망의 나라입니까?
저는 사역자들 중에서도 찬양인도나 기도회 인도를 잘하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이전에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데 20대 중반의 얼굴도 아주 잘생기고 목소리도 정말 멋지고 찬양인도도 너무 잘하고 기타도 잘 치는 전도사님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찬양인도할 사람이 없어서 제가 찬양인도를 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제가 잘 못하는데도 권사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목소리 좋고 잘생긴 새로운 전도사님이 와 가지고 찬양인도를 하니까 갈대 같은 권사님들의 마음이 새로운 전도사님을 향해 갔습니다. 제가 사람의 인정 때문에 사역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권사님들이 동요하는 것을 보고 약간 기분이 이상해졌습니다. 멋진 전도사님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 때 느꼈습니다. 아, 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역을 하는건데 이때까지 내가 뭔가 다른 것에 빠져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에는 성도님들이 그전도사님 때문에 은혜 받고 저도 그 전도사님 찬양 인도하는 것을 보고 은혜 받으니까 부러움이나 시기심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달란트 뛰어난 전도사님 와서 교회가 은혜 받고 좋으니까 성도님들이 행복해하니까 저도 좋고 제가 설교할 때 전도사님이 멋진 목소리로 받쳐주니까 저도 설교하면서 힘을 얻게 되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그 동안 은근히 내가 인정받는 맛에 빠져있다가 동역자가 와서 사역이 풍성해지는 경험을 하니까 이전보다 이 전도사님이 있어서 너무 좋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의 욕망의 나라를 섬길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섬길 것인가 하는 차이가 아주 큰 차이를 불러온 것입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나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면 우리는 사람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동역자를 얻게 됩니다. 이 원리 안에 더욱 사랑하며 섬기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