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킹덤스토리 해설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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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수요기도회에 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거하기 위해 성막을 건축하신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거하기 위해 성막을 건축하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는 사건 이후에 19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시내산에 도착하는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서 아주 중요한 순간 중에 하나입니다. 이 산에서 율법을 받고, 언약을 맺고, 성막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합니다. 이 장면은 신약의 복음서에 들어가서 여러 장면과 겹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산상수훈을 통해 율법의 참된 의미를 해석하시는 장면은 마치 모세가 율법 받아 온 것과 같고,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드러내는 장면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는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모세가 이 시내산에서 성막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는데, 이것은 나중에 감람산에서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과 의미심장한 대조를 이룹니다. 성전이 무너진다는 예언은 예수님이 새로운 성전이 되신다는 그림자입니다. 완전한 성전이 오기 때문에 돌로만든 성전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구약성경에도 산에서 하나님이 등장하시고 말씀하시는 이야기가 나오고 신약성경도 마찬가지로 산에서 예수님이 등장하셔서 말씀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시내산 사건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사건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해서 나라가 점점 망해가지 않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경고하시는 기준이 바로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내용들과 그 언약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이스라엘을 꾸짖고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시내산 언약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주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들입니다. 이 시내산 언약은 다윗 언약을 거쳐서 새 언약에까지 점점 발전하고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성취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이 시내산 언약의 정신이 어떤 것인지 파악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시내산 언약의 정신이 건물의 형태로 구현된 것이 바로 성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것을 굉장히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임재한다는 증거가 바로 성막입니다.
성막은 텐트입니다. 고대인들은 신전을 지으면 아주 크고 화려하게 짓습니다. 아마 그렇게 하면서 자기 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주고 싶어하고 그렇게 하면 신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성막은 독특합니다. 성막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습니다. 물론 애굽을 막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고 그들 중 가장 뛰어난 기술자가 지은 것은 맞습니다. 그 안에 황금으로 지어진 값비산 것들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이방 신들을 위해 지은 신전만도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심지어 이 성막은 텐트입니다. 텐트에다가 각종 성물을 비치하고 하나님을 모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피라미드나 바벨론의 지구라트 같은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에 계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대근동 사람들은 신들이 자신의 섬김을 받기를 좋아하고 인간은 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커다랗고 화려한 건물을 바쳐다 주는 것보다 그분의 백성 자체를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화려하고 큰 신전이 아니라도 좋으셨습니다. 그분의 백성들이 주로 천막에서 생활했듯이 하나님께서도 성막에서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셨습니다. 성막은 그분의 백성과 함께 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났습니다. 광야의 거친 환경과 천막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성막이 위로입니다. 자신들과 같이 천막에 사시는 하나님,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증명) 성막에 거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신약에서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는데 여기 거하신다는 단어 “스케노오”는 장막을 친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백성 가운데 성막에 거하셔서 그 곳에 임재하시고 함께 하시는 분이었고 신약성경에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육신이 되어 그분의 백성 가운데 장막을 치셨습니다. 장막을 치시고 그분의 백성과 함께 사셨습니다. 오죽하면 그분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울고 웃으며 함께 하셨습니다. 말씀을 나누고 치유하시고 꾸짖기도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참 부족하고 답답했지만 함께 사역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기쁨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적용)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성막을 생각할 때에 우리와 함께 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우리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집이 있으면 행복한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우리 몸이 예수님과 연합하여 성전이 되었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는데, 성전이 된 우리는 아직 부족하고 모자랍니다. 저도 저를 돌아볼 때 나는 얼마나 좋은 성전인가? 성전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드러내고 있는가를 고민합니다. 비록 우리가 별로 좋지 않은 성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함께하리라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을 가장 종하시고 우리와 동거동락하길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이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하나님은 텐트라도 좋으니 황량한 광야라도 좋으니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싶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여기에 얼마나 잘 반응하고 있습니까? 기름진 땅이 아닌 광야라도 하나님과 있는 것이 좋습니까? 튼튼하고 세련된 집이 아니라 텐트라도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습니까? 이런 질문들이 우리 삶 가운데 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질문에 그렇다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2-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최고의 복은 하나님의 임재다.
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최고의 복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지으시고 사람을 지으셨을 때 에덴동산이라는 공간에 임재 하셔서 사람이 그곳에서 복을 받고 행복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계시기에 사람은 가장 복된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교재에도 나와 있지만 성막은 에덴동산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구약성경은 꾸준히 에덴성전과 성막 그리고 성전의 유사성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 킹덤스토리 교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고 있지만 성경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 나라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전을 관점으로 해서 성경을 읽는 방법도 있는데 그 방법을 조금 사용해보려고 합니다.
에덴동산은 최초의 성막 혹은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창세기 2:15에 보시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 경작하다는 말 아바드는 섬기다 예배하다라는 뜻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에덴동산의 관리자인 동시에 에덴동산에 예배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아담이 예배자로 부름 받은 에덴동산은 무엇이겠습니까? 성막입니다. 성막의 입구는 동쪽에 나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도 동쪽으로 나갔습니다. 성막에 성소 안에 있는 등잔대는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를 형상화 한 것입니다.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위에 두 그룹은 에덴동산 입구를 지키는 그룹을 상징합니다. 성막은 에덴동산을 형상화한 건축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주신 것은 에덴동산을 주신 것과 다름없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지으신 최초의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얻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이 다시 에덴동산을 그분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에덴동산을 주셨습니까?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어떤 것이 필요합니까? 맛있는 과일이나 아름다운 풍경이 필요합니까? 그게 아닙니다. 에덴동산에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이 사람에게 가장 복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기에게 반드시 엄마가 필요하고 아기의 가장 큰 복음 엄마인 것처럼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가장 큰 복이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필요합니다. 창세기 4장 16절부터 보시면 사람들이 그 나름의 문명을 발전시킵니다. 하나님 없는 문화를 발전시킵니다. 에녹이라는 사람이 성을 쌓고, 야발이라는 사람이 목축업을 발전시킵니다. 유발이라는 사람이 음악을 발전시킵니다. 두발가인이라는 사람이 금속 기술을 발전시킵니다. 나중에 창세기 11장에 들어서는 아주 거대한 성과 탑을 쌓기에까지 이릅니다. 이렇게 문명이 발전했는데 사람들이 행복했습니까? 라멕이라는 잔인한 통치자가 들어섰고 네피림의 시대에 영웅들이 활보할수록 많은 이들이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문명은 발전했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없었기 때문에 참된 행복은 그들 가운데 없었습니다. 문명이 발전하고 기술이 좋아지고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아지면 행복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들이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금은보화를 비 오듯이 내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굉장한 기술을 알려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매력적인 문화를 창달하도록 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참되게 행복할 수 있도록 에덴동산을 주셨습니다. 정확하게는 에덴동산을 형상화한 성막을 주셨고 성막을 통해 임재하셨습니다. 이 임재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가장 큰 복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세상은 결국 복이 없는 세상입니다. 악해지고 불행한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주셨습니다. 가장 큰 복을 주셨습니다. 이 복을 누리는 방법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에 임재에 대해 감사와 예배로 반응하며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만이 할 수 있습니다. 임재라는 복을 누리는 이 교제는 인간 존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구하지만 실은 하나님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복입니다. 십자가에서서 그리스도를 내어주시고 성령을 기름 붓듯이 부어주신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삼위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가 예배를 통해 삼위 하나님과 교제 하도록 하신 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복인 줄로 믿습니다. 이 복에는 세상적인 풍요는 없을지 모릅니다. 이 복에는 쾌락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는 풍요와 쾌락은 복이 아닙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발전시킨 문명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바벨탑을 쌓은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 없는 풍요와 쾌락은 심판으로 결론 납니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복으로 내어주실 때 그 복을 예배로 누리며 나아갑니다.
(적용)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에덴동산을 주시고 그곳에 임재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사건입니다. 지금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를 주시고 성령으로 교회에 임재하십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예배할 때 우리는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을 누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고 어떻게 살아야 죄를 극복하며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 나가며 살 것인지 깨닫고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은혜를 공급받으며 매주 마다 날마다 우리의 인생이 새로워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보통은 몇 주 예배드린다고 이 복이 체감적으로 확 다가오진 않지만 이 예배드리는 세월이 몇 년이 되고 몇 십년이 되면 예배를 드렸던 그 삶이 어떤 쾌락적인 삶보다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면 살 수 없습니다. 공허하고 허무한 삶을 살게 되거나 쾌락이 찌들어 가치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임재라는 방법으로 삼위 하나님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십니다. 이 사건은 교회안에서 일어납니다.
3- 왕이신 하나님의 풍성한 영광이 백성 가운데 나타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교훈은 왕이신 하나님의 풍성한 영광이 백성 가운데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임재하시는 분입니다. 그 임재에 우리가 반응할 때 그것이 우리의 복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만족을 주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그분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세상 그 어떤 권력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가지고 계신 왕이십니다. 영광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영광이라는 말을 하지만 참된 영광을 가지고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영광이란 개념을 설명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하나님만이 이것을 가지고 있고 나머지 영광스러운 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할 뿐이기 때문에 영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광은 하나님 그 자체로 보이기도 합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며 다른 어떤 것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감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영광이라는 단어 카보드는 그 어원이 무겁다라는 동사에서 기원됩니다. 영광은 하나님이 지니신 무거움입니다.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영광이라는 단어는 아주 눈부시게 밝게 빛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가지 말들로 영광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영광을 드러내는 분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불이나 구름이나 천둥소리 같은 자연물을 통해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물을 가져와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막 위에 구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과의 교제를 위해서 성막을 주셨지만 이것을 함부로 할 순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40장 35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이 성막에 모세조차도 들어갈 수 없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 성막이 너무나 영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신적인 어떤 것으로 충만한 그곳에 죄인인 인간이 감히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왕 성막을 주셨으면 아무나 거기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했으면 좋겠는데 이 영광 때문에 쉽게 들어가지 못하니 불편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가운데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이신 분이 계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나 들락날락할 수 있는 성막이라면 하나님께 권위가 있는가 그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권위가 있는가 하고 의심을 했을 것입니다.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고 쉽게 범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전에 하나님의 권위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권위가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하게 됩니다. 이 순종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좌우로 치우지치 않고 올바른 믿음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이 영광이 없으면 성막은 그냥 떠들고 노는 시장통이 됩니다. 성막에 하나님의 권위가 부여되고 질서가 부여되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참되게 교제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증명) 한 때 프레디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프랜드와 대디의 합성어로서 친구 같은 아빠를 칭하는 단어를 말합니다. 예전에 아빠 어디가 라는 예능프로에서 유명 가수와 그 아들이 어울리는 모습이 화제가 되면서 친구 같은 아빠가 가장 좋은 아빠 상인것처럼 대두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육아를 하는 예능 프로들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하면서 부모가 친구처럼 되어야 하는 기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이것을 심히 걱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모는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이 권위는 자녀들을 누르기 위한 권위가 아닙니다. 권위는 권력이 아닙니다. 정품인증서 같은 것입니다. 학자의 논문이 학계에서 인정 받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로서의 합당한 권위가 있기 때문에 자녀를 올바르게 양육할 수 있습니다. 스승으로서 합당한 권위가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마땅히 배워야 할 것들을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권위를 권력이나 폭력으로 잘 못이해를 하는 시대가 되어서 학교에서 선생님이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민원을 넣어버립니다. 교사들이 민원에 무너지는데, 무슨 권위가 생기겠습니다. 권위가 없는데 어떻게 자녀양육이 학생교육이 잘 되겠습니까? 권위를 없애면 당장은 재밌고 다정해 보이고 좋아 보이겠지만 그게 몇 년 반복되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립니다. 결국 자녀를 망치고 학생을 망치는 길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풍성히 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제하시는 분이지만 광야에서 우리와 함께 천막치고 사시는 분이지만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분입니다. 우리가 가볍게 여길 분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이 멈추면 성막이 이동하다가 멈춥니다.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친밀한 한 편,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복된 길로 인도 받게 됩니다.
(적용) 이 성막에 비췄던 하나님의 영광은 현재 교회에 비추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납니다. 교회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권위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고 서는 것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지 않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합니다. 당회의 치리에 복종하며 직분자의 지도에 따라 살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는 그 권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권위를 가정으로 파생합니다. 사회로 파생합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도록 합니다. 사회에서 공직자들의 안내에 따르도록 하고 위정자들의 정책에 순종하고 위정자를 위해 기도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모든 것이 질서를 찾고 그 질서 안에서 참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지금도 교회에 충만하여 교회를 위해 일하고 복음과 세상을 위해 역사합니다. 우리가 이 영광을 반사하고 비출 때 이 영광을 쫓아 많은 이들이 복음으로 돌아오고 교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분 자신을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임재하셔서 복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영광을 드러내는 분입니다. 남은 한주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복된 나날들을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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