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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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views1. 무엇이 나를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했느가 2. 나의 마음을 꿰뚫었던 말씀은 무엇인가 3.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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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성령강림 사건 이후 베드로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에 대해 전했던 이야기입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을 묵상하며 준비 할 때 제 마음 속에 자리 잡는 질문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무엇이 나를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하였는가?”
“나의 마음을 꿰뚫었던 말씀은 무엇인가?”하는 이 질문이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기에 앉아계신 그리고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고 계시는 분들에게도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한 무엇인가”가 그리고 “지금 이 자리까지 오도록 나의 삶을 꿰뚫었던 말씀”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함께 말씀을 나누는 이 시간 스스로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져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말씀을 통해 찾아가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무엇이 당신을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하였는가?
무엇이 당신을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하였는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해할 수 없는 성령강림을 체험한 베드로와 사람들이 다락방을 내려와 집 밖으로 나갑니다. 집 밖에 나온 사람들이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하자, 마을에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손가락질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에는 세시라고 기록이 되어있는데, 지금 시간으로는 오전 9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다락방에 모여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취해서 내려왔다고 오해하며 그들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 서서 우리는 취한 것이 아니며, 이 것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강림의 결과이다! 라고 확신하며 말씀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베드로의 변화입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죠?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것보다 도망치는 것이 좀 더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앞에서 나는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 도망가지 않겠다! 라고 해놓고, 여종이 질문하자 세 번 부인하고 도망갔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을 견디지 못해 맨날 도망만 치던 프로도망러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금 예수를 여전히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고, 신성모독자라 생각하며 그를 죽인 것을 잘한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술 취한 것 아니냐며 제정신이 아니라고 조롱하며 살의를 보이는 사람들 앞에 베드로가 섰습니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며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절대 상상할 수 없었던, 베드로에게 절대 기대할 수 없었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도망자였던 그가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당당히 죄를 지적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얼마나 모여있었는지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그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고 돌아온자가 3천명이었다하니, 최소 3천명은 그 곳에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힘 없는 한 여종의 질문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쳤던 그가 이제는 모두 앞에 서서 예수님을 전할 뿐만 아니라 죄를 당당히 지적합니다. 베드로에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죠.
“무엇이 베드로를 지금 그 자리에 서게 만들었을까요?”
“무엇이 베드로에게 담대함을 주었고, 사람들 앞에 서서 목소리 높여 외칠 수 있도록 한 것일까요?”
먼저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다락방에서 나온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은 절대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그들이 모였던 시기는 오순절입니다.
오순절 축제 기간에 새 술에 취하는 것은 문화적, 종교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그 때 새 술에 취해 돌아다니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은 비난하며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여겼습니다.
또한 양심적인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고기를 먹을 때만 마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침에는 빵을 먹었고 고기는 저녁에만 먹었습니다. 즉 포도주는 저녁에만 먹었다는 것이죠.
만약 사람들의 지적처럼 다락방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아침 9시에 포도주를 먹고 취했다면 그들은 오순절의 법을 어기는 것과 동시에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것이라 강하게 말합니다.
다락방에서 나온 이들이 말했던 그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을 듣고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지난 주 임호삼 목사님께서 말씀을 나누어 주셨던 것처럼 그들은 바로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살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방언을 듣고 “자신이 살고 있는 외국에서 사용하는 언어”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증언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납니다. 아마 그들은 이러한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다른 언어를 공부한 적도 없고, 외국에 온 적도 없을텐데
어떻게 저렇게 유창하게 외국어를 할 수 있는 것이지?”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시나요?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 했을 뿐인데, 성령을 받았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나라의 언어를 말하고 있는 것이 믿어지시나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아니 하나님은 왜 이러한 기적을 보여주셨을까요.
다른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다
성령을 받은 후 다른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정말 굉장히 중요하고도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언어는 하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다양한 언어가 생기도록 한 사건이 인류의 역사에 등장합니다.
바로 창세기 11장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세상에 무수히 많은 언어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죠? 맞습니다. 바벨탑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흩어져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셨는데, 사람들이 그것에 전면 반박하고 나서 우리가 함께 모여 살 때 위대하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늘 끝까지 탑을 쌓아 하나님의 자리까지 오르려고 했던 바벨탑 사건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흩어버리셨죠.
그 결과 바벨탑을 더 이상 쌓을 수 없게 되었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언어가 생겨나게 된 것은 인간의 탐욕과 교만 그리고 죄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은 후 다른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는 “하나됨의 회복의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흩어졌던 사람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진 우리 모두가 이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모이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죄의 권세 아래에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닌, 하나님이 책임지는 인생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함께 한 가족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고, 사는 곳과 언어와 인종과 모든 것이 달라도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신 하나님을 각자의 자리에서 높이게 될 것이다.
한 분이신 성령님을 통해 모두가 한 가족이 될 것이다!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다양한 방언으로 말을 하게 된 이 상황”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각자 다른 삶의 자리에서 살아갑니다. 같은 한국 땅 그리고 인천에 있지만 우리에게 허락한 자리는 개인마다 다 다릅니다. 그렇게 다르게 살아가던 우리가 어떻게 인천제2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모여 한분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찬양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모두는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모이게 된 한 가족”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작년까지 부산에 있었습니다. 다른 지방에 있던 제가 이 교회에 와서 적응하며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 작년까지 저와 여러분은 서로를 알지 못했으나, 우리 안에 계시는 한분이신 그 성령님 안에서 끊임없는 영적인 교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말씀을 나눌 때 종종 제가 인도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만큼 인도에서의 1년이 저에게 있어 참 많은 성장과 경험을 해주게 해주었는데요. 저는 인도에서 이러한 성령의 교통하심. 성령 안에 하나되는 사건을 다양하게 경험했었습니다.
제가 다녔던 학교는 굉장히 큰 학교였습니다. 남인도의 수도라 불리우는 첸나이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큰 대학교 였습니다. 도원동 숭의동을 합친 정도의 크기의 캠퍼스였습니다. 학교 안에 마을도 있었고 종합병원도 있을 정도로 큰 곳이었습니다.
9살 때부터 선교의 꿈을 갖고 있었던 저에게 있어 인도는 정말 매력적인 나라였습니다. 다양한 종교와 또 지역마다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갖고 있었기에 많은 기대를 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아무 것도 몰랐을 때는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적응을 하면 할수록 제 마음이 걍팍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제사들, 시야를 가로 막는 수많은 향들 그리고 눈을 돌리면 보이는 수많은 우상들은 저를 위축시켰습니다. 그렇게 힘겹게 하루 하루를 버티던 중 답답해서 캠퍼스를 돌아다니다 익숙한 멜로디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멜로디를 따라가니 기도실이 있었습니다. 1층 드림 성전만한 크기의 기도실이었는데 그 중간에 합판과 같은 것을 세워두고 한쪽은 이슬람이 한쪽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도모임을 알게 된 후부터 저는 많은 변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글로만 알았던 성경의 내용들을 경험하게 되었고, 성령님이 정말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요.
어느 날 기도 모임을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나이지리아, 코트디부아르 등 아프리카 친구들과 인도 친구들 그리고 부탄 친구 1명. 한국인 저 한명 이렇게 있었습니다. 그날은 아프리카에서 온 친구가 기도 모임을 인도하던 날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영어로 기도 제목을 나누던 그 친구가 갑자기 울먹거리면서 자신의 부족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아프리카 친구들 외에는 그 말을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울먹거림이 너무 마음에 걸려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친구가 나누는 기도제목이 무엇인지 난 이해하지 못하지만, 함께 기도하고 싶어요. 하나님. 기도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렇게 기도회가 끝이 나고, 교제를 하던 시간에 저는 인도친구들에게 아까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인도친구들도 저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 했는데, 자신들이 생각하지 못한 기도제목으로 기도를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 기도제목은 제가 기도했던 것과 동일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친구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저희에게 ‘우리 부족어를 어떻게 아느냐?’ 되물었습니다.
이 때 저의 머릿속을 치고 갔던 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매주 하는 사도신경의 고백.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우리 안에 계시는 한 성령님으로 인해 모든 성도는 교통. 서로 통하며 하나가 된다는 이 고백이 문자가 아닌 삶으로 믿어지게 되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일까요? 아닙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셨던 성령님으로 인해 ‘하나님 안에 우리 모두는 하나될 것이다!’라 선포 되었던 그 메시지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종도 문화도 언어도 살아왔던 모든 방식이 달랐던 아프리카, 인도, 부탄 그리고 한국인이 한 분이신 하나님 앞에 모여 기도할 때 우리 안에 계시는 한 분이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하나로 모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듣고 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은 과거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한 저와 여러분의 그 심령에도 성령님은 임하셨고 이미 계십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이렇게 한 공동체로 모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로를 위해 중보하고 기도하며 섬겨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하였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지금 이 예배의 자리에 설 수 있게 했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한 공동체로 모일 수 있게 했을까요?”
저는 우리 안에 계시는 그 한 분이신 성령님으로 인함이라 확신합니다.
과거에 마가의 다락방에 한번 임하시고 끝나셨던 성령님이 아니라, 2천년 이상 흘러온 모든 역사 속에 늘 함께 하셨던 그 성령님께서 지금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계십니다.
우리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 앞에 한 가족이 될 수 있도록, 예배를 드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쉬지 않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계십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지금 이 예배의 자리에. 삶의 그 자리에 세우셨습니까?” 라는 이 질문에,
“나를 구원해주시고, 나를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성령님입니다.”라는 고백이 있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베드로의 설교
베드로의 설교
베드로는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짜릿함 혹은 상처를 주었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언급합니다. 겁쟁이었던 베드로가 성령님을 의지해서 사람들에게 이전에는 감히 할 수 없었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지 50일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때의 일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23절 하반절입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법 없다’라는 말의 의미는 율법이 없다. 언약 바깥에 있다는 뜻입니다. 좀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율법과 언약 바깥에 있는 이교도. 이방인들. 너희가 말하는 절대 구원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그 사람들의 손을 빌려 예수를 못박아 죽였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지금 베드로의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성모독자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죽인지 50일밖에 되지 않았고, 여전히 그 죽음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 신성모독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더니 갑자기 겁쟁이 베드로가 앞에 서서 자신들을 향해 “너희는 메시야를 십자가에 달려 죽인 범죄자들이다.”라고 말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은 부활하셨음을 25-28절. 다윗의 시편 16편을 인용하여 말을 이어나갑니다. 이 말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메시아는 부활하신다 예언되어있다.
둘째, 누가 부활했는가?
셋째,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
고로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음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언해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며 나와 함께 하는 자들이다!
사실 십자가는 제자들의 꿈과 인생을 박살낸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표현할 수 없는, 벗어날 수 없는 무기력함과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무기력함과 우울함에 빠져 있던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 분의 부활은, 절망의 상실감을 끝내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희망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모여 기도할 수 있게, 다시 예수님을 붙잡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던 소망이었습니다.
부활은 단순한 단어가 아닌, 우리가 절대 이루어 낼 수 없는 문자적인 표현이 아닌 사실이며, 우리가 살아갈 이유가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삶으로 경험한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지금 사람들 앞에 서서 자신의 믿음의 확신을 강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만났습니다.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잡수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같이 식사도 했습니다. 몸도 만졌고 한달간 같이 있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부활의 증거가 있을까요?
여러분은 언제 부활의 확신을 갖게 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 여러분의 살아갈 소망과 이유가 되셨습니까?
그 부활신앙이 언제 여러분의 것이 되셨습니까?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정말 믿으십니까? 성령을 받았다. 라는 것은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을 내가 믿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 그 사람은 부활 신앙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인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조금 더 하려 합니다. 성령님의 교통하심을 경험했던 그 기도실에서 있었던 또 하나의 사건입니다.
아까 제가 드림 성전 크기 만한 곳에서 반을 나누어서 이슬람과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때 다양한 악기들을 연주하며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 찬양하죠. 그것처럼 그 곳에서도 각자 악기들을 가져와서 연습하고 찬양하며 기도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에 비해 이슬람 친구들을 굉장히 조용하게 기도를 하더라구요.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조용히 자신의 신을 향해 명상하며 기도를 하고 있던 한 친구가 그 날따라 기도에 집중이 안되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 시끄럽다고 조용히 좀 하라고 화를 내기 위해 이슬람 기도실 문을 열고 나와 저희가 기도하고 있는 기도실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믿는 그 신은 자신들에게 어떠한 말도 해주지 않았고 또 함께 기도하더라도 나 혼자 하는 것이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모임은 좀 달랐거든요. 듣도 보도 못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며 그 친구가 충격을 받은 것이죠.
함께 부둥켜 안고 기도하고 또 서로의 손을 잡고 울며 기도해주는 그 모습을 보며 이 친구가 깊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희는 그 친구가 들어 온 것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기도회가 끝이 나고 문 앞에 주저 앉아 울고 있던 그 친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울던 그 친구는 저희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너희들이 믿는 신이 너무 궁금하다. 나의 신은 나에게 어떠한 따스함도 주지 않았는데, 너희가 믿는 신은 누구이기에 이러한 따스함을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도 너희가 믿는 신을 믿고 싶다.”
한참을 예수님에 대해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를 위해 한참을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그 친구는 저희에게 기도 부탁을 하며 “나는 이제 내가 믿던 신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다. 집에 돌아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것인데,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
이 친구는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된 그 날 집에 가서 자신의 개종 소식을 알리는 것은 명예 살인이라는 제도 아래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정말 큰 사건이거든요.
그리고 그 날 이후로 그 친구는 기도실에서 만날 수 없었어요.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는 그 친구가 자신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믿음의 선포를 했을 것이라 생각해요.
이러한 믿음의 선포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더 중요한 것이 지금 이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제2가족들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잘 되지 않지만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습. 쉽지 않지만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려 하는 그 모든 모습들이 바로 성령을 소유한 자. 부활신앙을 소유한 자들만 보이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그리고 다락방에서 성령강림 체험을 먼저 한 120명의 사람들처럼 저와 여러분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삶을 분명히 살아내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꿰뚫었던 말씀은 무엇인가?
당신의 마음을 꿰뚫었던 말씀은 무엇인가?
확실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전하는 메시지에는 분명한 힘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그 메시지를 듣던 사람들이 마음에 불편함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 불편함은 예수님을 죽인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찔리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드로는 다른 말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돌이키는 방법은 딱 하나.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받으라.
베드로의 말은 단순했지만, 이것을 받아 드리는 사람들에 입장에서는 정말 부담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찔리고 변화가 되었지만, 그들을 제외한 세상의 분위기는 여전히 예수님을 죽인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거든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여전히 적대시하는 분위기 속에,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나의 믿음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음에 찔리지만 눈 한번 감고 외면하면, 예수를 믿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처럼 그렇게 사람들 속에서 사회 생활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찔리는데로 행동하여 세례를 받아 모두에게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는 것을 알리면, 사회에서 외면 당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또한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유대인 사회의 중심지였던 회당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눈 한번 딱 감으면 지금처럼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편하게 사는 삶을 선택하지 않기로 합니다. 아무 것도 준비되어있지 않는 현실과 어려움이 예견된 미래의 삶이지만 그 삶을 기꺼이 살아내기로 결단하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자신들의 믿음을 모두 앞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그 숫자가 무려 3천명이나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역할입니다. 십자가는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힘들게 만듭니다. 찔리게 만듭니다. 나의 죄를 생각나게 하고 죄로 인해 아파하게 만듭니다.
37절 상반절을 보면 “마음에 찔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찔리다”는 “죄책감”을 말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나의 굳어진 마음을 찌르고 구멍을 냅니다. 죄로 인해 단단하게 굳어진 마음에 구멍을 내기 위해선 큰 압력이 필요합니다. 큰 압력이 가해지면 격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정말 아픈 고통이지만 그것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을 피부로 느끼고, 그 분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꿰뚫었던 말씀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꿰뚫었던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떤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까?”
“어떤 말씀이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도록 해주었나요.”
저에게도 그러한 말씀이 한 구절 있습니다. 저에게 선교사라는 비전을 갖게 해주고, 그 꿈을 향해 지금까지 달려오도록 해준 한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9-31절에 등장하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논산이라는 지방에 살았었습니다. 지금도 논산은 작은 소도시인데요. 제가 어렸을 때에는 논산군이었을만큼 정말 작은 시골마을이었습니다. 작은 시골이었기에 문화생활을 즐기기도 쉽지 않은 곳이었는데요. 제가 8-9살 때 문화회관에 한 선교단체가 와서 인형극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기 쉽지 않았던 당시였기에 논산과 연무대에 있는 교회들이 연합하여 모여, 큰 문화회관에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인형극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효과들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죠. 듣기만 했던 성경의 이야기들이 인형극으로, 제가 느끼기에 굉장히 사실적으로 느껴졌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끝내 굶어 죽었던 거지 나사로. 그리고 풍족하게 누리다 죽은 부자. 뜨거운 지옥 불에서 고통을 받는 그 부자의 모습과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거지 나사로에 대한 인형극이 끝이 날 때쯤, 선교사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정확한 문장은 생각나지 않지만 이러한 내용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예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사람이 참 많이 있습니다. 지옥에서 괴로워하던 부자를 보면서 무엇을 느꼈나요? 어쩌면 나와 가장 친한 친구 혹은 엄마 아빠가 죽어서 지옥에 가고 나만 천국에 갈 수 있어요.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야 해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전해서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해야 해요.”
“다 눈을 감아보세요. 혹시 선교사가 되어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어린이가 있다면 한 번 손을 들어볼래요?”
8-9살이었던 꼬마 휘석이는 그 때 손을 들었어요. 그리고 그 말씀을 저의 비전으로 삼고 기도하며 지금까지 걸어왔어요.
단 한번도 바뀌지 않았던 저의 꿈은 선교사입니다. 정말 어린 나이었지만, 그 마음을 꿰뚫고 평생의 꿈을 심어준 말씀이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분명 삶을 살아내게 해주는 그리고 하나님과 더 가깝게 만들어주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줬던 말씀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이 여전히 여러분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고 찔러 구멍을 내고, 구멍이 난 그 곳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을 만나고 계십니까?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끊없는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생각하고 넘어가는 마음의 변화가 아니라. 한번 경험하고 사라지는 그러한 과거의 변화가 아니라. 지금도 앞으로도 나의 삶을 하나님 앞으로 끌고 가는 매일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면의 변화 그리고 그것이 드러나는 삶의 변화가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합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하였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꿰뚫었던 말씀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이 두 질문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까지 오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고,
나의 마음에 끊임없이 일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도 은혜였고,
나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