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
Notes
Transcript
본문 : 마태복음 3:1-12
본문 : 마태복음 3:1-12
중심 명제 :
1. 세례 요한은 어떤 인물인가?
1. 세례 요한은 어떤 인물인가?
세례 요한 이라는 이름의 뜻은 “ 여호와는 은혜가 깊으시다 ”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며, 마지막 나실인 이었던 제사장 사가랴 와 아론 가문의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모친 과 부친 모두 주의 계명을 흠없이 지켰던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이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천사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나타나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는데, 이때 요한 이라는 이름이 계시되면서, 나실인으로 살것과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주의 길을 예비할것이라고 천사를 통해 나타났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세례 요한의 외형적인 모습은 어떨까?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다. 그의 식물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그 누가 광야에서 살며, 낙타 털 옷을 입고, 가죽띠를 매고, 메뚜기와 들꿀로 배울 채울까? 흡사 도시의 문맹과 과학으로부터 모든것을 차단하고, 모든것을 자연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자연인과같은 모습으로 생각할수 있지만, 세례요한이 머물렀던 곳은 광야였다.
광야라는 단어의 의미는 “ 넓고 거친 들판, 인적없는 황무지, 불모지(식물이 자라지 못하는 거칠고 메마른 땅), 또는 농사짓기에 부적합한 크고 넓은 대지, 인적없는 쓸쓸한 곳, 짐승이 부르짖는 크고 두려운곳, 약탈자가 출몰하는 위험한 곳을 말한다.
그리고 낙타 털 옷을 입고, 가죽띠를 입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 낙타털 옷 ”이라는것은 털을 가공하지 않은 채 거칠고 뻣뻣한 상태의 낙타 가죽을 옷 또는 거칠고 짧은 낙타의 털로 짠 투박한 야생적인 의상을 뜻한다. 이런 옷들은 봄철에는 털이 쉽게 빠지는데, 이런 낙타털 옷 종류들은 보통 가죽 허리띠로 옷 매무새를 마무리 짓게 된다.
이런 투박하고, 야생적인 옷은 세례 요한을 통해 알수 있듯이, 광야에서 활동하던 선지자들이 즐겨 입었던 옷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낙타 털옷은 세속적인 사치나 향락과는 대조되는 복장이며, 동시에 선지자로서의 절제와 검소한 삶을 보여주기도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선지자 엘리야가 털이 많은 사람이라고 불린것 역시, 아마도 이런 낙타 털옷을 입고 사역을 했기 때문이라고보는 견해도 있다.
그 다음으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지낼때, 메뚜기 와 석청을 먹으며 생활했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현 시대에서 본다면, 메뚜기 와 석청이 웰빈 음식으로 건강한 식단으로 영양가가 풍부해서 더 비싸지만, 세례 요한이 살던 시대에는 일반 사람들은 그 누구 하나 관심 같지 않던 음식들이었다. 메뚜기는 상당히 많은 양을 한꺼번에 구할수 있는데다가, 동물성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해서 높은 칼로리를 얻을수 있어서, 성경 시대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으로는 안성 맞춤이었다.
사람들은 메뚜기를 잡아서 때로는 날것으로 먹기도하고, 불에 굽거나, 삶아서 먹고, 끓여서 먹기도 했다. 그리고 메뚜기를 건조시켜서, 또는 꿀을 묻혀서 먹거나, 소금에 절여서 마치 새우를 요리하듯 먹기도 했다. 그리고 건조시킨 메뚜기를 절구에 찧거나 갈아서, 가루를 만든 후에 다른 음식을 만드는 조미료나 보조식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석청은 야생의 꿀, 즉 들판에서 채위한 꿀을 말한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이렇게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며, 경건 생활에 힘썼다.
요즘 광야 교회라는 말이 많이 돌아다닌다. 요즘 시대에서 말하는 광야 교회는 “ 광야문 집회를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 광야 교인 ” 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짜 광야 교회의 의미" 는 세상과 단절된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심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모임을 가리키는 신약적인 표현 방법이다.” 이처럼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거룩함으로 나아오는자들의 땅이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었다. 즉, 광야 교인은 세상의 풍유함을 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오는 영적인 은혜를 갈급함으로, 나아오는 자들이라는것이다. 이것은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교회들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것이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대단히 검소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편안한 생활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까지 빈들에서 경건하고, 청빈한 나실인으로서 살았다. 요한은 로마의 디베료 가이사 통치 제 15년경에 요단 강 부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 사역을 시작했는데, 철저히 자기를 낮춘 채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메시야 예수를 영접할수 있도록, 예비시키는 선구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비록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기는 했지만, 자신은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며,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야로서 반드시 흥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오히려 자신으 메시아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로인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별명을 지니게되었고, 예수님으로부터는 선지자보다 더 나은자이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라는 칭찬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붕왕이었던 헤롯 안디바가 자기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는것을 꾸짖은 일로 옥에 갇혔다가, 참혹한 목 베임을 당하게 되었고, 사도행전 18장 25절과 19장 1-3절에 그의 사후에 그를 좇던 제자들 중 일부가 요한의 세례를 계속 전파했고, 그 가르침이 소아시아에까지 전파된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 마태는 신약 시대에 세례 요한이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시는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소명을 받았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은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올것이라고 예언했는데(사도행전 1:22, 10:37), 이제 신약 시대에 이르러 세례 요한을 통해서 그 예언이 실행되었다. (마태복음 11:14, 마가복음 9:12-13)
세례 요한은 그는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자 라는 사명을 가졌다는
을 알고, 극도의 자기 절제를 통해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수행했었다.
2. 세례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2. 세례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 이였다. 회개라는것은 “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것을 뜻한다.” 천국이라는 단어를 저자 마태가 사용한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기를 꺼러했기때문에, 마태는 유대인 독자들을 고려해서 “ 하나님의 나라 ” 라는 단어 대신에, 천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천국은 예수님의 임재로 인해, 이땅에 하나님의 의로운 주권과 통치 그리고 심판 과 구원이 실현되는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의 시대를 의미하는것이다.
그리고 가까이 왔다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이미 가까이 도착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원어 헬라어 완료시제에서는 이 표현을 “ 이미 시작되고 있는 일이나, 어떤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일의 상태를 말할때 사용되는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회개 촉구 메시지는 굉장히 긴박하며, 급히 결정해야할 시간이 이미 도래해 버렸다라는것을 이야기하는것이다.
그래서 그의 메시지는 아주 예리한 양날의 검과같이 이스라엘의 마음을 찌르고, 회개하도록 이끄는 아주 강렬한 메시지였다.
이 메시지를 듣고 메시아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메시아가 곧 오시면, 구원 받기 힘들것으로 여기던 이들이었다.
그 당시 광야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신앙을 지키던 에세네파 사람들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사회를 만들어서,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접근도 하지 못하게 엄격했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외침은 에세네파의 규율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파격적인 메시지였던것이었다.
“ 누구나 오라, 와서 회개하고, 참된 이스라엘 백성이 되라 "는 그의 외침은 메시아를 갈망하지만,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에게 아주 획기적인 뉴스였던것이었다. 특히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죄인 취급하던, 군인이나, 세리, 창기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하나님께로 가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사람들에게 거절받던 소외 계층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들은 예수님께 바로 마음을 열었다.
이로인해, 예루살렘과 유대 지경 요단강 주변의 많은 이들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찾아왔다. 이들 모두 스스로를 죄인 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자칭 의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세례를 받으러 왔다가, 세례 요한에게 독사의 자식이라며, 신랄한 비판을 듣게 된다.
즉,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 곧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기에, 회개하라고 선포했고,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로 초청하고, 그들로 하여금 다가오는 시련을 준비하도록 했으며, 회개의 세례를 통해 무감각했던 이스라엘의 마음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메시지에 반응하도록 길을 만드는 작업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었던 곳은, 성경에 베다니 라는 지역이다. 이곳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를 넘어가기 전에 있는 곳으로,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나사로의 동네)와는 다른곳이다. 이처럼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베다니 지역의 뜻은 가난한 자의 집, 즉 빈민촌이다.
그런데 이곳은 예루살렘에서도 접근하기 쉽고, 특히 갈릴리 사람들이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가려면, 반드시 거치는 장소이다. 요한의 회개하도록하는 세례를 베푼이후에, 사람들의 마음이 열려 예수님의 천국 복음을 쉽게 받아들일수 있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사람이었고, 그가 평탄하게 한 곳만이 왕이신 예수님이 가신 길이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자, 세례 요한은 살렘 가까운 애논으로 갔다. 그곳은 사마리아 지경이 가깝고, 수가성 사람도 나올수 있는곳이다. 예수님도 사마리아에 가서 사역하셨다.
3. 세례 요한의 물 세례와 예수님의 불 성령 세례
의 의미는?
3. 세례 요한의 물 세례와 예수님의 불 성령 세례
의 의미는?
성경에서 말하는 물 세례와 예수님의 불 세례 또는 성령 세례는 무엇이 다른것일까?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요단강은, 과거 여호수아가 이끄는 가나안으로 입성한 길목이다.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할례를 통해 정결 예식을 가진것처럼, 세례 요한은 천국이 열리기전에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세례를 줌으로써 성결 예식을 가진것이었다.
물 세례의 사전적인 의미로는 “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을 물에 담그거나, 머리에 물을 뿌리는 예식을 뜻한다. 이 예식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상징한다. 따라서 물 세례는 이것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나, 증거가 되는것은 아니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스스로 신앙을 결단하고, 근신하며 살것을 다짐하는 상징적인 측면이 강하다.
마치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외적 증표이지만, 그것이 구원을 보증하지는 않는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조금 복잡하고, 어렵지만, 기독교 세례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할례의 개념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할례는 남자 성기의 끝 부분을 덮어싸고 있는 살 가죽을 제거하는 종교 의식이지만, 우리에게는 포경 수술이라는 개념이 더 쉽게 다가올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라는것을 몸에 표시하기 위해 할례를 행했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모든 사내 아이는 출생 후 8일째 할례 의식을 행해야 했다. 할례는 모세 때에 율법으로 공식 제정 되면서, “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된 백성으로서, 오직 하나님께 복종하며, 하나님만 경배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할례는 “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요, 하나님의 소유 된자 임을 드러내는 자랑스런 외적 표시 즉, 선민 신앙이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할례 받지 아니한 자 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은 버려진 민족, 상종 못한 존재라는 심한 욕이며, 대상을 경멸하는 저주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베푸시는 불 세례 또는 성령 세례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 세례나 불 세례는 “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내적 연합을 강조하는 실질적인 세례이다.”
불은 정화와 정결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불 세례 또는 성령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회개하는 순간 이루어진다. 이것을 가리켜 중생 = 다시 태어남 이라고 말한다. 결국 중생한 성도는 성령 세례를 체험한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성령 세례를 받은 증거로 방언 과 통변, 신유 능력같은 외적 은사나 표적들을 요구하는것은 건전한 신앙으로 볼기 어렵다.
성령 세례는 구원 받은 모든 성도에게 필수적인 요소로서 단회적이다. 다시 말하면, 일생에 한번의 기회만 주어진다는것이다. 물 세례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외적 선포라면, 성령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하는 신비로운 연합에 실제로 참여하는것이다. 하지만, 성령 충만을 위해서는 영적 진보를 이루어 나가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