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07 시험 받으신 예수님
최초의 인간 아담이 사탄의 시험을 받았고(창 3:1–6), 예수께서도 공생애 전 40일간의 금식 기도 직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마 4:3). 예수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옵고”라는 기도를 가르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마 6:13).
신자에게 시험이 온다면 먼저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련인지, 사탄에게서 오는 유혹인지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련이라면 이를 믿음으로 인내해야 할 것이고(고전 10:13; 히 12:6; 약 1:3), 사탄이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능히 물리쳐 승리해야 한다(마 4:1–11).
•시험을 당하는 이유 – 인생은 세상을 사는 동안 수많은 시험(유혹)에 직면한다. 그렇다면 시험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①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육체의 소욕을 따르기 때문에(갈 5:17). ②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요일 2:15–17). ③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기 때문에(약 1:13–15). ④ 악하고 잘못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계 2:20). ⑤ 세상 지위와 권세에 대한 과도한 야망 때문에(막 10:35–37). ⑥ 박해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요 16:1–2). ⑦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큰 재물과 부요함을 지나치게 의지하기 때문에(마 19:16–24; 막 10:17–30; 눅 12:16–21; 딤전 6:9–10). ⑧ 세상에 대한 염려 때문에(마 13:22). ⑨ 어두운 생활을 하며 악행을 즐겨하기 때문에(잠 2:12–15). ⑩ 음욕 때문에(잠 5:1–20; 6:24–29; 7:1–27; 9:13, 15; 전 7:26; 마 5:29–30). ⑪ 우상 숭배자들을 가까이하기 때문에(출 34:12, 14–16).
•시험을 이기는 비결 – 사탄은 물질(육신)을 통해서, 혹은 정신적인 문제(명예 등)를 통해서, 종교적(영적) 문제를 통해서 시험해 온다. ‘시험하는 자’라는 그의 별명처럼 사탄은 어떻게든 우리를 죄로 유혹하려 든다. 이 같은 시험을 이기는 비결은, ① 인내해야 한다. 시험 앞에서 무릎 꿇어서는 안된다. 시험을 통해 우리를 더욱 온전케 하시며 영화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바라고 기쁘게 여기며 참아 견뎌내야 한다(약 1:2–4, 12). ② 피해야 한다. 유혹이 왔을 때 그 유혹의 상대와 타협하거나 맞서서 호기를 부리기보다 요셉처럼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다(창 39:10). ③ 대적해야 한다. 사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영혼을 사냥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으로 늘 깨어 있어 사탄의 공격에 굳세게 대적해야 한다(벧전 5:8–9). 물론 사탄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엡 6:11).
예수의 모형인 이스라엘
마태와 누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는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다(마 4:2; 눅 4:2). 그러나 마태와 누가가 기록한 구체적인 시험은 40일의 시험 기간이 끝날 때 일어난다(Bock, Luke 1:1–9:50, 369–370). 이 40일 간 시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40년 방황을 떠올리게 한다(민 14:20–38). 신 6장과 8장에 나오는 예수가 겪으신 구체적인 시험과 그의 성경적인 반응은 이 두 사건을 더욱 대비시킨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예수가 이스라엘의 대표자요, 참된 이스라엘 즉, 이스라엘 민족이 불순종한 모든 곳에서 끝까지 순종한 자임이 확인될 수 있다(Holwerda, Jesus and Israel, 44–45; Lunde, Following Jesus, 219; France, Jesus and the Old Testament, 51). 이 두 사건을 대응시켜보면 서로 모형론적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이 원형(이스라엘)과 예표의 대상(예수) 사이에 그러한 관계를 의도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예수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을 예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이스라엘의 모형론은 세 공관복음에 나오지만, 마태복음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다. 마태복음 전반에 걸쳐서 마태는 예수의 생애와 이스라엘 역사 사이에 여러 가지 관계를 맺어 예수의 시험을 묘사한 의도를 보여준다(비교, 마 2:15, 18; 3:17). 이러한 의도는 누가가 예수의 시험과 아담의 시험사이에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예수의 족보를 포함시키는 데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눅 3:38).
마태복음에서 동사 페이라조(peirazō, 1, 3절)는 항상 시험(test)를 의미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탄의 의도는 예수님을 설득해서 악한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이었으나, 이 일의 시작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졌고(참조, 1절)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강조점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메시아적 부르심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 대한 시험에 있다.
예수님이 시험받으시는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단지 구체적인 부분과 두 번째 유혹과 세 번째 유혹의 순서에서 다를 뿐이다.
예수님의 경험과 모세(참조, 2, 8절) 그리고 엘리야의 경험(참조, 2, 11절) 사이에는 암시적인 유사함이 존재한다. 사탄에 의해서 6절에 인용된 시편 91편은 11절에서 다시 한 번 메아리치고 있는데,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겸손한 기대의 주제를 담고 있는 91편은 이 이야기 대부분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그러나 주된 강조점은 신명기 6–8장인데, 사탄의 제안에 대해서 예수님은 세번 신명기를 인용한다(4절 = 신 8:3, 7절 = 신 6:16, 10절 = 신 6:13). 이 모든 것들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임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 두신 교훈에 관한 설명들이다. 그 때에 하나님은 마치 사람이 자신의 아들을 훈계하듯이(신 8:5) 이스라엘을 시험하셨다(신 8:2). 이스라엘은 그 교훈을 받는데 실패했지만, 이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사역의 처음부터 광야에서 같은 종류의 시험들을 만나고 그것들로부터 승리한다.
마귀는 마태복음에서 진정한 능력있는 라이벌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의 권위가 예수님에 의한 천국의 도래로 인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12:24–39; 13:19, 39; 16:23; 참조, Kingsbury, 149–152). 그러나 그의 적대적인 의도는 하나님의 아들을 시험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목적을 위해 도구로 쓰임 받는다.
예수님이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사건은 시내 산에서 모세의 경험(출 34:28; 신 9:9, 18)과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던 엘리야의 경험(왕상 19:8)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언급된 산(8절)은 아마도 이러한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기사를 통해 이스라엘의 광야 경험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는 관점에서, 마태의 마음속에는 사십년 동안 이스라엘이 겪었던 배고픔(신 8:2–3)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음식을 전혀 섭취하지 않으셨는지 아니면 광야에서 발견될 수 있는 생활용품의 부족을 말하는지 분명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배고픔을 야기시키기에 충분한 것임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인간의 육체적인 필요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 배고픔을 느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제안한다
예수님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을 위한 지속적인 결핍의 연속이었다. 자기 자신의 물질적인 안락함을 추구하려는 것은 단지 이러한 사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비록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실패했을지라도, 예수님은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의 계획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귀의 제안이나 그 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경제적인 메시아’(economic Messiah)로 제시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없다는 사실을 주목 할 필요가 있다. 강조점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와의 관계에 놓여있다.
에스겔이 여전히 바벨론에 거하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환상 가운데 방문했던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분명히 확실한 자신감을 가지고 하나님이 시편 91:11, 12(그리고 시편 91편 전체를 통해서)에서 자신을 신뢰하는 자에게 약속해주신 육체적인 보호를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도움을 강요함으로서 뛰어내리는 것은 어떨까?(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과 그의 관계에 대한 의심들을 없애는 것은 어떠한가)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마치 이스라엘이 마사에 있는 광야에서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출 17:2–7)라고 그를 시험했던 것처럼(신 6:16)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단지 어떠한 시험도 필요하지 않는 신뢰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예수님이 산에서 바라보는 장면은 모세가 느보 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던 장면을 연상케 한다(신 34:1–4). 이곳에서는 암시적으로 그리고 누가복음 4:6에서는 분명하게 표현되어있는 마귀의 세상에 대한 통치는 요한복음 12:31에서도 또한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다(참조, 고후 4:4; 요일 5:19).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마귀의 통치와 겨루어 싸우기 위해서이고 이 싸움은 격렬한 것이 될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충성심을 타협할 수 없다. 그리고는 빈틈없는 모습으로 마귀를 쫓아 버린다. 이렇게 하면서 처음으로 그의 진짜 목적을 드러내는 이름, 사탄이 드러난다. 그 이름은 (하나님과 그의 구원계획의) ‘원수’이다.
예수님이 부적절하게 사용하기를 거부했던(6, 7절) 시편 91:11에 기록된 천사의 도움이 이제 적절하게 주어진다. ‘수종드니라’라는 표현은 특별히 음식의 공급을 암시하고 또한 엘리야의 경험이 이곳에서도 회상되는 것 같다(왕상 19:5–8). 배고픔의 기간을 통한 교훈이 적절하게 주어졌고 하나님의 사자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깨지 않은 금식을 중지시키고 있다(3–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