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07 시험 받으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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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 4:1-11
1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우리는 정신이 약합니다.
그래서 시험 받으면 져요.
40일이나 배고프면 져요.
4일도 못 버텨요.
그게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에요.
우리는 시험에서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돌들로 떡덩이를 만들어서 먹으라고 하면 바로 만들어서 먹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에서 져요.
사람들이 우리 인생을 비난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니 인생이 그러겠냐고,
니가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너를 도와주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비난하면,
대번에 하나님을 시험하고 싶어집니다.
5-6절을 보세요.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야, 너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한번 뛰어내려봐
하나님이 정말 너를 사랑하시는지, 한번 시험해봐.
그러면 우리는 바로 떨어집니다.
바로 하나님이 계신가 안계신가 하고 시험해봅니다.
이게 우리에요.
우리는 굉장히 의심이 많고, 자주자주 넘어집니다.
얼마나 자주 넘어지는지, 하루에도 수도 없이 넘어지는 거에요.
우리 마음은 평안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과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원망감으로 가득해요.
조금만 날씨가 더워져도 짜증이 나고, 이런 더운 날씨 주신 하나님이 싫어져요.
이게 우리입니다.
그런데 광야라고요?
광야를 버틴다고요?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다 가지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얼마나 더 모을 수 있을까? 그걸 염려하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조금만 남들보다 덜 가지면 열등감이 생깁니다.
조금만 성적이 남들보다 떨어지면 열등감이 생깁니다.
나 자신을 규정하고 싶은 거죠. 성적으로.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규정하고 싶은 거죠. 소유물의 크기로 말입니다.
이게 우리입니다.
우리는 너무 쉬워요. 너무 쉬운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우리를 시험하지 않아요.
우리는 이미 마귀의 부하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고,
의심이 생기면 얼마든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조금이라도 더 가질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든지 절할 수 있는 타락한 존재들입니다.
*여러분, 허장성세라고 하죠.
허세라고 하죠.
자기자신보다 자기를 부풀리는 거,
초식동물이나, 힘이 약한 동물들이, 자기 몸집을 부풀려서, 육식동물에게 위협감을 주는 행위.
허장성세죠.
청소년 시기는 더욱 허장성세가 강한 시기입니다.
자신을 입증하고,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욕구가 강합니다.
그래서 있어 보이려고 하고, 남들 앞에 나서려고 하는 특징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자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큰 시기죠.
그래서 허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어느 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허세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걸 느끼는 순간 사람이 멀쩡하게 돌아옵니다.
그래서 허세 부리는 친구들 그냥 사세요.
그냥 허세 부리면서 사세요.
*고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외로움과는 다른 말입니다.
고독은 자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외로움은 무의식적이고 비자발적인 것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 홀로 있는 것은 외로움입니다.
내가 원해서 스스로 혼자 있기를 선택하는 것은 고독입니다.
우리는 고독할 줄 알아야 합니다.
허세가 아니라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고독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나 자신과 맞닥뜨리는 것인데, 이래야 건강한 정신이 생깁니다.
허세 부리는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 스마트폰이나 다른 것에 중독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도 초라한 자기가 싫거든요.
그런 자신을 보는 게 싫어서, 스마트폰이나 다른 것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세가 강한 친구들은,
금식기도 하면 좋습니다.
혼자서 기도하면 좋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맞닥뜨리는 기도를 드리면 좋습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지내는 외로움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혼자 있기를 선택해서 고독을 연습하는 것은, 굉장히 정신 건강에 이롭습니다.
이런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자신의 초라함도 직면할 줄 알고,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상처 잘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 상처 잘 받는 사람은, 허세가 강한 사람입니다.
허세가 강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죠.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자기도 자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자신에 대하여 안 좋은 말을 하면 상처가 되는 거죠.
고독 연습이 잘 안 된 것입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건강하게 보내는 법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고대에 수도사들은 혼자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혼자서 조용히 하나님만 만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요즘 수련회는 어떻습니까?
기억도 안나겠지만, 지난 달에 수련회 했는데, 시끄럽죠?
혼자 있는 시간이 없죠?
계속해서 나누고, 또 나누고, 만나고, 뜨겁게 찬양하고, 그러죠?
그게 나쁜 것은 아닌데, 뭔가 제가 보기에는 ‘고독’이라는 필수과목이 빠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은 뜨겁게 찬양하고 열광적으로만 살아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독하고 조용하고, 쓸쓸함을 즐겨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수련회 라고 하면은, 이런 걸 연습시켜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해요.
아무튼, 아는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제가 이러쿵저렁쿵 이야기는 못해요.
그렇지만, ‘고독’을 잃어버린 여러분들은, 반드시 ‘허세’에 길들여져 있고, 열광적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가득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때요?
마치 광야에서 죽기라도 할 것처럼, 전혀 미동이 없습니다.
부정적인 사고도 없어요.
3절에 시험하는 자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런 말을 전하면,
아, 나는 왜 여기서 굶어 죽을 짓을 하고 있지?
이게 무슨 소용이야?
하나님이 나한테 먹을 것도 안 주고, 이렇게 의미없이 개죽음 당하면 무슨 의미야?
이런 생각 자체가 없어요.
여러분, 청소년 시절은 무명 시절이에요. 아무도 여러분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유명하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더 허세를 부리고 싶죠.
무의미한 삶이 너무 싫은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제대로 살고 싶은 삶에 대한 욕구가 있죠.
그래서 허세를 부리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겨우 돌을 떡으로 만드는 가장 기초적인 기적도 행하지 않아요.
허세가 없습니다.
죽어도 괜찮은 것처럼 가만히 계십니다.
이게 고독 훈련이 제대로 된 사람의 특징이에요.
전혀 흔들림이 없잖아요?
*여러분이 공부하다가 성적이 떨어지면, 공부하기 싫고,
뭐든지 잘 하다가, 사람들이 몰라주거나 인정 안해주면 흥미가 사라지고,
이런 것은 다 허세입니다.
허세로 살았다는 거에요.
이런 사람들은 자발적인 고독을 훈련해야 합니다.
아무도 없을 때, 아무도 나와 함께 있지 않을 때, 내 마음 안을 들여다 보셔야 합니다.
뭐가 있는지,
나는 그 초라함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잘 들여다 보셔야 합니다.
그게 고독 훈련이에요.
이걸 통과한 친구들은, 성적과 상관없이 꾸준히 공부할 수 있어요.
왜요?
허세로 공부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 앞에서 하는 공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뭐든지 다 마찬가지에요.
요즘 친구들 중에서 고독을 훈련한 친구들이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해요.
왜요?
너무도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한순간도 인터넷이 안 되는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발적으로 고독을 선택하지 않아도, 순간적인 쾌락이 가득한 세상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크나큰 시험이 찾아오며 순식간에 마음이 폭삭 망가지며, 폐인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또는, 인간관계 속에서 누군가의 말에 깊이 깊이 상처를 받아서, 더 이상 사회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히키코모리 같은 인생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왜요?
고독을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켜서 시험을 이기신 게 아니에요.
아무 기적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순종으로 이기신 거에요.
이게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곧 우리의 순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순간,
예수님이 이루신 모든 순종의 은혜가 우리의 것이 되거든요.
여러분, 은혜를 받아야 허세에서 벗어납니다.
내가 나를 입증하고,
내가 나를 증명하고 나타나고 싶은 욕구에서 벗어나는 거에요.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시험을 이길 수 있어요.
먹는 것보다 더 위대한 선택을 할 수 있고,
믿음으로 환경과 상관없이 평안을 누릴 수도 있어요.
성전에서 뛰어내리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아도, 하나님보다 더 큰 것이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자족할 수 있고, 풍부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제 할 수 있어요.
이 은혜를 누리세요.
그러면, 불안한 마음이 아니라, 감사와 풍부감과 안전하다는 믿음 가운데서 사는 거에요.
이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입증
허세(虛勢)는 실력이나 실속이 없으면서 겉으로만 뭔가 있어보이는 척을 하는 행위를 말한다. 어원은 허장성세(虛張聲勢). 여기서 두 글자로 줄여서 허세가 나왔다.
광야, 성전, 산
광야는 모세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시험받았던 곳이며, 성전 산은 옛 조상아브라함이 시험받았던 장소였다. 두 가지 시험 이야기에서 유대인들에게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모세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만나의 기적을 경험했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대체할 제물을 공급받고 복의 약속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위해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는다(또는 예수는 어떠한 기적도일으키지 않는다). 예수는 지극히 높은 산에서 마귀를 추방함으로 그의 사명의 본질을 드러낼 것이다.
누가복음의 순서는 광야-산-성전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강조하는 종말론적인 구성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순서는 광야-성전-산이다. 이는 저자의클라이맥스(climax)적 기법(技法)으로써 결국 ‘산’을 부각하기 위한 신학적 의도에서 배치된 것이다. 마태복음 저자에게 있어 ‘산’은 유대교의 ‘성전’보다 더중요한 장소인 것이다.
“지극히 높은 산”과 ‘우상숭배’의 결합된 이미지는 고대종교의 ‘인공산’에관한 사상을 배격하는 구약성서의 바벨탑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볼 수 있는 지극히 높은 산은 “하늘에 닿게 하여 이름을 내고지면에서 흩어짐(창 11:4)”을 면하기 위해 건축하였던 바벨탑의 이미지를 담고있다. 하늘에 닿을 수 있는 탑(즉 하늘의 입구)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지극히 높은 산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마귀의 마지막 시험 장소는 우상숭배의 장소로 고안된 ‘신화적인 산’이다. 야웨가 사람들을 흩어 우상숭배를 위한 공간을 무너트린 것처럼(창 11:8-9),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단호하게 응수하며 우상숭배를 요구하는 마귀를 산에서 내어 쫓는다.
지극히 높은 산에서 마귀는 정복되었고, ‘낙원’(에덴동산)은 회복되었다. 아담은 뱀(곧 마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창 3:23), 예수는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했고, (예수가 아닌) 마귀가 쫓겨 나갔다. 회복된 낙원에서 천사들은 예수에게 수종을 든다.
(에덴동산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천사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수종들고 있다. 이는 에덴 동산의 문이 열렸다는 의미이다.)
예수는 시험의 산에서 사십 일의 고단한 금식에도 불구하고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묘사되고있다. 결국 이러한 시험을 극복한 예수는 산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공급 받았다.
고독, 외로움
외로움은 개인이 바라는 사회적 관계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로 인하여 발생하는 주관적 고통이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는 인간관계’가 없다면, 고독의 고통을 느낄 이유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회적 관계’를 원하고 바란다.
외로움과 고독은 다르다.
‘홀로 있음’ : 객관적 상황
외로움과 고독 : 주관적 해석
- 외로움 : 부정적 해석 -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비자발적 상태
(1) 외로움을 많이 경험하는 사람은 불안애착이 내면화되어 있다.
- 고독 : 긍정적 해석 - 자발적이며 신중하게 선택한 결과
(1) 새롭게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반성적 측면의 창의성이 계발된다.
(2) 혼자 있을 때 소중한 사람들의 존재를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주는 대상을 안정적으로 내면화한다. 그래서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인관계가 좋다.
반추적 사고 :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나의 어떤 면을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
반성적 사고 : 사물의 본질과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것
반추적 사고는 특정 주제에 대한 생각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데 비해, 떠도는 마음은 하나의 주제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주제를 옮겨 다닌다. 마음이 떠돌다가 한 주제에 묶여 관련된 생각이 집중적으로 떠오르게 되는 정신 상태는 반추적 사고와 공통점을 갖는다. 따라서 뇌 기능은 서로 다르지만, 반추적 사고를 떠도는 마음의 예외적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반추적 사고를 억제하는 것은 떠도는 마음을 억제하는 것보다 어렵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반추적 사고를 하는 빈도가 높아지면 우울해진다. 이와 같은 심리기제로 인해 정서로서 우울은 인지로서 반추적 사고와 한쌍이다.
어떤 문제를 발견해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자 상황을 되짚어 보는 행위를 일종의 자아 성찰(self-reflection)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상황이나 우리의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일에 온갖 상상과 억측을 동원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일컬어 ‘비이성적인 반추적 사고’라고 말한다. 자아 성찰(self-reflection)의 탈을 쓴 ‘비이성적인 반추적 사고’는 우울함, 후회 등의 부정적인 감정과 자기비하를 수반해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심지어 우울증이라는 굴레에 우리를 가두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비이성적인 생각을 반복해 곱씹는 행위가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 잡을 경우, 이는 엄청난 악순환을 초래한다. 장시간 비이성적인 반추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을 경우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아정체감이 모호해지며 인간관계가 갈수록 소원해져 가정과 사회에서의 역할도 제대로 해낼 수 없게 된다.
묵상
다른 종교는 인간이 신을 위하여 한 일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런데 복음서는 신이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하는지를 말한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자, 성령님은 예수님을 이끌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신다.
마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았으나, 그를 섬기지 않는다.
세 가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철저히 ‘무력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그 누구도 마귀의 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마귀의 지배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마귀의 종이라는 사실 말이다.
시험

최초의 인간 아담이 사탄의 시험을 받았고(창 3:1–6), 예수께서도 공생애 전 40일간의 금식 기도 직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마 4:3). 예수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옵고”라는 기도를 가르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마 6:13).

신자에게 시험이 온다면 먼저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련인지, 사탄에게서 오는 유혹인지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련이라면 이를 믿음으로 인내해야 할 것이고(고전 10:13; 히 12:6; 약 1:3), 사탄이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능히 물리쳐 승리해야 한다(마 4:1–11).

•시험을 당하는 이유 – 인생은 세상을 사는 동안 수많은 시험(유혹)에 직면한다. 그렇다면 시험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①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육체의 소욕을 따르기 때문에(갈 5:17). ②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요일 2:15–17). ③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기 때문에(약 1:13–15). ④ 악하고 잘못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계 2:20). ⑤ 세상 지위와 권세에 대한 과도한 야망 때문에(막 10:35–37). ⑥ 박해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요 16:1–2). ⑦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큰 재물과 부요함을 지나치게 의지하기 때문에(마 19:16–24; 막 10:17–30; 눅 12:16–21; 딤전 6:9–10). ⑧ 세상에 대한 염려 때문에(마 13:22). ⑨ 어두운 생활을 하며 악행을 즐겨하기 때문에(잠 2:12–15). ⑩ 음욕 때문에(잠 5:1–20; 6:24–29; 7:1–27; 9:13, 15; 전 7:26; 마 5:29–30). ⑪ 우상 숭배자들을 가까이하기 때문에(출 34:12, 14–16).

•시험을 이기는 비결 – 사탄은 물질(육신)을 통해서, 혹은 정신적인 문제(명예 등)를 통해서, 종교적(영적) 문제를 통해서 시험해 온다. ‘시험하는 자’라는 그의 별명처럼 사탄은 어떻게든 우리를 죄로 유혹하려 든다. 이 같은 시험을 이기는 비결은, ① 인내해야 한다. 시험 앞에서 무릎 꿇어서는 안된다. 시험을 통해 우리를 더욱 온전케 하시며 영화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바라고 기쁘게 여기며 참아 견뎌내야 한다(약 1:2–4, 12). ② 피해야 한다. 유혹이 왔을 때 그 유혹의 상대와 타협하거나 맞서서 호기를 부리기보다 요셉처럼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다(창 39:10). ③ 대적해야 한다. 사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영혼을 사냥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으로 늘 깨어 있어 사탄의 공격에 굳세게 대적해야 한다(벧전 5:8–9). 물론 사탄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엡 6:11).

Lexham 성경사전 예수의 모형인 이스라엘

예수의 모형인 이스라엘

마태와 누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는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다(마 4:2; 눅 4:2). 그러나 마태와 누가가 기록한 구체적인 시험은 40일의 시험 기간이 끝날 때 일어난다(Bock, Luke 1:1–9:50, 369–370). 이 40일 간 시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40년 방황을 떠올리게 한다(민 14:20–38). 신 6장과 8장에 나오는 예수가 겪으신 구체적인 시험과 그의 성경적인 반응은 이 두 사건을 더욱 대비시킨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예수가 이스라엘의 대표자요, 참된 이스라엘 즉, 이스라엘 민족이 불순종한 모든 곳에서 끝까지 순종한 자임이 확인될 수 있다(Holwerda, Jesus and Israel, 44–45; Lunde, Following Jesus, 219; France, Jesus and the Old Testament, 51). 이 두 사건을 대응시켜보면 서로 모형론적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이 원형(이스라엘)과 예표의 대상(예수) 사이에 그러한 관계를 의도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예수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을 예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이스라엘의 모형론은 세 공관복음에 나오지만, 마태복음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다. 마태복음 전반에 걸쳐서 마태는 예수의 생애와 이스라엘 역사 사이에 여러 가지 관계를 맺어 예수의 시험을 묘사한 의도를 보여준다(비교, 마 2:15, 18; 3:17). 이러한 의도는 누가가 예수의 시험과 아담의 시험사이에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예수의 족보를 포함시키는 데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눅 3:38).

‘메슬로의 욕구 단계설’을 여기서 인용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시험과 이 이론의 연관성이 매우 높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즉 마귀의 시험은 인간의 욕망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는 점입니다.
1) 첫 번째 시험
먼저 예수님이 받으신 첫 번째 시험은 돌을 떡덩어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3일을 굶으면 담을 넘지 않을 군자가 없다’는 한국 속담처럼, 만일 어떤 사람이 40일을 금식하였다면 모든 것이 다 먹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마귀는 이 점을 노리고, 인성을 입고 오신 예수님에게 돌을 떡덩어리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하도록 유혹합니다.
이는 메슬로의 5단계 욕구 중 가장 기초적인 ‘생리적 욕구’에 해당합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생리적 욕구는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다른 어떤 욕구보다 우선합니다. 이 욕구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다른 어떤 욕구도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시험은 메슬로의 첫 번째 욕구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을 섭취할 수 없다면, 인간 존재 자체가 부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도 시장함을 느끼시는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 시험
예수님의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입니다. 이 시험은 시편 91편 11-12절에 근거한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천사들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도록 지켜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절대로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을 확인해 보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도록 만드는 마귀의 계산된 유혹입니다.
‘메슬로의 욕구 단계’에 따르면 2단계와 3단계는 서로 상관 관계가 있는 욕구입니다. 인간은 ‘생리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 단계로 자신의 안전을 추구하고, 또 불안을 회피하려는 욕구가 생기게 됩니다. 특히 ‘안전 욕구’와 ‘불안 회피 욕구’는 소속감을 통하여 더욱 증진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두 번째 시험은 메슬로의 2-3번째 시험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안전을 확보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안전을 위하여 돈을 저축하고 보험에 들고 또 편안하고 안전한 집을 갖고 싶어 합니다. 성부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구멍을 내는 것이 바로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의 목표입니다.
▲광야에서 시험당하시는 예수(Christ in the Wilderness, Ivan Kramskoy, 1872).
3) 세 번째 시험
마귀의 마지막 시험은 예수님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 모든 영광을 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화려한 물질 세계를 보면 그것을 소유하는 권세를 가지고 싶고 또 그 물질을 마음껏 사용하고 싶은 욕망이 누구에게나 저절로 들 것입니다. 물론 이 단계의 욕망은 안전이 확보된 뒤에나 가능한 것입니다.
이는 메슬로의 4-5번째 욕구 단계로, 남에게 존경받고 싶고 남을 지배하고 싶은 인간의 마지막 최고 욕구입니다.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고 더 이상 삶이 위험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게 되면, 다음 단계로 ‘자아 성취’를 향해 매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시험이 바로 메슬로의 4-5번째 욕구와 거의 동일한 내용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보면 평생 쓸 재물을 모은 사람들, 즉 삶의 안전을 확보한 사람들이 인생의 마지막 목표로 정치에 관심을 갖거나 선출직에 도전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주석2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형벌로, 40년 동안 시내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하야 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유대 광야로 40일 동안 가시며, 마귀의 유혹을 받으신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이후,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는 목자요, 모세와 같은 지도자로서 비유된다. 그는 모세의 실패와 대조되며, 모세가 이기지 못한 시험에서 승리하신다.
돌을 빵으로 만들고 싶은 유혹은, 모세가 돌을 쳐서 물을 나오게 하던 반역 사건을 연상시킬 수 있다. (민 20:1-13)
모세와 백성들은 세 가지 시험에서 패배함으로써, ‘약속의 땅’으로 진입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가지 시험에서 승리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여신다.
마귀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예수님께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그러나 첫번째 유혹에 대하여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육체적인 굶주림의 만족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공하는 영적 굶주림의 만족만큼 인간의 생계를 위해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먹을 것과 입을 것, 즉 육체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막지 않으셨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육체적인 필요도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순종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심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 하나님께 순종함
ex) 니네들이 자식을 낳았는데, 니네들의 말에 절대로 불순종하는 자식을 바라볼 때 무슨 생각이 들겠니? 너희들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자식을 바라볼 때, 니네들은 무슨 마음이 들까?
첫번째 유혹의 요점은 마귀가 예수에게 금식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오로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필요한 자원을 하늘의 아버지에게 의존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주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적용)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는 상태이다. 육체적 필요뿐만 아니라, 영적인 필요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스스로”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 있을 것처럼 우리를 속인다.
두번째 유혹 : 시편 기자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충실한 백성들을 책임지시고 해를 입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음을 말합니다.
여하튼 시편 세계관의 맥락 안에서조차 하나님이 구원하러 오시기를 요구하면서 일부러 자신을 위험한 길에 빠뜨림으로써 하나님을 자극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또한, 시편 11~12절은 자살을 막기 위한 개입이 아니라 우발적인 실수에 대한 보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뜻에 따라 조종되도록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반항심
반항심이 많은 아이는 부모의 의견에 순순히 따르지 않고 거부하는 행동을 하는 편이다. 아동은 특성상 어린 시기에는 어느 정도 부모의 의견에 따르게 되지만, 내면에서 반발심이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마음에 문제들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가 이런 상태를 방치하면 아동은 더욱 심각한 문제 행동을 보이게 된다는 점에서 서둘러 개선해 주어야만 한다. 반항심이 많은 아동은 불만에 가득 차 있는 상태이다. 이런 아동에게는 자신의 요구가 부모로부터 거절되어서인지, 아니면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인지는 모른다.
나아서 자신이 부당하게 대우를 받거나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하기에 그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 원인은 있게 마련이다. 반항심 많은 아동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의 아동,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현하려는 아동, 그리고 에너지가 넘치는 아동 등의 특징을 갖는다.
1. 자존감 저하의 문제
반항심 많은 아동은 자존감이 저하돼 있는 편이다. 자신의 존재가치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존감 저하는 부모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마음일 수 있고, 관심을 끌지 못한 결과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다. 이는 다르게 보면 아동이 관심을 끌고자 하는 마음은 건강하고 건설적인 자존감을 갖고자 하는 심리라는 것이다.
이런 자존감은 아동이 발달 경험의 모체를 형성하는 강력하고 중요한 대상에 의해 가치를 인정받고 사랑받으며, 소중히 여겨진다고 느끼는 발달경험에 의해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에릭슨은 이러한 기본적 틀에서 신뢰의 원리와 자율성의 출현을 역설했다.
아동의 기본적 신뢰는 자존감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자기 존중감의 근본적 형태로 보일 수 있지만, 기본적 심리는 아동과 돌보는 모성적 인물 사이의 근본적 상호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만족시켜 주고 편안하게 해주는 방식으로 아동의 고유한 욕구에 대해 반응하고 그것을 인지하는 돌보는 사람의 능력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것은 좋아서 가까이 하고 싶기 때문에 더욱 눈에 뜨이는 행동을 해 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반항적인 행동을 밉게 보면 더욱더 아동의 심리를 알지 못하고 꼬이게 될 것이다. 더욱이 이런 반항적 행동을 방치하면 가정에서 제멋대로 자라게 돼 사회에서도 질서나 규제를 잘 적응하지 못하는 쪽으로 발전할 것이다.
2. 심리적인 억압의 상태
반항심 많은 아동은 심리적으로 억압 상태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억압은 심리적으로 눌려 있다는 것으로, 원인은 다양하다. 자신의 요구가 거절돼서,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등 실로 다양하다. 억압은 아동의 자유로운 감정을 억제시킨다. 이처럼 반항적인 태도는 그들의 내면에 부정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적 에너지는 욕구의 불만과도 상당 부분 관련성을 갖는다. 여기에는 물론 부모가 강제적이며 지나치게 엄하기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는 현상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동이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음을 상정하게 된다.
아동의 의사나 욕구나 자주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아동의 내면에는 불만감이 쌓인다. 이런 아동들은 어머니에게 의사가 거절되거나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친구 관계도 원만치 못하기 쉬운데 그들이 가진 불만감을 친구들에게 스트레스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동은 일상생활에서 부정적 감정덩어리를 만들고 있다. 이런 감정덩어리는 나중에 어떻게든 터져 나오게 되는 폭탄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현상은 부모가 아동에게 긍정적 에너지를 교류하지 못한 결과로서, 정서의 정체 상태에 있다. 다시 말해 아동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모자라 그 불만이 내면에 쌓여가는 상태이다. 이런 불만감은 반드시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폭발할 잠재성을 가지는 것이다.
3. 공격성 문제
반항심이 많은 아동은 내면에 공격성이 내재돼 있다. 일정한 자극이 가해지면 거침없이 공격성이 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 물론 이 공격성은 언어적이나 행동적으로 상황에 따라 다르게 표출될 것이다.
반항적인 아동은 대체로 에너지가 많은 편이다. 그런 에너지는 대개 공격성으로 드러난다. 이들의 공격성은 자기애적 박탈감과 수치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그러니까 이들의 자기애적 박탈감과 수치심은 굴욕감과 격노를 증가시킨다.
아동은 상처받은 자기애를 보존하고 회복하는 데 공격성뿐 아니라 다양한 방법기제를 동원한다. 그 중에 하나는 모든 책임을 다른 아동에게 돌리는 투사(投射)와 공격자와의 동일시이다. 이는 자기애 발달이 병리적으로 내사에 뿌리내리고 있는 상태로서 고착되고 박탈된 자기애의 특성을 과대적으로 해석하려는 결과이다.
때로 아동의 반항은 에너지라는 힘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힘이 없는 아이는 그다지 반항하는 태도를 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반항은 일종의 정신적 에너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반항하는 아동은 대개 체력이나 능력이 뛰어나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지루하며, 남아도는 에너지를 반항에 소비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유형의 아이는 늘 부모에게 선수를 치면서, “알고 있다, 해 본 적이 있다, 어제도 똑같은 거 하지 않았느냐” 등 의례히 한 마디 한다. 이는 반항적인 아동에 대해 에너지의 발산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하는 이유이다.
4. 정리
반항심이 많은 아동을 둔 경우에 해당되는 부모라면 전술한 심리적 원인을 참고하여 스스로 반성할 필요가 있다. 부모가 올바르게 양육한다 해도, 반드시 원인이 될 만한 조건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신을 냉정하게 분석해야 개선 가능성이 보인다.
김충렬 박사(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전 한일장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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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의 갈등으로 진료실을 찾는 부모들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생각해낸 것이 ‘반항심 총량의 법칙’이라는 말이다. 평생 동안 반항할 양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사람에 따라 반항심이 배출되는 시기가 다를 뿐이라는 내용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서 반항심이 생기는 과정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은 태어나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어느 정도의 간섭을 받고 제지를 당한다. 예를 들면 대소변 가리기나 규칙을 지키는 것을 배울 때는 아이들이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고 부모가 지시를 하고 훈육을 한다. 훈육(discipline)이라는 영어 단어의 뜻을 보면 규칙에 복종하게 만들고 따르지 않으면 벌을 주는 것이라고 돼 있다. 단순히 훈련시킨다는 것과는 다른 무시무시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지난 일들이라 부모나 자식 모두 이렇게 험한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당한 사람에게는 이러한 고통의 기억이 무의식에 잠재돼 있다. 그런데 문제는 무의식이 행동에 은밀히 영향을 끼치는데 이런 것들이 행동으로 튀어나오는 시기가 사춘기 시절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사춘기 반항은 그동안 의식주를 부모에게 신세져야 했기 때문에 불만이 있어도 꾹꾹 누르며 참아왔는데 이제는 부모의 신세를 지지 않고도 혼자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도 자기주장을 하며 부모의 의견에 반기를 든다. 어른들은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유 없는 반항이라고 고개를 절래 흔든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유 없는 반항이 아니라 부모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일 뿐 아이 입장에서는 당연히 타당한 행동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장과정에서 반항심은 누구에게나 생기는 현상이고 다만 배출 시기가 언제이냐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언젠가는 해야 할 반항이라면 어렸을 때 하는 것이 서로에게 유리하다. 다만 한 가지 부작용은 중고등학교 때 정상적인 시기에 이것이 발휘되면 성적이 떨어져 대학 진학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의과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의 심리상태를 조사해보면 대부분 이러한 사춘기의 반항이 지연돼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지연된 사춘기’라 이름을 붙였고 의대생 등 소위 공부 잘하는 집단에 있는 학생들의 특징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사춘기 반항을 이제라도 빨리 하라고 권한다. 옛말에 어렸을 때 효자가 커서 불효자가 되고, 어렸을 때 불효자가 커서 효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정신의학을 따로 공부하지 않았지만 경험상으로 이미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 효자라는 것은 부모에게 반항하지 않고 순종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 불만이 쌓이다가 부모가 힘이 없어지면 그때 폭발하게 된다. 그러면 불효자가 되는 것이다. 한편 어렸을 때 불만을 배출하며 부모 속을 썩여 불효자 소리 듣던 사람은 쌓인 불만이 없고 또한 부모에게 못된 짓을 한 게 미안하기도 해 힘없어진 부모를 보면 측은한 생각이 들어 잘해주게 돼 효자 소리를 듣는다. 청소년들의 반항 때문에 고민하는 부모들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다. 커서 반항하면 더 골치 아프니 언젠가 한번 겪어야 할 일 부모가 힘이 있을 지금 겪는 게 낫다고. 추가로 아들 3형제를 잘 키운 교포 출신의 미국 애크런대 교수의 경우를 소개하겠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셨느냐고 물었더니 자녀들을 “respect” 했다고 답했다. 자녀들을 존중했다는 얘기다. 정신의학적으로도 매우 타당한 방법이다. 박용천 한양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사역
1 그 때에, 여호수아(예수)께서 아나고(이끌다, 출범하다, 출항하다 / 수동태) 되셨다. 에레모스(한적한 곳, 광야, 사막)으로. 프뉴마(성령, 영혼)에 의하여(휘포), 페이라조(노력하다, 시험하다, 유혹하다 / 수동태) 받기 위하여, 디아볼로스(마귀)에 의하여(휘포)
*예수님이라는 배가 출항되었다. 성령께서 배를 출항시키는 ‘선주’이시다. 성령은 예수님은 넓은 바다로 출항하시는 선주이시다. 그 바다는 ‘광야’이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예수께서는 이런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나누었다(출 3:1; 왕상 19:4; 마 4:1).
*예수님은 ‘성령에 의하여’ 광야로 이끌리셨고, ‘마귀에 의하여’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단순히 ‘장소적 환경’이 시험으로 이끈 것은 아니다. 그 환경 속에서 ‘마귀가 역사할 때’ 시험이 시작된다. 마귀는 항상 ‘환경’을 먼저 보게 하고, ‘말씀’을 나중에 접목하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을 우선시 하고, ‘환경’을 재해석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최우선이어야 한다.
2 그리고 네스튜오(금식하다, 금식 기간), 낮 40과 밤 40, 휘스테로스(최후에, 마침내, 끝내), 그가 페이나오(주리다, 시장하다, 배고프다) 하셨다.
*‘페이라조’와 ‘페이나오’는 비슷한 발음이다. 마귀는 시험하는 자인데, 먼저 ‘굶주림’으로 시험한다.
3 그리고 페이라조(시험하다, 유혹하다 / 분사)하는 자가 프로스에르코마이(나아오다, 다가오다) 하였다. 그가 그에게 말하였다. 만일 네가 아들, 하나님의, 이라면, 너는 에이폰(말하다 / 명령법) 하라. 이 리소스(돌)들이 아르토스(빵, 떡, 덩어리)가 되도록.
*사탄은 먼저 ‘환경’을 보게 한다. 그리고는 ‘말씀’을 사용하게 한다. 이 돌들에게 말하라. 빵이 되라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물질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게 한다.
4 그러답하다)하여, 그가 에이폰(말하다)하기를, 그것이 그라포(쓰다, 기록하다 / 수동태)되었으되, 아르토스(빵, 떡, 덩어리)가 아니다, 모노스(다만, 홀로, 오직), 그 사람이 자오(살다, 살아나다 / 미래)할 것이다. 알라(그러나, 도리어) 모든 레마(말씀), 에크포류오마이(나가다, 떠나다 / 분사) 하는, 하나님의 입을 통하여.
*마귀가 ‘에이폰’ 하라고 한 대로 말하지 않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말하였다.
*아르토스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그 사람이 살게 된다(살아나게 된다).
5 그때에, 그 디아볼로스(마귀)가 그를 파라람바노(데려오다, 영접하다) 하였다. 하기오스(거룩한) 폴리스(도시, 마을) 안으로, 그리고 그가 그를 히에론(성전) 프테뤼기온(꼭대기, 정점, 첨탑) 위에 히스테미(서다, 서 있다)하였다.
*그때는 언제인가? 예수님께서 ‘시험을 성공적으로 이기셨을 때’이다. 시험을 이겼는데도, 마귀는 그때를 놓치지 않는다. 시험을 이겼을 때가 가장 취약한 때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이겼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험은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이긴 것이다.
*마귀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 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예수를 성전 꼭대기 위에 서게 하였다.
6 그리고 그가 그에게 말하기를, 만일 아들이거든, 그 하나님의, 너는 발로(던지다, 두다 / 명령) 하라. 네 스스로, 카토(밑에, 아래)로, 그것이 그라포(기록하다 / 수동태)되었으되, 과연, 그의 앙겔로스(사자)들에게 그가 엔텔로(명령하다, 분부하다 / 미래)하실 것이다. 너를 위하여, 그리고 손들로 그들이 아이로(치워버리다, 짊어지다, 들어올리다 / 미래)할 것이다, 너를, 네가 프로스코프토(때리다, 공격하다)하지 않도록, 리소스(돌)로부터, 너의 발이
*또 ‘돌’이 나온다. ‘돌’은 마귀에게 항상 ‘부정적’인 요소이다.
*마귀는 예수께 네 스스로를 밑으로 던지기를 강요한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그의 천사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들어올려줄 것이고, 너의 발이 부딪히지 않도록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심하게 한다.
7 여호수아(예수)께서 그에게 페미(말하다, 이르다 / 미완료)하시기를, 팔린(또, 다시) 그것이 그라포(기록하다 / 수동태)되기를, 너는 에크페이라조(시험에 빠뜨리다, 유혹하다 / 미래)하지 말 것이다, 퀴리오스(주님), 너의 그 하나님을,
*예수님은 마귀에게 말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에 빠뜨리지 말라고 하셨다.
*페이라조 / 에크페이라조 : 마귀는 유혹하는 자이고, 예수님은 유혹하지 않는 자이다.
8 팔린(또, 다시) 그 디아볼로스(마귀)가 그를 파라람바노(데려오다) 하였다. 매우 휘프셀로스(높은) 오로스(산, 언덕)으로,  그리고 그가 그를 디크미(알다, 알게하다) 하였다, 모든 코스모스(세상)의 바실레이아(나라, 왕권)와 그의 독사(영광, 영예)를.
*마귀는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예수님을 도와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알게 된 사람은, 세상 속에 ‘갇히게 된다.’
*원숭이가 ‘철장 속에 가장 좋은 바나나’를 알게 되면, 원숭이 손에 철장 안에 갇히게 된다. 철장 안에 있는 바나나가 가장 좋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장 바깥 밀림에는 바나나 나무가 넘친다. 결국 마귀의 유혹은 ‘가장 좋은 것’을 미끼로, ‘세상 안’에 인간을 가두기 위한 목적으로 일어난다.
*‘가장 좋은 것’은 ‘가장 싫은 것’의 반대이다.
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 가난, 질병, 죽음, 고통, 허무, 우울, 절망, 쾌락없음 등
*또한 당신은 ‘어떤 것을 가진’ 사람 앞에서 굴복하는가?
그것이 무엇인가? : 지적인 사람, 돈 많은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 외모가 뛰어난 사람,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
*켈러의 정의에 따르면, 가짜 신, 즉 우상이란 “우리의 삶에 아주 중심적이고 본질적이어서 만약 그것을 잃게 되었을 때 우리의 삶 자체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켈러에 따르면, 우상은 본질적으로는 선하고 좋은 것이지만, 거기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우리가 인생의 의미 자체를 거기에 걸게 될 때 우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따라서 가족이나 자녀도 우상이 될 수 있고, 직업이나 돈을 버는 것, 성취 그 자체, 다른 이들의 칭송, 혹은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 대한 생각, 수치심, 사회적 지위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맨틱한 이성과의 관계도, 동료들의 나에 대한 인정도, 내가 얼마나 경쟁력을 가진 사람인지도, 안정적이고 편안한 환경도, 아름다움도, 혹은 내 명석함도, 위대한 정치적 혹은 사회적 대의도, 우리가 얼마나 도덕적인 사람인지도, 심지어 종교적 사역에서의 성공을 위한 바램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xviii). 켈러가 책 전체를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하는 한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상은 그것을 섬기는 사람, 즉 그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을 그 우상의 노예로 만든다’(all idolatries enslave.) 는 것입니다. 즉 무언가가 사람의 마음 속에 깊은 갈망으로 자리잡아서 그 사람의 모든 동기와 삶의 방식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삶에서 그 무언가가 우상이 되었다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9 그리고 그가 그에게 에이폰(말하다)하기를, 이것들을 너에게, 모두 내가 디도미(주다 / 미래)할 것이다.
만일 핍토(넘어지다, 엎드리다)하며, 네가 프로스퀴네오(경배하다, 절하다, 예배하다)한다면, 나에게.
*마귀에게 예배하는 행위는, 물질계에 갇히는 행위와 일맥상통한다. 물질계에 갇혀 있는 사람은 마귀에게 예배하는 자이다. 세상 안에 ‘가장 좋은 것’이 있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마귀에게 절하는 사람이다.
10 그때에 여호수아(예수)께서 그에게 말하기를, 사타나스(사탄)아, 휘파고(떠나다 / 명령)하라. 그가 그라포(기록하다 / 수동태)되기를, 과연 주 너의 하나님에게 프로스퀴네오(경배하다, 예배하다 / 미래)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모노스(다만, 홀로, 오직) 라트류오(섬기다, 예배하다 / 미래) 할 것이다.
*세 번째 시험에서 마귀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말조차 제거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탄아 떠나가라’고 명령하신다. 예배에 대한 부분이다. 사탄이 예배를 건드리자, 강력하게 떠나라고 명령하신다. 오직 하나님께 예배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만 섬길 것이다.
*우리가 ‘지배 받는 영역’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에 ‘지배’를 당하는가? 그것이 ‘내가 섬기는 신’이다.
11 그때에, 그 디아볼로스(마귀)는 그를 아피에미(떠나다) 하였다. 그리고
이두(보라!, 문득) 앙겔로스(사자)들이 프로스에르코마이(나아오다, 다가오다)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그를 디아코네오(수종들다, 섬기다, 봉사하다 / 미완료)하고 있었다.
*세 번의 시험이 끝나자 마귀는 예수님을 떠났다.
*그리고 어둔 밤이 지나고 광명이 비치듯이, 문득 사자들이 예수님 가까이로 다가와서 그를 섬기고 있었다.
*이처럼 마귀의 유혹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기시고 승리하셨다.
묵상
세 가지 시험.
육신적 필요를 채우려는 욕구(3-4절),자랑의 욕구(5-7절),소유의 욕구(8-10절).
내면이 단단한 사람은, 상대방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자기 자신을 자랑하려고 과대표현을 하지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소유를 증가시키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시험이다.
주석
마태복음 3) 시험받으심(4:1–11)

마태복음에서 동사 페이라조(peirazō, 1, 3절)는 항상 시험(test)를 의미한다

마태복음 3) 시험받으심(4:1–11)

의심할 여지없이, 사탄의 의도는 예수님을 설득해서 악한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이었으나, 이 일의 시작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졌고(참조, 1절)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강조점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메시아적 부르심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 대한 시험에 있다.

마태복음 3) 시험받으심(4:1–11)

예수님이 시험받으시는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단지 구체적인 부분과 두 번째 유혹과 세 번째 유혹의 순서에서 다를 뿐이다.

마태복음 3) 시험받으심(4:1–11)

예수님의 경험과 모세(참조, 2, 8절) 그리고 엘리야의 경험(참조, 2, 11절) 사이에는 암시적인 유사함이 존재한다. 사탄에 의해서 6절에 인용된 시편 91편은 11절에서 다시 한 번 메아리치고 있는데,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겸손한 기대의 주제를 담고 있는 91편은 이 이야기 대부분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그러나 주된 강조점은 신명기 6–8장인데, 사탄의 제안에 대해서 예수님은 세번 신명기를 인용한다(4절 = 신 8:3, 7절 = 신 6:16, 10절 = 신 6:13). 이 모든 것들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임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 두신 교훈에 관한 설명들이다. 그 때에 하나님은 마치 사람이 자신의 아들을 훈계하듯이(신 8:5) 이스라엘을 시험하셨다(신 8:2). 이스라엘은 그 교훈을 받는데 실패했지만, 이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사역의 처음부터 광야에서 같은 종류의 시험들을 만나고 그것들로부터 승리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 예수는 광야에서 같은 종류의 시험을 만나고 이긴다.
1절
마태복음 3) 시험받으심(4:1–11)

마귀는 마태복음에서 진정한 능력있는 라이벌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의 권위가 예수님에 의한 천국의 도래로 인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12:24–39; 13:19, 39; 16:23; 참조, Kingsbury, 149–152). 그러나 그의 적대적인 의도는 하나님의 아들을 시험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목적을 위해 도구로 쓰임 받는다.

2절
마태복음 3) 시험받으심(4:1–11)

예수님이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사건은 시내 산에서 모세의 경험(출 34:28; 신 9:9, 18)과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던 엘리야의 경험(왕상 19:8)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언급된 산(8절)은 아마도 이러한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기사를 통해 이스라엘의 광야 경험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는 관점에서, 마태의 마음속에는 사십년 동안 이스라엘이 겪었던 배고픔(신 8:2–3)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음식을 전혀 섭취하지 않으셨는지 아니면 광야에서 발견될 수 있는 생활용품의 부족을 말하는지 분명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배고픔을 야기시키기에 충분한 것임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인간의 육체적인 필요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3-4절
마태복음 3) 시험받으심(4:1–11)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 배고픔을 느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제안한다

마태복음 3) 시험받으심(4:1–11)

예수님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을 위한 지속적인 결핍의 연속이었다. 자기 자신의 물질적인 안락함을 추구하려는 것은 단지 이러한 사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비록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실패했을지라도, 예수님은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의 계획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귀의 제안이나 그 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경제적인 메시아’(economic Messiah)로 제시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없다는 사실을 주목 할 필요가 있다. 강조점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와의 관계에 놓여있다.

5-7절
마태복음 3) 시험받으심(4:1–11)

에스겔이 여전히 바벨론에 거하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환상 가운데 방문했던 것을 기억하라.

마태복음 3) 시험받으심(4:1–11)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분명히 확실한 자신감을 가지고 하나님이 시편 91:11, 12(그리고 시편 91편 전체를 통해서)에서 자신을 신뢰하는 자에게 약속해주신 육체적인 보호를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도움을 강요함으로서 뛰어내리는 것은 어떨까?(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과 그의 관계에 대한 의심들을 없애는 것은 어떠한가)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마치 이스라엘이 마사에 있는 광야에서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출 17:2–7)라고 그를 시험했던 것처럼(신 6:16)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단지 어떠한 시험도 필요하지 않는 신뢰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8-10절
마태복음 3) 시험받으심(4:1–11)

예수님이 산에서 바라보는 장면은 모세가 느보 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던 장면을 연상케 한다(신 34:1–4). 이곳에서는 암시적으로 그리고 누가복음 4:6에서는 분명하게 표현되어있는 마귀의 세상에 대한 통치는 요한복음 12:31에서도 또한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다(참조, 고후 4:4; 요일 5:19).

마태복음 3) 시험받으심(4:1–11)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마귀의 통치와 겨루어 싸우기 위해서이고 이 싸움은 격렬한 것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3) 시험받으심(4:1–11)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충성심을 타협할 수 없다. 그리고는 빈틈없는 모습으로 마귀를 쫓아 버린다. 이렇게 하면서 처음으로 그의 진짜 목적을 드러내는 이름, 사탄이 드러난다. 그 이름은 (하나님과 그의 구원계획의) ‘원수’이다.

11절
마태복음 3) 시험받으심(4:1–11)

예수님이 부적절하게 사용하기를 거부했던(6, 7절) 시편 91:11에 기록된 천사의 도움이 이제 적절하게 주어진다. ‘수종드니라’라는 표현은 특별히 음식의 공급을 암시하고 또한 엘리야의 경험이 이곳에서도 회상되는 것 같다(왕상 19:5–8). 배고픔의 기간을 통한 교훈이 적절하게 주어졌고 하나님의 사자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깨지 않은 금식을 중지시키고 있다(3–4절).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죽이려 할 때,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을 말렸던 것처럼,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으려 하자,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님의 금식을 막으시고, 그에게 음식물을 공급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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