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 첫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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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1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다.광야는 구약에서 고난과 시험의 장소다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랬고모세도 다윗도 엘리야도 모두 광야에서 고난과 시험의 시간을 견뎠다.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도 마귀에게 고난과 시험을 당하셨다.예수님께서 첫번째 마귀의 시험을 받기 전까지 40일간 금식 하셨다.40은 고난과 시험을 의미한다.예수님의 금식에서 40일, 애굽의 노예생활 400년애굽 사람을 죽인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까지 광야 40년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모두 다 고난과 시험을 의미 한다.그런데, 신약에 들어와서 역사적인 관점에서 광야의 의미가 바뀐다.로마 식민지로 수탈 당하고율법주의에 빠져 형식화 된 신앙생활에 한계를 느낀 사람들이광야로 나와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다.대표적인 것이 예수님 당시의 엣세네파이며, 훗날 광야 동굴에서 생활 했던 쿰란 공동체 같은 사람들이다.이들은 세속화 되고 형식적이 된 신앙과 무너진 신앙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나와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고 영적인 회복과 구원을 꿈꿨다.성지 순례를 가보면 예수님께서 실제로 시험을 당하셨던 광야가 있다.허허벌판이 아니고 사실은 산이다. 산에 여기져기 자연동굴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은 신 장소라 하여 교회가 세워져 있다.예수님에게 광야에서 보낸 40일간의 금식과 세가지 시험은 고난과 시험이기도 했지만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 나라 회복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상반기 사랑방 심방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나눔이 있었다.어떤 지체가 ‘제 삶은 지금 광야에요'라는 나눔이었다.그 말은 지금 내 삶이 너무 힘들고 매말라서 은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아마 대부분의 청년들의 삶이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런 고난과 시험으로 가득한 광야일 것이다.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이런 일상으로 부터 벗어나서 수련회에 들어왔다는 것은 이렇게 고난과 시험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이곳에서도 영적인 회복과 구원을 꿈꾸는 희망의 장소로서의 광야를 찾아 온 것이라 믿는다. 이곳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새롭게 되어 나가게 되기를 축복한다.그러나 몸은 광야로 나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세상에 있는 경우가 있다.하나님과 만남이 있는 희망의 광야로 나오게 되기를 축복한다. 주제 1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오늘 본문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마치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것은 상대방을 자극 하는 말이다. 니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한번 증명해 보라는 의도가 담겨 있다.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한번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스스로 증명하거나 설명하려고 애쓰신 적이 없다.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예수님은 광야로 나오시기 전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하나님께서 친히 증명하셨다. 이미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것을 마귀가 교묘하게 이용해 예수님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사람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에 아주 철저하게 얽매여 있다.사람들은 보통 실제 자기 자신 보다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한다.모리스 와그너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더 센세이션 오브 빙 썸바디)에서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잘 생겼다면 그 외모에 대한 칭찬을 받아야 만족을 하고무엇인가 좋은 일을 해다면 거기에 타이틀을 달아 주어야 만족하며내 직업이나 직분에는 칭찬과 보상이 있어야 만족한다.자기 모습 그대로는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그 이상의 평가와 보상을 받아야 만족하는데, 자기 모습 이상의 자신이 되기를 늘 열망한다. 이것은 마치 2+2=6 이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잘못된 생각이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청년들을 만나보면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간혹 있는데 거의 99%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1%의 경우도 정말 만족해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기대에 실망을 많이 해서 그냥 만족하기로 결정한 경우다.내가 되고 싶은 나에게서 항상 모자라고 부족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비교의식과 열등감,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비교의식 없는사람, 열등감 없는 사람, 불안이 없는 사람 있나? 손들어보자. 비교의식 없는 사람, 열등감 없는 사람 없다.모델을 해도 될정도로 예쁘고, 명문대를 장학생으로 다니면서학점도 늘 만점을 받는 똑똑한 자매가 있었다.공부만 잘 하는게 아니라 음악적 재능도 타월하고 집도 부자여서엄마가 사주신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친구 였는데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까 뭔가 느낌이 이상한 거에요.그래서 물어 봤습니다. 혹시 내 스스로가 너무 싫어서 울어 본적 있어? 차라리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런 생각 해본적 없어?그러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면서 우는 거에요.사실 이 친구의 마음은 탑에 갖힌 공주 같았다.어려서 부모님이 이혼하시면서 자기때문이라는 상처가 있었고 어디에서도 용납받지 못하는 불안감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실제 모습을 알면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그래서 더 외모에 신경쓰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더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더 노력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마귀가 예수님과 우리의 바로 이 부분을 시험하고 있다.ㅈ그렇다면 증명해봐!그렇지 않다면 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야. 넌 아직 멀었어. 넌 지금 잘 못 살고 있어.우리 원수 마귀는 우리가 수련회에 들어와서 말씀을 듣는 지금 이 순간에도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하여 이렇게 질문합니다.너 진짜 하나님 믿는거 맞아? 너 진짜 하나님의 자녀 맞아?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삶은 뭐야? 전혀 그렇지 못하잖아.그런데 바로 여기에 복음의 놀라운 능력이 숨겨져 있습니다.마귀가 아무리 숨기고 교묘하게 공격하려 해도 우리가 마귀의 정체를 알고 나면 마치 방탈출 카페의 비밀을 풀어내듯숨겨진 진리를 찾을 수 있는데,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ㅇㅇㅇ해봐라 하는 마귀의 말 속에서 우리는 ㅇㅇㅇ 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놀라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더라도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어? 너에게 상처 준 사람 용서 할 수 있어?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을 위해 너의 꿈 너의 미래, 너의 사랑하는 사람들 다 포기하고 선교 나갈 수 있어?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니가 좋아하는 술, 담배, 여자, 자유로운 주말 이런 것들 다 포기할 수있어? 마귀는 이런 것들로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혼란 스럽게 한다. 주일 성수도 않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술담배 가리지 않고 다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십일조나 주일 봉사는 커녕 후원단체 하나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일주일 내내 말씀 한구절 보지 않고, 기도한번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평생 한 사람도 전도해본적 없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수 있어?마귀는 계속 이런 것들로 공격하고 흔들어 놓습니다.우리의 조건과 행위를 가지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흔들어 놓는 겁니다.이렇게 몇대 맞고 우리 자신에게 실망하고 나면 이렇게 공격하는 것들에 대한 저항력 자체를 잃어 버립니다. 그런데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 없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마귀에게 증명할 필요가 없으셨던 것 처럼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사람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 처럼 예수님은 노력이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하나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서언해 주신 것이 전부 입니다.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들됨을 예수님의 신성이나 예수님의 초인적인 노력에서 찾지 않으십니다.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낳고 그렇게 선포해 주신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의 절대적인 보증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의 자녀 됨도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우리의 조건이나 행위로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단 한 가지, 믿고 받아 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이유는그것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도 어지간 해서는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의 기대는 저버리기가 힘듭니다.세상에서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를 좋은 아빠라고 믿고 있는 자녀들에게는 자상하고 다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 답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죄의 자리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것입니다.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답게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우리가 예수님 처럼 되려고는 노력하지만예수님 같이 되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노력하시지 않습니다.이미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로 사셨습니다.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 되는데, 하나님의 자녀 처럼 되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가 부터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은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선포하셨습니다.하나님에게 여러분은 예수님과 다를바가 없는 자녀 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5.종도 가족으로 대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받으셨습니다.[나를 지으신 주님]주제 1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예수님이 받으신 첫번째 시험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다.40일을 금식하며 주리신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은시험이라기 보다는 아주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권면에 가깝다.돌들을 떡떵이로 만들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내려가 마트에서 빵을 사먹는 것 보다 광야에서 돌들로 부페를 차려 먹는 것이 합리적이다.이 본문이 참 재미있는 것은 마귀에게 돌들을 떡덩이로 만들 능력이 있었다면예수님에게 더 강력한 시험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사흘만 굶어도 내 주먹이 빵으로 보인는데, 40일을 금식했으니 진짜 음식이 눈앞에 있었다면 훨씬 더 예수님을 시험하기 더 좋은 조건이었을 것이다.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다.먼저는 마귀에게는 속이는 능력은 있지만 창조하고 변형하는 능력은 없다는 것이고두번째는 마귀의 시험 목적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적인 자리에 묶어 두기 위한 것이다.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철저한 인간이 되셔야 했기에 이 합리적인 제안을 거절 하셨다. 물론 마귀가 돌이 아니라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면 철저한 인간으로서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순종한 것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마귀의 제안을 전적으로 거절하셨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마귀에게는 돌을 떡으로 만들 능력이 없다.그런데도 예수님께 돌을 내밀며 떡을 만들어 보라고 한다. 마치 돌에 생명이 있는 것 처럼 말한다. 마귀는 우리에게도 돌을 마치 금덩이인양 떡인 양 굶주린 우리에게 주면서 우리의 행위와 노력으로 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권한다.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 허기진채 살아간다. 아까 했던 자매 이야기를 보면 이 자매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여전히 부족했다.예수님을 만나러 왔던 부자 청년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여전히 부족했다.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에 굶주려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로 이 굶주림을 채우려고 조건과 행위에 초점 맞춘다.세속적인 성공에 중독 된 사람, 돈에 중독 된 사람, 인기에 중독 된 사람, 마약이 아니더라도 알콜에 중독 된 사람, 음식에 중독 된 사람, 성형에 중독 된 사람 연애에 중독 된 사람… 거창 한 것이 아니더라도 작고 소소한 것들까지, 스마트폰, 드라마, 게임, 심지어 네일아트, 타투에 중독 된 사람, 여행, 쇼핑 너무 많다.이런 것들을 왜 중독이라고 말하느냐?잠시 잠깐 내적인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게 해주고 행복을 느끼게 해주지만 금새 사라지고 다시 찾지 않으면 현실을 견디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틀딱 같은 소리 처럼 들리는것 잘 안다. 그러나 문자적 경건주의나 권위적인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로 우리의 내면의 입을 틀어 막고 채워 놓고 있으면 시편 42편과 같은 고백은 절대로 할 수가 없다.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돌로 배를 채우고 어떻게 생명의 떡을 구하겠는가?예수님 당시에 사람들도 지금 우리와 똑 같았다.형식적인 종교 생활로, 돈으로, 권력으로, 쾌락으로... 성경은 이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대표적인 것이 헤롯 왕과 제사장 그룹인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이다. 심각하게 돈과 권력과 쾌락에 중독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성가시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잊었다. 중독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자유함이 없다.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여전히 자유함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이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성경은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눈다.자연인과 신령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이다.자연인은 아담의 범죄 이후로 육체는 살아 있으나 영이 죽어 있어서 하나님과 단절되어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이 결과 모든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어두운 마음을 물려받게 되었다.부정적인 감정은 두려움, 염려(분리됨으로 인한 불안정 애착), 수치, 죄책감(벗은 것에 대한 인식), 우울과 분노(가인의 범죄)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잉태하였다는 말이 원어로는 아담이 하와를 알았다는 표현을 쓴다. 여기서 알았다는 지식은 개인적이고 관계적인 것이다.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시라는 것은. 로고스 곧 진리가 개인적이고 관계적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뜻이기도 하다.그래서 세상의 어떤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수 없으나 예수님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있다.이것을 믿고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적 회복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이 살아 있는 신령한 사람이 된다.그런데 이렇게 영적인 생명이 회복되고 신분이 변화 되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죄에 중독되어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여전히 육신의 습관에 중독적으로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입니다.육신에 속한 사람도 영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성령안에서의 자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입니다.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으십니다.성령을 따라 살든지 육신에 매여 살든지 그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고 완전한 자유 입니다.순종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우리는 하나님께 사랑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순종합니다.순종하든 안하든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고 자녀에는 갓 태어난 신생아 마냥 자기 마음대로인 사람이 있고, 성장하고 성숙하여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장성한 자녀가 있을 뿐입니다.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이 확실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확실하다면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어떠한 어려움과 장애물이 있든 관계 없이 앞으로 성장하고 성숙할 길만 남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그래서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은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에 가장 위험하고 해가 되는 것이 수동성입니다.또한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은 성령 안에서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할 수록 성령 충만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행하되 분주함과 조급함의 멍에를 주님 앞에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첫번째 시험의 하이라이트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능력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그렇게 할 자유도 있고 능력도 있으셨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자유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성령 안에서의” 성숙한 자유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좋은 것들을 누릴 권리도 있고 능력도 있지만하나님을 더 알기 원한다면내가 하나님이 아닌 어떤 것들로 나의 영적인 배고픔을 채우고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유일하신 공급자 이신 하나님께서 그 갈급함을 채워주시기를 사모함으로 구해야 합니다. 찬양하겠습니다. [목마른 사슴 시냇 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주제 1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다.광야는 구약에서 고난과 시험의 장소다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랬고모세도 다윗도 엘리야도 모두 광야에서 고난과 시험의 시간을 견뎠다.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도 마귀에게 고난과 시험을 당하셨다.예수님께서 첫번째 마귀의 시험을 받기 전까지 40일간 금식 하셨다.40은 고난과 시험을 의미한다.예수님의 금식에서 40일, 애굽의 노예생활 400년애굽 사람을 죽인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까지 광야 40년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모두 다 고난과 시험을 의미 한다.그런데, 신약에 들어와서 역사적인 관점에서 광야의 의미가 바뀐다.로마 식민지로 수탈 당하고율법주의에 빠져 형식화 된 신앙생활에 한계를 느낀 사람들이광야로 나와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다.대표적인 것이 예수님 당시의 엣세네파이며, 훗날 광야 동굴에서 생활 했던 쿰란 공동체 같은 사람들이다.이들은 세속화 되고 형식적이 된 신앙과 무너진 신앙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나와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고 영적인 회복과 구원을 꿈꿨다.성지 순례를 가보면 예수님께서 실제로 시험을 당하셨던 광야가 있다.허허벌판이 아니고 사실은 산이다. 산에 여기져기 자연동굴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은 신 장소라 하여 교회가 세워져 있다.예수님에게 광야에서 보낸 40일간의 금식과 세가지 시험은 고난과 시험이기도 했지만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 나라 회복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상반기 사랑방 심방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나눔이 있었다.어떤 지체가 ‘제 삶은 지금 광야에요'라는 나눔이었다.그 말은 지금 내 삶이 너무 힘들고 매말라서 은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아마 대부분의 청년들의 삶이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런 고난과 시험으로 가득한 광야일 것이다.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이런 일상으로 부터 벗어나서 수련회에 들어왔다는 것은 이렇게 고난과 시험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이곳에서도 영적인 회복과 구원을 꿈꾸는 희망의 장소로서의 광야를 찾아 온 것이라 믿는다. 이곳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새롭게 되어 나가게 되기를 축복한다.그러나 몸은 광야로 나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세상에 있는 경우가 있다.하나님과 만남이 있는 희망의 광야로 나오게 되기를 축복한다. 주제 1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오늘 본문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마치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것은 상대방을 자극 하는 말이다. 니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한번 증명해 보라는 의도가 담겨 있다.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한번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스스로 증명하거나 설명하려고 애쓰신 적이 없다.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예수님은 광야로 나오시기 전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하나님께서 친히 증명하셨다. 이미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것을 마귀가 교묘하게 이용해 예수님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사람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에 아주 철저하게 얽매여 있다.사람들은 보통 실제 자기 자신 보다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한다.모리스 와그너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더 센세이션 오브 빙 썸바디)에서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잘 생겼다면 그 외모에 대한 칭찬을 받아야 만족을 하고무엇인가 좋은 일을 해다면 거기에 타이틀을 달아 주어야 만족하며내 직업이나 직분에는 칭찬과 보상이 있어야 만족한다.자기 모습 그대로는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그 이상의 평가와 보상을 받아야 만족하는데, 자기 모습 이상의 자신이 되기를 늘 열망한다. 이것은 마치 2+2=6 이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잘못된 생각이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청년들을 만나보면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간혹 있는데 거의 99%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1%의 경우도 정말 만족해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기대에 실망을 많이 해서 그냥 만족하기로 결정한 경우다.내가 되고 싶은 나에게서 항상 모자라고 부족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비교의식과 열등감,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비교의식 없는사람, 열등감 없는 사람, 불안이 없는 사람 있나? 손들어보자. 비교의식 없는 사람, 열등감 없는 사람 없다.모델을 해도 될정도로 예쁘고, 명문대를 장학생으로 다니면서학점도 늘 만점을 받는 똑똑한 자매가 있었다.공부만 잘 하는게 아니라 음악적 재능도 타월하고 집도 부자여서엄마가 사주신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친구 였는데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까 뭔가 느낌이 이상한 거에요.그래서 물어 봤습니다. 혹시 내 스스로가 너무 싫어서 울어 본적 있어? 차라리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런 생각 해본적 없어?그러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면서 우는 거에요.사실 이 친구의 마음은 탑에 갖힌 공주 같았다.어려서 부모님이 이혼하시면서 자기때문이라는 상처가 있었고 어디에서도 용납받지 못하는 불안감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실제 모습을 알면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그래서 더 외모에 신경쓰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더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더 노력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마귀가 예수님과 우리의 바로 이 부분을 시험하고 있다.ㅈ그렇다면 증명해봐!그렇지 않다면 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야. 넌 아직 멀었어. 넌 지금 잘 못 살고 있어.우리 원수 마귀는 우리가 수련회에 들어와서 말씀을 듣는 지금 이 순간에도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하여 이렇게 질문합니다.너 진짜 하나님 믿는거 맞아? 너 진짜 하나님의 자녀 맞아?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삶은 뭐야? 전혀 그렇지 못하잖아.그런데 바로 여기에 복음의 놀라운 능력이 숨겨져 있습니다.마귀가 아무리 숨기고 교묘하게 공격하려 해도 우리가 마귀의 정체를 알고 나면 마치 방탈출 카페의 비밀을 풀어내듯숨겨진 진리를 찾을 수 있는데,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ㅇㅇㅇ해봐라 하는 마귀의 말 속에서 우리는 ㅇㅇㅇ 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놀라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더라도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어? 너에게 상처 준 사람 용서 할 수 있어?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을 위해 너의 꿈 너의 미래, 너의 사랑하는 사람들 다 포기하고 선교 나갈 수 있어?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니가 좋아하는 술, 담배, 여자, 자유로운 주말 이런 것들 다 포기할 수있어? 마귀는 이런 것들로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혼란 스럽게 한다. 주일 성수도 않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술담배 가리지 않고 다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십일조나 주일 봉사는 커녕 후원단체 하나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일주일 내내 말씀 한구절 보지 않고, 기도한번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평생 한 사람도 전도해본적 없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수 있어?마귀는 계속 이런 것들로 공격하고 흔들어 놓습니다.우리의 조건과 행위를 가지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흔들어 놓는 겁니다.이렇게 몇대 맞고 우리 자신에게 실망하고 나면 이렇게 공격하는 것들에 대한 저항력 자체를 잃어 버립니다. 그런데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 없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마귀에게 증명할 필요가 없으셨던 것 처럼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사람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 처럼 예수님은 노력이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하나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서언해 주신 것이 전부 입니다.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들됨을 예수님의 신성이나 예수님의 초인적인 노력에서 찾지 않으십니다.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낳고 그렇게 선포해 주신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의 절대적인 보증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의 자녀 됨도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우리의 조건이나 행위로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단 한 가지, 믿고 받아 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이유는그것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도 어지간 해서는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의 기대는 저버리기가 힘듭니다.세상에서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를 좋은 아빠라고 믿고 있는 자녀들에게는 자상하고 다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 답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죄의 자리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것입니다.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답게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우리가 예수님 처럼 되려고는 노력하지만예수님 같이 되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노력하시지 않습니다.이미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로 사셨습니다.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 되는데, 하나님의 자녀 처럼 되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가 부터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은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선포하셨습니다.하나님에게 여러분은 예수님과 다를바가 없는 자녀 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5.종도 가족으로 대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받으셨습니다.[나를 지으신 주님]주제 1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예수님이 받으신 첫번째 시험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다.40일을 금식하며 주리신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은시험이라기 보다는 아주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권면에 가깝다.돌들을 떡떵이로 만들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내려가 마트에서 빵을 사먹는 것 보다 광야에서 돌들로 부페를 차려 먹는 것이 합리적이다.이 본문이 참 재미있는 것은 마귀에게 돌들을 떡덩이로 만들 능력이 있었다면예수님에게 더 강력한 시험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사흘만 굶어도 내 주먹이 빵으로 보인는데, 40일을 금식했으니 진짜 음식이 눈앞에 있었다면 훨씬 더 예수님을 시험하기 더 좋은 조건이었을 것이다.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다.먼저는 마귀에게는 속이는 능력은 있지만 창조하고 변형하는 능력은 없다는 것이고두번째는 마귀의 시험 목적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적인 자리에 묶어 두기 위한 것이다.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철저한 인간이 되셔야 했기에 이 합리적인 제안을 거절 하셨다. 물론 마귀가 돌이 아니라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면 철저한 인간으로서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순종한 것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마귀의 제안을 전적으로 거절하셨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마귀에게는 돌을 떡으로 만들 능력이 없다.그런데도 예수님께 돌을 내밀며 떡을 만들어 보라고 한다. 마치 돌에 생명이 있는 것 처럼 말한다. 마귀는 우리에게도 돌을 마치 금덩이인양 떡인 양 굶주린 우리에게 주면서 우리의 행위와 노력으로 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권한다.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 허기진채 살아간다. 아까 했던 자매 이야기를 보면 이 자매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여전히 부족했다.예수님을 만나러 왔던 부자 청년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여전히 부족했다.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에 굶주려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로 이 굶주림을 채우려고 조건과 행위에 초점 맞춘다.세속적인 성공에 중독 된 사람, 돈에 중독 된 사람, 인기에 중독 된 사람, 마약이 아니더라도 알콜에 중독 된 사람, 음식에 중독 된 사람, 성형에 중독 된 사람 연애에 중독 된 사람… 거창 한 것이 아니더라도 작고 소소한 것들까지, 스마트폰, 드라마, 게임, 심지어 네일아트, 타투에 중독 된 사람, 여행, 쇼핑 너무 많다.이런 것들을 왜 중독이라고 말하느냐?잠시 잠깐 내적인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게 해주고 행복을 느끼게 해주지만 금새 사라지고 다시 찾지 않으면 현실을 견디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틀딱 같은 소리 처럼 들리는것 잘 안다. 그러나 문자적 경건주의나 권위적인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로 우리의 내면의 입을 틀어 막고 채워 놓고 있으면 시편 42편과 같은 고백은 절대로 할 수가 없다.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돌로 배를 채우고 어떻게 생명의 떡을 구하겠는가?예수님 당시에 사람들도 지금 우리와 똑 같았다.형식적인 종교 생활로, 돈으로, 권력으로, 쾌락으로... 성경은 이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대표적인 것이 헤롯 왕과 제사장 그룹인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이다. 심각하게 돈과 권력과 쾌락에 중독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성가시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잊었다. 중독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자유함이 없다.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여전히 자유함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이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성경은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눈다.자연인과 신령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이다.자연인은 아담의 범죄 이후로 육체는 살아 있으나 영이 죽어 있어서 하나님과 단절되어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이 결과 모든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어두운 마음을 물려받게 되었다.부정적인 감정은 두려움, 염려(분리됨으로 인한 불안정 애착), 수치, 죄책감(벗은 것에 대한 인식), 우울과 분노(가인의 범죄)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잉태하였다는 말이 원어로는 아담이 하와를 알았다는 표현을 쓴다. 여기서 알았다는 지식은 개인적이고 관계적인 것이다.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시라는 것은. 로고스 곧 진리가 개인적이고 관계적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뜻이기도 하다.그래서 세상의 어떤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수 없으나 예수님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있다.이것을 믿고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적 회복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이 살아 있는 신령한 사람이 된다.그런데 이렇게 영적인 생명이 회복되고 신분이 변화 되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죄에 중독되어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여전히 육신의 습관에 중독적으로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입니다.육신에 속한 사람도 영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성령안에서의 자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입니다.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으십니다.성령을 따라 살든지 육신에 매여 살든지 그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고 완전한 자유 입니다.순종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우리는 하나님께 사랑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순종합니다.순종하든 안하든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고 자녀에는 갓 태어난 신생아 마냥 자기 마음대로인 사람이 있고, 성장하고 성숙하여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장성한 자녀가 있을 뿐입니다.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이 확실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확실하다면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어떠한 어려움과 장애물이 있든 관계 없이 앞으로 성장하고 성숙할 길만 남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그래서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은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에 가장 위험하고 해가 되는 것이 수동성입니다.또한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은 성령 안에서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할 수록 성령 충만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행하되 분주함과 조급함의 멍에를 주님 앞에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첫번째 시험의 하이라이트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능력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그렇게 할 자유도 있고 능력도 있으셨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자유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성령 안에서의” 성숙한 자유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좋은 것들을 누릴 권리도 있고 능력도 있지만하나님을 더 알기 원한다면내가 하나님이 아닌 어떤 것들로 나의 영적인 배고픔을 채우고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유일하신 공급자 이신 하나님께서 그 갈급함을 채워주시기를 사모함으로 구해야 합니다. 찬양하겠습니다. [목마른 사슴 시냇 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다.
광야는 구약에서 고난과 시험의 장소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랬고
모세도 다윗도 엘리야도 모두 광야에서 고난과 시험의 시간을 견뎠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도 마귀에게 고난과 시험을 당하셨다.
예수님께서 첫번째 마귀의 시험을 받기 전까지 40일간 금식 하셨다.
40은 고난과 시험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금식에서 40일,
애굽의 노예생활 400년
애굽 사람을 죽인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까지 광야 40년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모두 다 고난과 시험을 의미 한다.
그런데, 신약에 들어와서 역사적인 관점에서 광야의 의미가 바뀐다.
로마 식민지로 수탈 당하고
율법주의에 빠져 형식화 된 신앙생활에 한계를 느낀 사람들이
광야로 나와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 당시의 엣세네파이며,
훗날 광야 동굴에서 생활 했던 쿰란 공동체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속화 되고 형식적이 된 신앙과
무너진 신앙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나와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고 영적인 회복과 구원을 꿈꿨다.
성지 순례를 가보면
예수님께서 실제로 시험을 당하셨던 광야가 있다.
허허벌판이 아니고 사실은 산이다.
산에 여기져기 자연동굴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은 신 장소라 하여 교회가 세워져 있다.
예수님에게 광야에서 보낸 40일간의 금식과 세가지 시험은
고난과 시험이기도 했지만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 나라 회복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상반기 사랑방 심방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나눔이 있었다.
어떤 지체가 ‘제 삶은 지금 광야에요'라는 나눔이었다.
그 말은 지금 내 삶이 너무 힘들고 매말라서 은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아마 대부분의 청년들의 삶이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런 고난과 시험으로 가득한 광야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이런 일상으로 부터 벗어나서 수련회에 들어왔다는 것은
이렇게 고난과 시험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이곳에서도 영적인 회복과 구원을 꿈꾸는 희망의 장소로서의
광야를 찾아 온 것이라 믿는다.
이곳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새롭게 되어 나가게 되기를 축복한다.
그러나 몸은 광야로 나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세상에 있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과 만남이 있는 희망의 광야로 나오게 되기를 축복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오늘 본문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마치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것은 상대방을 자극 하는 말이다. 니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한번 증명해 보라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한번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스스로 증명하거나 설명하려고 애쓰신 적이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광야로 나오시기 전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하나님께서 친히 증명하셨다.
이미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것을 마귀가 교묘하게 이용해 예수님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에 아주 철저하게 얽매여 있다.
사람들은 보통 실제 자기 자신 보다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한다.
모리스 와그너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더 센세이션 오브 빙 썸바디)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잘 생겼다면 그 외모에 대한 칭찬을 받아야 만족을 하고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해다면 거기에 타이틀을 달아 주어야 만족하며
내 직업이나 직분에는 칭찬과 보상이 있어야 만족한다.
자기 모습 그대로는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그 이상의 평가와 보상을 받아야 만족하는데,
자기 모습 이상의 자신이 되기를 늘 열망한다.
이것은 마치 2+2=6 이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잘못된 생각이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청년들을 만나보면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간혹 있는데 거의 99%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
1%의 경우도 정말 만족해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기대에 실망을 많이 해서 그냥 만족하기로 결정한 경우다.
내가 되고 싶은 나에게서 항상 모자라고 부족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비교의식과 열등감,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비교의식 없는사람, 열등감 없는 사람, 불안이 없는 사람 있나? 손들어보자.
비교의식 없는 사람, 열등감 없는 사람 없다.
모델을 해도 될정도로 예쁘고, 명문대를 장학생으로 다니면서
학점도 늘 만점을 받는 똑똑한 자매가 있었다.
공부만 잘 하는게 아니라 음악적 재능도 타월하고 집도 부자여서
엄마가 사주신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친구 였는데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까 뭔가 느낌이 이상한 거에요.
그래서 물어 봤습니다.
혹시 내 스스로가 너무 싫어서 울어 본적 있어?
차라리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런 생각 해본적 없어?
그러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면서 우는 거에요.
사실 이 친구의 마음은 탑에 갖힌 공주 같았다.
어려서 부모님이 이혼하시면서 자기때문이라는 상처가 있었고
어디에서도 용납받지 못하는 불안감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실제 모습을 알면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 외모에 신경쓰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더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더 노력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마귀가 예수님과 우리의 바로 이 부분을 시험하고 있다.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면 증명해봐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어봐!
너는 하나님의 아들 다운 능력이 있어?
그렇지 않다면 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지. 넌 아직 멀었어. 넌 자격이 없어. 넌 실패한 메시아야.
우리 원수 마귀는
우리가 수련회에 들어와서 말씀을 듣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하여 이렇게 질문합니다.
너 진짜 하나님 믿는거 맞아? 너 진짜 하나님의 자녀 맞아?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삶은 뭐야? 전혀 그렇지 못하잖아.
놀라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더라도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어? 너에게 상처 준 사람 용서 할 수 있어?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을 위해 너의 꿈 너의 미래, 너의 사랑하는 사람들 다 포기하고 선교 나갈 수 있어?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니가 좋아하는 술, 담배, 여자, 자유로운 주말 이런 것들 다 포기할 수있어?
마귀는 이런 것들로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혼란 스럽게 한다.
주일 성수도 않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술담배 가리지 않고 다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십일조나 주일 봉사는 커녕 후원단체 하나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일주일 내내 말씀 한구절 보지 않고, 기도한번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
평생 한 사람도 전도해본적 없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수 있어?
마귀는 계속 이런 것들로 공격하고 흔들어 놓습니다.
우리의 조건과 행위를 가지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흔들어 놓는 겁니다.
이렇게 몇대 맞고 우리 자신에게 실망하고 나면 이렇게 공격하는 것들에 대한 저항력 자체를 잃어 버립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복음의 놀라운 능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숨기고 교묘하게 공격하려 해도
우리가 마귀의 정체를 알고 나면 마치 방탈출 카페의 비밀을 풀어내듯
숨겨진 진리를 찾을 수 있는데,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ㅇㅇㅇ해봐라 하는 마귀의 말 속에서
우리는 ㅇㅇㅇ 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가 들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 없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마귀에게 증명할 필요가 없으셨던 것 처럼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사람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 처럼
예수님은 노력이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서언해 주신 것이 전부 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들됨을 예수님의 신성이나 예수님의 초인적인 노력에서 찾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낳고 그렇게 선포해 주신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의 절대적인 보증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의 자녀 됨도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조건이나 행위로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한 가지, 믿고 받아 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도 어지간 해서는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의 기대는 저버리기가 힘듭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를 좋은 아빠라고 믿고 있는 자녀들에게는 자상하고 다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 답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의 자리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답게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 처럼 되려고는 노력하지만
예수님 같이 되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노력하시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로 사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 되는데, 하나님의 자녀 처럼 되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가 부터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은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 여러분은 예수님과 다를바가 없는 자녀 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5.
종도 가족으로 대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받으셨습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님이 받으신 첫번째 시험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40일을 금식하며 주리신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은
시험이라기 보다는 아주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권면에 가깝다.
돌들을 떡떵이로 만들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내려가 마트에서 빵을 사먹는 것 보다
광야에서 돌들로 부페를 차려 먹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본문이 참 재미있는 것은
마귀에게 돌들을 떡덩이로 만들 능력이 있었다면
예수님에게 더 강력한 시험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사흘만 굶어도 내 주먹이 빵으로 보인는데,
40일을 금식했으니 진짜 음식이 눈앞에 있었다면 훨씬 더 예수님을 시험하기 더 좋은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는 마귀에게는 속이는 능력은 있지만 창조하고 변형하는 능력은 없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마귀의 시험 목적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적인 자리에 묶어 두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철저한 인간이 되셔야 했기에
이 합리적인 제안을 거절 하셨다.
물론 마귀가 돌이 아니라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면
철저한 인간으로서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순종한 것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마귀의 제안을 전적으로 거절하셨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마귀에게는 돌을 떡으로 만들 능력이 없다.
그런데도 예수님께 돌을 내밀며 떡을 만들어 보라고 한다.
마치 돌에 생명이 있는 것 처럼 말한다.
마귀는 우리에게도
돌을 마치 금덩이인양 떡인 양 굶주린 우리에게 주면서
우리의 행위와 노력으로 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권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 허기진채 살아간다.
아까 했던 자매 이야기를 보면 이 자매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예수님을 만나러 왔던 부자 청년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에 굶주려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로 이 굶주림을 채우려고
조건과 행위에 초점 맞춘다.
세속적인 성공에 중독 된 사람, 돈에 중독 된 사람, 인기에 중독 된 사람, 마약이 아니더라도 알콜에 중독 된 사람, 음식에 중독 된 사람, 성형에 중독 된 사람
연애에 중독 된 사람… 거창 한 것이 아니더라도 작고 소소한 것들까지, 스마트폰, 드라마, 게임, 심지어 네일아트, 타투에 중독 된 사람, 여행, 쇼핑 너무 많다.
이런 것들을 왜 중독이라고 말하느냐?
잠시 잠깐 내적인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게 해주고 행복을 느끼게 해주지만
금새 사라지고 다시 찾지 않으면 현실을 견디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틀딱 같은 소리 처럼 들리는것 잘 안다.
그러나 문자적 경건주의나 권위적인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로 우리의 내면의 입을 틀어 막고 채워 놓고 있으면
시편 42편과 같은 고백은 절대로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돌로 배를 채우고 어떻게 생명의 떡을 구하겠는가?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도 지금 우리와 똑 같았다.
형식적인 종교 생활로, 돈으로, 권력으로, 쾌락으로... 성경은 이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대표적인 것이 헤롯 왕과 제사장 그룹인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이다.
심각하게 돈과 권력과 쾌락에 중독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성가시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잊었다.
중독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자유함이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여전히 자유함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성경은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눈다.
자연인과 신령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이다.
자연인은 아담의 범죄 이후로 육체는 살아 있으나 영이 죽어 있어서 하나님과 단절되어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
이 결과 모든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어두운 마음을 물려받게 되었다.
부정적인 감정은 두려움, 염려(분리됨으로 인한 불안정 애착), 수치, 죄책감(벗은 것에 대한 인식), 우울과 분노(가인의 범죄)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잉태하였다는 말이 원어로는 아담이 하와를 알았다는 표현을 쓴다. 여기서 알았다는 지식은 개인적이고 관계적인 것이다.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시라는 것은. 로고스 곧 진리가 개인적이고 관계적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수 없으나 예수님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을 믿고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적 회복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이 살아 있는 신령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영적인 생명이 회복되고 신분이 변화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죄에 중독되어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전히 육신의 습관에 중독적으로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도 영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안에서의 자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을 따라 살든지 육신에 매여 살든지 그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고 완전한 자유 입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순종하든 안하든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고
자녀에는 갓 태어난 신생아 마냥 자기 마음대로인 사람이 있고, 성장하고 성숙하여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장성한 자녀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이 확실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어떠한 어려움과 장애물이 있든 관계 없이 앞으로 성장하고 성숙할 길만 남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에 가장 위험하고 해가 되는 것이 수동성입니다.
또한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은 성령 안에서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할 수록 성령 충만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행하되 분주함과 조급함의 멍에를 주님 앞에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첫번째 시험의 하이라이트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능력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자유도 있고 능력도 있으셨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자유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성령 안에서의” 성숙한 자유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좋은 것들을 누릴 권리도 있고 능력도 있지만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한다면
내가 하나님이 아닌 어떤 것들로 나의 영적인 배고픔을 채우고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유일하신 공급자 이신 하나님께서
그 갈급함을 채워주시기를 사모함으로 구해야 합니다.
찬양하겠습니다.
[목마른 사슴 시냇 물을 찾아 헤매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