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07 중고] 너는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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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8:18-22
우리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2천년 전에 예수라는 사람이 살다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더라 정도의 차원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사 우리의 부활의 보증이 되셨으며,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되고,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는동안 하나님의 자녀로서 앞서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그분을 닮아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믿음”이라는 것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개념이다. 구원받은 자녀로서 주님을 따르는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그분을 따르는 것,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을 보면, ‘믿음’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19절에 처음 등장한 사람은 서기관이었다. 당시 서기관이라는 직업은 바리새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던 일을 하던 자였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이 얼마나 귀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주님을 쫓아가겠습니다, 참 귀한 고백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본문인 마8:20 말씀을 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거니시던 지역은 야생 여우들이 많았다. 그들은 종종 땅에 굴을 파서 여기서 짐승들을 사냥하기도 하고, 과수원에 많은 피해를 끼치기도 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이런 동물들(여우나 새)도 돌아갈 분명한 거처가 있다는 것이다. 밤에 돌아가서 쉴만한 집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 이는 머물만한 장소가 없으셨다는 의미이다.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명기 말씀을 살펴보아야 한다.
신28장 말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선언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모든 말씀에 순종할 때에 약속된 모든 복이 임하겠지만, 만약 그 말씀에 하나라도 순종하지 않을 시 모든 약속된 복들이 반대로 저주가 되어 이스라엘에게 임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저주들 중 하나가 바로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즉, 머리둘 곳 없는 상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이다.
우리가 배웠다시피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였다. 그리고 아담의 죄는 모든 인류를 부패시켰고, 그 결과 오늘 저와 여러분 역시 내 힘과 내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할 수 없는 상태였다. 죄로 인하여 타락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중 하나라도 제대로 지킬 수 없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서 땅에서 쫓겨나 머리 둘 곳 없이 쫓겨다녀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겪어야 할 그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다. 내가 쫓겨났어야 했지만, 주님이 친히 쫓겨나셨고, 내가 머리 둘 곳없이 방황하는 인생을 살아야 했지만, 주님께서 나 대신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살아가셨다.
요1:10-11 말씀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분명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영광스러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낮고 천한 땅에 내려오셨다. 그러나 자기 백성은 그분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거부하고 있다. 유대민족은 예수를 거부했고, 갈릴리 지역도 주님을 내쫓았으며, 가다라 지역 주민들도 주님이 떠나시길 간청했다. 결국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만들지 않았던가? 주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세상에서 배척 당하셨다.
이어서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중 하나가 등장한다. 그는 예수님 앞에 나아와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청한다. 이 사람의 요청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의 부모는 아직 죽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한글성경 본문 22절 말씀에서는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번역한다. 즉 순서상으로 ‘너는 나를 따르라’ 라는 부분이 가장 뒤에 등장하는데, 헬라어 원어성경에서는 '너는 나를 따르라' 라는 말씀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즉, ‘너는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라는 말씀으로, 일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신다. 즉, 주님을 따르는 것이 다른 어떤 문제들보다 우선시 되고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8-9 장은 예수님의 이적에 대해 집중적으로 기록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중간에 오늘 본문의 말씀이 등장한다. 그리고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하여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한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는가? 주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다. 그 무리들이 너무 많이 몰려 예수님의 사역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이토록 많은 무리들이 몰려든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은 주님께서 나타내시는 권능을 보며 자신들만의 이상과 기대감에 젖어 주님을 따르던 자들이다. 자신의 꿈과 야망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은, 이방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 가운데 내려오셨는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아니 듣고도 관심을 갖지 않으며 헛된 이상과 꿈을 좇아 주님을 따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위에 오르실 때 곁에 서서 한 자리나 차지하고자 하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탐욕에 눈이 먼 자들에게 주님을 믿는 믿음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이다.
당시 예수를 박해하던 대표적인 무리들 중 하나가 서기관이었다. 따라서 본문에 등장하는 서기관의 고백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따르는 자로서 감수해야 할 자기 부인, 희생, 헌신, 순종, 고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저 예수님께서 일으시키는 많은 이적과 권능들만 집중하여 주님을 따를 때에 인생의 성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과연 이 사람들이 바른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주님은 바른 믿음, 곧 주님을 따르는 삶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실까?
주님께서는 막8:34 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셨다.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신의 죄의 정욕들을 날마다 물리쳐야 한다. 요일2:16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말씀하신다.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은 세상에서 말하는 가치관을 따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높이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과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주님을 따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위하여 살아가야 한다. 마6:33 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나의 죄악으로 얼룩진 의를 드러내는 삶은 세상의 것과 다를 바 없다.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은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고 죽이며,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살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오늘날도 많은 이들이 예수 믿으면 복을 받고, 예수 믿으면 성공하고,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된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그렇게 전도를 한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그 말에 혹하여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고, 예수를 믿기 시작한다. 그러나 주님을 좇는 삶은 이와 같이 이 땅에서의 복되고 형통한 삶만을 말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이 땅에서는 더욱 괴롭고 아프고 힘겨운 삶이 될런지도 모른다. 머리 둘 곳 조차 없는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예수를 좇는 삶이 복된 이유는, 잠시 잠깐 반짝하다가 사라져버릴 이 땅의 것들만 바라며 살아가는 인생은 결국 이 땅이 언젠가는 소멸되어 사라져 버리는 그 날, 그가 품었던 그 모든 헛된 소망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날마다 주님을 믿는 참된 믿음 가운데 나를 부인하고, 날마다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사시게 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자들, 세상의 기준으로는 부족하고 모자라고 형편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세상 그 어떤 존재도 끊어낼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의지하여, 영원한 저 하늘나라만을 소망하며 한 걸음씩 걸어가는 그 믿음의 발걸음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이것은 잠시 잠깐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삶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 만을 좇는 삶을 살아갈 때, 때로는 우리에게 선택의 갈림길이 찾아온다. 주님을 좇을 것인가, 당장의 사리사욕을 따를 것인가. 주님을 좇을 것인가 당장의 돈을 따를 것인가. 주님을 좇을 것인가 당장의 죄의 유혹을 따를 것인가. 주님을 좇을 것인가 아니면 잠시 잠깐의 성적을 따를 것인가. 주님을 찾아온 두번째 제자가 그러했다. 그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주님이 아닌 세상을 선택했다. 당장 급하지 않은 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을 버렸다. 주님께서는 22절에서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신다. 그 무엇보다 주님을 좇는 삶, 주님을 따르는 삶, 주님을 닮아가는 삶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주님은 바로 여러분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중요하지 않은 것들 잠시 미뤄두고, 다른 긴급하지 않은 것들 잠시 멈춰두고 지금 너는 나를 따르라'
여러분, 신앙은 어떠한 선택의 갈림길 중에서도 가장 최우선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미련으로 신앙의 길을 뒷전으로 미루고 있다. 그들은 이런 저런 핑계들로 참된 믿음의 길을 가장 뒤로 미루어둔다. 그들은 마치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의 초청에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초청을 거절한 자들과도 같다. 오늘은 바빠서, 시간이 안되서, 좀 더 나중에 따라가겠다는 핑계로 신앙의 길을 뒤로 미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이 결국 맞게 되는 최후는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후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명하신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길이 때로는 여러 불편함이 있고, 손해가 있고, 아픔과 괴로움이 있다 할지라도, 놀라운 이적이나 돈이나 성공이나 번영이나 풍요를 따라가지 말고, 주님은 ’너는 나를 따르라’ 라 부르신다. 우리가 따라가야 할 분은 오직 한분, 예수님 뿐이기 때문이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란다. 그리고 그 부르심 앞에서 담대하게 주님을 선택하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란다. 지금 주님께서 부르시지 않는가? ‘너는 나를 따르라’ 이에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주님 지금은 시험기간이에요. 시험기간 끝나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하겠는가? ‘주님, 지금은 좀 바빠요, 내일 다시 찾아오세요' 라고 말하겠는가? ‘지금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하신다면, 다른 모든 것 재껴두고 ‘예 주님 제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순종하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원한다.
이제 내일부터 중고등부 수련회가 시작된다. 어쩌면 주님의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 대한 여러분들의 결단과 순종이 가장 잘 나타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수련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고, 아울러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여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는 이 자리의 모든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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