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나라

킹덤스토리 해설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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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수요기도회에 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난 주는 임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번주는 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에 어떻게 죄인들이 다가갈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제사제도를 주셨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제사제도를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출애굽기 마지막 부분을 보았습니다.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데 하나님과 대면했던 모세조차도 감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임재하셨지만 죄인인 인간으로서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출애굽기가 끝나고 레위기가 시작됩니다. 출애굽기는 구원과 임재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과연 이 하나님의 임재에 누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마칩니다. 모세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다가가느냐 라는 질문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레위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로 다가와서 예배할 수 있도록 제사제도를 주셨습니다. 레위기의 히브리어 책 제목은 ‘바이크라’입니다. 모세오경의 히브리어 원래 제목은 각 책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에서 따왔습니다. 원문상에서 레위기 1장 1절은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게 히브리어로 바이크라입니다. 이 바이크라는 라틴어로 번역 되었을 때 그 제목이 레비티쿠스가 되었습니다. 레비티쿠스는 라틴어로 레위인에게 속한이런 뜻입니다. 실은 이 책은 레위인 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해당하는 내용인데 제목을 그렇게 붙여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레비티쿠스라는 제목이 영어로 그대로 들어오고 우리나라 말에도 레위기라고 들어왔습니다.
레위기 1장 1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제사제도를 설명하기 위해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부르심은 모세를 불렀지만 동시에 예배자를 부르신 것입니다. 죄인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제사제도를 주시면서 죄인을 예배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지 않으면 죄인들을 불러주시지 않으면 죄인들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셔서 이렇게 나와 교제하라 하고 제사제도를 알려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제사제도는 복잡하고 귀찮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고 또 복음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제물을 불에 태워서 제사를 드리지는 않지만 이 제사에 담긴 의미들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레위기라는 성경을 남겨서 우리가 보게 하셨습니다.
제사 제도는 다섯 개가 있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번제는 태워서 바치는 제사입니다. 번제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올라’인데 올라는 우리나라 말 의미와 똑같습니다. 히브리어 올라는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예물전체를 불살라서 하나님께 그 향기를 올려서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죄에 대한 승리,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보여줍니다.
소제는 곡물로 드리는 제사인데 여기에 기름이나 유향을 넣어서 구워서 전병처럼 만들어서 드립니다. 주로 다른 제사이후에 드립니다. 소제는 히브리어로 ‘민하’라고 하는데 선물을 뜻합니다.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드리는 공물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헌신에 대한 표현도 들어가 있습니다. 소제에는 소금이 포함되는데 이 소금을 언약의 소금이라고 합니다. 헬라인과 아랍인은 약속을 할 때 소금을 먹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소제에 소금을 넣은 것은 하나님께 헌신하되 언약에 근거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헌신은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책임감 있고 지속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화목제는 셜라밈이라고 하는데 셜라밈은 그 어원이 샬롬입니다. 샬롬은 아시는 것처럼 평강이라는 뜻인데, 화목제를 통해서 죄를 용서 받아 하나님과 샬롬을 이루는 상태가 됩니다. 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면 화목제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습니다. 이 죄사함은 굉장히 기쁜 것이기에 화목제는 축제와 같은 분위기로 진행됩니다. 화목제는 제물을 태운 이후에 그 고기를 제사장에게 주고 또 예배자와 이웃이 나눠먹을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 고기는 맛보기가 어려운 고급음식이었습니다. 화목제는 이 음식을 통해 친교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화목제를 드릴 땐 예배자가 먼저 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하는 의식이 있었는데, 자신의 죄를 전가하거나 혹은 제물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화목제로 불태울 때 죄가 불탑니다. 혹은 자기 자신이 불탑니다. 이후에 고기를 나눠먹는 기쁨을 누리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줍니다. 죄 사함 받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어서 이웃을 섬겨서 기쁘게 해야 함을 뜻합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와 이웃간에 화목이 생기고 샬롬이 생깁니다.
속죄제는 원어로 핱타트라고 하는데, 히브리에에서 죄를 뜻하는 하타에서 나온 말합니다. 하타는 부지중에 짓는 죄를 말합니다. 속죄제는 부지중에 짓는 죄를 회개하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는 다른 제사와 달리 제물을 잡아서 피를 뿌리는 의식이 포함됩니다. 예배하는 장소를 정결하게 할 것을 요청합니다. 속죄제는 양이나 소로 해도 되고 비둘기로 해도 되고 매우 가난한 자는 곡식가루로 해도 됩니다. 부한자나 가난한 자나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복음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합니다.
속건제는 배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에 손해를 끼쳤거나 이웃에게 재산상의 피해를 입혔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죄를 짓는 것에 있어서는 알지 못하고 지은 죄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지은 죄에 대한 속죄도 포함합니다.
(적용) 제사가 다섯 가지나 되고 왜 이리 복잡한가 라고 생가할 수 있는데 살펴보신 것처럼 각각의 의미가 다 있습니다. 우리는 제사제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감사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보게 됩니다. 이웃에 대한 헌신과 친교를 보게 됩니다. 제물을 죽여야 죄를 해결하는 것처럼 죄의 참상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보게 됩니다. 반면 복음이 만인에게 얼마나 공평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다섯 가지 제사의 의미를 통해서 우리가 신실한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다섯가지 제사를 그분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예배자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2- 제사 제도는 죄 있는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편이다.
(설명) 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 제사 제도는 죄 있는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에배소서 2장 3절에서는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 자녀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 때문에 아담의 대표성 안에서 함께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아담의 죄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넘어선 죄질이 아주 악한 죄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겠다는 반역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도 아담과 똑같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날 때부터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상태로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갓난아기가 무슨 의지가 있고 무슨 말을 할 줄 알아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우리의 타고난 모든 성향이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도록 태어났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본질적으로 그렇게 태어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죄인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항상 하나님께 저항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는커녕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행복하겠습니까? 창세기 3장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기 시작할 때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은 낙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 낙원 같은 삶을 사는데 낙원 같은 삶에서 멀어지고 척박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라 했습니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했습니다. 원래는 노동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쁨의 사역이었는데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노동은 땀을 흘려야 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극복하며 해야 하는 고통스러움이 더해졌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실제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방해가 되겠지만 이것이 일종의 상징역할도 합니다. 살아갈 때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상징합니다. 이 고통스러움을 피하려고 하다 보니 사람을 속여서 뭔가를 얻으려고 하고 사람에게 부당한 폭력을 가해서 뭔가를 착취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죄가 죄를 낳고 악순환이 악순환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것을 해결할 수 없고 사람은 이 죄문제를 대할 때 끊임없이 죄의 고통에 휘말릴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주신 것이 바로 제사제도입니다. 이 제사를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다시 에덴동산을 경험하도록 하셨습니다. 지난 주에 에덴동산과 성막의 유사성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척박한 광야 한 가운데 에덴동산 같은 성막이 서고 그곳에서 드리는 제사를 통해 죄문제가 해결 받으며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누렸던 교제를 다시금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기 전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자기 뜻대로 헌신해봤자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사제도를 통해 ‘이렇게 하면 내가 기뻐할 것이다. 너희 제사를 받아줄 것이다.’라고 정해주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만유의 주인이신데 소 한 마리 불태운다고 하나님이 그걸 좋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해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소와 양을 잡아서 태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제물을 태우는 걸 좋아하시면 하나님이 아프리카 소떼가 지나갈 때 거기다가 벼락을 내려서 하나님 혼자 좋아하시면 됩니다. 제물을 태우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제도를 정해서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의 눈높이를 맞추신 것입니다.
아까 속죄제 말씀 드렸는데 그거 소 한 번 잡아가지고 제단에 피 좀 뿌린다고 거룩해지는 게 사실은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함을 지니신 분인데 그 피 좀 뿌린다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이 생기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거룩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입니다. 영적인 측면에서 죄인의 손으로 드리는 게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제도에 따라서 이렇게 하면 깨끗하게 해준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이 풍성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제사제도를 정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사제도는 사랑입니다.
(적용) 성막에서의 제사가 사랑이라는 것은 지금 예배에서도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예배라는 방편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완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침에 부부싸움을 해서 마음이 속상해가지고 설교에 집중을 하려 해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토요일 밤에 야근을 하는 바람에 너무 피곤해서 예배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행위 자체는 불완전하지만 하나님께서 예배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를 받아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방법을 통해 아무리 하나님을 알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화성으로 이주계획을 세우고 있는 세계적인 기업가 일론 머스크가 아무리 모든 자원을 모아서 우주 끝으로 간다고 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박사학위를 몇 개를 따도 명상을 수십시간을 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오직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부족할 때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하며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예배 말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중에서 예배에 가장 많은 노력을 들이고 정성을 드리고 마음을 드립니다. 이 방법 말고는 없기 때문에 딴 생각할 수 없고 지각할 수 없습니다. 예배의 모든 순간이 감격이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3- 제사 제도의 의미가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
(설명) 마지막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세 번째 교훈은 제사제도의 의미가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3장 17절에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영원한 규례라고 하는데 그러면 실제로 우리가 화목제를 계속 지켜야 한다는 뜻이겠습니까? 죄 지을 때마다 소 잡고 양잡고 이렇게 해야 합니까? 피와 기름을 먹으면 안 된다고 했으니까 선지국 같은 것을 먹으면 벌 받고 이런 게 있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화목제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 안에서 더 온전한 형태로 적용됩니다. 모양은 사라졌어도 의미는 남아있습니다. 이전의 제사제도는 그림자였지만 제사제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남아있습니다.
제사제도에 어떤 의미가 남아있습니까? 첫 번째로 대리희생의 원리입니다. 구약의 제사제도에는 제물을 잡아서 드렸습니다. 이것은 일시적입니다. 그다음에 죄를 지으면 또 동물을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영원한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동물의 효력은 일시적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효력은 영구적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피의 중요성입니다. 구약성경은 일관적으로 피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피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피는 먹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이외에도 피를 흘리면 그 피를 찾을 것이라 말씀하셨고 애굽을 탈출할 때도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피가 함의하는 중요성은 계속해서 강조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그 의미가 온전히 성취되고 영원히 성취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로부터 정결하게 되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부여됩니다.
구약의 희생제사와 구약이 가지고 있는 피의 의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효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사와 예배의 차이는 여기서 나타납니다. 제사는 일시적인 것을 계속 희생시켜서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예배는 영원한 효력을 지는 것을 믿으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적용) 그래서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모든 제사가 가리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 복음 안에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의 말로 전달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과정은 별로 대단해 보이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냥 말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제사에서 언어로 발전했기 때문에 더 큰 능력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제사는 그 민족의 전통으로 남았지만 이 복음은 전세계로 뻗어나가 지금도 많은 이들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복음이 그냥 말뿐이면 어떻게 전 세계가 복음으로 뒤덮이는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복음이라는 언어 안에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이 있고 보혈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복음은 지금도 역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허황된 이야기로 여기며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복음 안에 능력이 있음을 믿고 복음이 할 일을 기대하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제도를 주셔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제사제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제사제도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셔서 희생하시고 그 피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는 이 원리를 통해 우리가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남은 한 주도 그분의 백성에게 제사제도를 주신 만큼 우리의 예배를 원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한 주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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