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사랑한 그 제자 Ⅱ] 종교적 열심, 믿음의 부재(요4:1-26)

요한복음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33 views
Notes
Transcript
일시 : 2022년 8월 10일 수요일
소제목 : 예수가 사랑한 그 제자 Ⅱ
제목 : 종교적 열심, 믿음의 부재
본문 : 요한복음 4장 1-26절 *신147
결단찬양 : 주는 사랑이십니다
[대표기도]
만유의 주재이신 주님, 우리의 찬양을, 우리의 예배를 오직 주께서 홀로 높임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이 시간 주의 말씀을 듣고자 나아온 이곳에 주의 은혜와 말씀이 충만히 차고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입술을 온전히 주관하사 담대히 말씀만히 선포되게 하옵시고, 듣는 우리에게도 주의 말씀만이 온전히 심겨시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봉독]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4장 1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 중 우리는 13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교독하고자 합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는 신약 147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다 찾으신 줄로 알고 한 절씩 교독하신 후 마지막 26절은 합독하시겠습니다. 제가 먼저 13절 봉독해 올리겠습니다.
[도입]
인간은 유혹에 꽤나 약한 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즐거움에 손 내미는 모습이 우리 삶에 종종 때로는 자주 발견되곤 합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 그 새로움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금방 증발하게 됩니다. 왜 그 즐거움이 우리 안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즐거움과 새로움의 ‘목적’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명확하지 않다보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목적을 통한 설장이 아닌 즐거움이 루즈해지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즐거움을 잃은 삶을 살아내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사역 현장에서도 이런 현상이 발견되곤 합니다. 각자의 달란트대로,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사역을 시작했지만, 그리고 그것이 곧 나의 즐거움이고 기쁨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가 왜 사역을 하고 있지?”의 질문을 시작으러 매순간 지쳐있고 때마다 고난에 허우적 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또한 이유는 동일합니다. ‘목적’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크리스천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압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바로 ‘주를 바라보며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우리의 삶에 목적으로 남겨지지 않을 때, 우리는 매순간 지쳐있으며 또 쳐져있는, 기쁨을 잃어가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마치 교회에서 외치는 소리에 세뇌된 성경적 지식이 습관처럼 나의 몸을 움직이는 것과 같은, 마치 영혼 없는 시체와 같은 삶을 살아내게 될 것입니다.
학업을 위해 1년간 사역을 내려놓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저는 ‘목적이 바로 세워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귀한 과정인가를 배웠습니다. 사역을 할 때에는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목적이 바로 세워져 있었는데, 사역을 내려놓는 순간 주일에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었고, 늦잠 좀 자서 머리 감고 교회가기 어중간하다 싶으면 ‘모자쓰고 가면 되지’라는 안일한 생각 등 많은 부분에서 나태해짐과 동시에 목적을 잃은 신앙 생활을 하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교회는 가고 있고, 말씀 또한 듣고 있고, 나름 내 몸은 열심히 교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정작 내 목적과 신앙의 상태는 열정이 없었던 것이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도 그렇습니다. 분명 무엇인가 열심히 기다리며 찾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무엇인가를 놓치고 살아가는 마치 영혼 없는 시체와 같은 삶을 살아내게 됩니다.
우선 우린 이 사마리아 여인을 바로 앞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와 비교해봄으로 본문을 접근해보고자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니고데모의 다른점]
첫 번째 다른 점은 그들의 성별입니다. 니고데모는 남성인데, 사마리아 여인은 여성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들의 직책이 다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자 당시 잘나가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 출세한 사람이고, 종교적 열심이나 경건에 있어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도덕적으로도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자 겸손했고 점잖은 사람으로서 율법과 신학에 있어서도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는 직책이 상당한 위치에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험난한 인생을 살아온 것으로 보여지는 하층민으로 보여집니다. 그는 어떤 이유에선지 남들과 같이 물을 길러오는 것이 아닌 혼자 길러오는 것으로 보아 친구 하나 없이 외로이 삶을 살아내는, 니고데모에 비해 직책이 상당히 밑에 있는 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는 부족함이란 결코 찾아볼 수 없었지만, 다른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는 충분함이란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달라도 몹시 다른 삶을 그들은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니고데모의 공통점]
그런 그들에게도 두 가지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먼저, 둘 다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3장 2절을 보니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향해,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라고 말하며, “당신이 정말 메시야이십니까?”라 물었고, 4장 25절을 보니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향해,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라고 말하며, 그녀 또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우리게 알게 합니다.
니고데모의 기다림은 그래도 사마리아 여인보다는 조금이지만 신학적으로 접근하여 “로마로부터의 이스라엘 회복”을 위함이었고, 사마리아 여인은 신학적보단 실제적으로 접근하여 “당신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의 부족함을 채워줄” 그러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 속에서 두 번째 공통점이 발견되게 됩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천국 소망이 아닌 ‘이 땅에서의 형통’에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모습을 노진준 목사님께서는 ‘영적이지 않다. 하나님 나라와 예배에 관심은 있지만 영원한 생명과 종말적 관점에 대한 관심은 없는 상태.’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니고데모는 직분과 직책에 있어서는 확실히 큰 차이가 있었지만, 반대로 메시야를 기다리나 그들 모두 이 땅에서의 형통에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실 둘을 굳이 비교할 필요도, 나눌 필요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둘 모두 예수님의 도우심이 절실하게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물론 니고데모의 경우, 예수님께서 유대에 계셨기에 그에게 직접 ‘메시야’이심을 보여주며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다음 행선지와 또 당시 인식과 문화를 생각할 때, ‘사마리아 여인’은 어쩌면 성경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들게 됩니다.
당시 유대와 사마리아는 적대 관계 중 적대 관계였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마리아를 떠나며 앗수르인들이 이곳에 들어와 통혼하였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종교를 그대로 들고옴에 많은 이들로하여금 소위 ‘잡종’의 이미지를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순수 혈통이 중요시 하던 문화 속에서 ‘잡종’으로 살아나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주변으로부터의 무시와 비난, 눈총 등. 그리고 그런 시선을 받아들이는 사마리아 또한 유대인들을 향한 경계와 분노가 차고 넘쳤을 것입니다. (지도) 그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를 거쳐 가기보다 요단강을 건너 옆으로 넘어가 삥 돌아 갈릴리로 가게 되는 것이 통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4절을 보니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4절에서 기록된 ‘-하여야 하겠다’는 표현은 원어로 볼 때 지리적으로 반드시 나아가야 했기에 나아간 것이 아닌,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에 반드시 따라 행해야 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중 과정이었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중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다는 말씀에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음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해 일부로 우회한 것이라는 시각은 우리게 위험한 발상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경우 “하나님의 계획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착각을 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여진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나 그 계획 중에 ‘나’를 만나 주신다고 바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로는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이 내 계획을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기보단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나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며, 날마다 그 기쁨이 차고 넘치길 소망합니다.
[그녀는 죄인인가?]
이제 그 여인은 여섯 시쯤, 우리나라 시각으로 정오쯤 되었을 때, 해가 가장 높이 떠 가장 뜨거울 때 물을 길러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D.A.카슨은 7절과 8절이 연결되어 기록된 것을 보아 통상적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물을 길러오게 했을 것인데, 그들이 먹을 것을 사러 사마리아 동네로 들어갔기에 직접 물을 길러 나아가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른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제약에 구애받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기록합니다.
제자들은 없고,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녀와의 대화가 예수님을 통해 오고 갑니다.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 조금 나눠봅시다. 그녀는 낮 12시의 시간대를 택해 사람들을 피해다녔습니다. 또 남편도 5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는 우리의 인식에 있어 어떤 인물로 비춰집니까? 악한 자, 죄인의 이미지가 그녀의 이미지 아닙니까?
그런데 당시 문화를 볼 때, 정말 그녀가 죄인인가? 그렇게 주변 사람들로부터 몹쓸 짓을 많이 한 나쁜 여인인가 라는 것입니다. 당시 사별하거나 이혼한 여성을 향해 반드시 죄인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혼의 과정 속에서 여성은 한 마디도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남자가 이혼의 결정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즉, 이 사마리아 여인은 다섯 번이나 버림받은 아주 불쌍한 여인 아니겠습니까?
본문을 볼 때, 그녀가 추한 여인이라는 사실이, 몹쓸 짓과 죄악이 가득한 여인이라는 사실이 어디에 기록되어져 있습니까? 결코 우리는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없지만, 그저 지레 짐작하며 ‘그녀는 죄인이야.’ ‘그녀는 추하고 품행이 좋지 못한 여인이야.’라고 인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그녀는 우리와 같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죄인이기에 예수님이 필요하거나, 덜 죄인이니 예수님을 덜 필요로하는 것이 아닌, 그저 우리는 평범하나 사회적으로 조금 더 악하나 모두에게 예수님은 필요한 존재가 됨을 어쩌면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참으로 착각을 잘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내 중심으로 움직인다 생각하며, 또 나는 쟤보다는 착하기에 조금 더 선한 자라는 착각을 하곤 합니다. 나와 내 주변의 사람과 비교하여 누가 더 잘났고 못났네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우리 시선에 사마리아 여인은 죄인처럼 그려져왔지만, 막상 보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물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그녀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날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반드시 붙잡고 바라보아야 할 분이 되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말씀을 가지고 기도할 때, 나의 나됨을 드러내기보단 온전히 하나님만을 보시며 기도하는 시간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선물과 사마리아 여인이 바란 선물]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그녀는 꽤나 많이 지쳐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물을 길러야 삶을 이어갈 수 있기에 그 무거운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리고 발걸음 한 곳에는 낯선 한 남자가 앉아 있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다섯 번의 버림을 통해 낯선 남자를 통한 설렘보단 치가 떨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말 걸지 않고 조용히 지나갔음 좋겠다는 바램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램은 결코 길지 않았습니다. 낯선 남자가 말을 걸었고, 그 말은 곧 “나에게 물을 달라”는 것이 었습니다. 이에 여인의 반응은 9절을 통해 보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학자 리델보스는 이 구절을 “사마리아 여인인 내가 어찌 유대인인 당신에게 물을 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이라기보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왜 사마리아 여인인 내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라 대답하는, 즉 유대인이라면 차라리 목말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마리아인에게 어찌 물을 달라하냐, 당신은 자존심도 없습니까? 식의 늬앙스가 담긴 대답이라 해석합니다.
어쩌면 그런 늬앙스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대인들만큼 사마리아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유대인의 그러한 행동이 결코 정당하며 합당하다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10절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녀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지금 이 시점 필요한 선물이 무엇입니까? 다시는 혼자 12시에, 가장 햇볕이 강한 이 시간에 물을 길러오지 않아도 될 샘을 발견하게 하는 것, 그런 시냇가가 차라리 생겨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선물은 사마리아 여인이 바라는 선물과는 달랐습니다. 14절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지금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현장에서 듣게 하셨다면, 어쩌면 우리는 아멘으로 화답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우리게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고 기쁨입니까? 그러나 여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15절입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전히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에 핵심이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당장 우리가 들었다면 아멘이라 화답했을 것인데, 어째서 그녀는 동문서답과 같은 내용의 답변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눈 앞에 놓여진 현실적 문제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한 것이지요. 분명 그녀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을 것인데, 시간이 지나고 삶을 살아내다보니 자신에게 처한 삶이 너무 고달파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 날 아멘이라 화답하는 우리에게 없을 것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 말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벅찬 세상인 것 같습니다. 내게 주어진 일과와 문제들을 떨쳐내기에 급급합니다.
우리의 사역도 그렇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이었을텐데 하루 하루 사역함에 벅참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벅참과 지침이 사역을 멈추게 합니다. 물론 사역을 잠시 쉬는 것이 악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저 영원히 사역을 내려놓는 것이 어쩌면 위험할 수 있다 보는 것입니다.
삶이든, 사역이든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주목하며 살아낼 때, 정작 지켜야 할 목적을 놓치고 살아낼 때 우리는 기쁨없는 종교적 열심을 취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뿐 아니라 오늘 날 눈에 보이는 것만 따라가다 정작 하나님 나라를 놓치는 우리를 향하여 “이제 거기서 눈을 떼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이나 종교적 열심을 보인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의 열심에 중심이 ‘나’였다는 것이지요. 그들 모두 메시야를 기다려왔고, 또 신학적으로 실제적으로의 메시야 도움을 요구했지만, 그 또한 모두 중심은 ‘나’였습니다. 둘 다 ‘하나님 나라’를 보는 시야가 부족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종교적으로의 열심은 보이지만, 그 중심이 내가 될 때가 있지 않으십니까? 이 땅의 것을 바라보느라 하나님 나라를 놓치는, 종교적 열심에 심취하여 정작 우리의 믿음이 부재한 상황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물론 이 땅에서의 것들이 무의미 하다. 부질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쓸데없으니 떼어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가운데 살다가 다시 교회로 나아오는 왔다 갔다하는 삶이 결코 경건하지 않다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믿음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라면, 보이는 것, 잡히는 것, 느껴지는 것에만 집착하고 붙잡을 것이 아니라 때와 상황 속에서 내가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제목]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만 붙잡고 집착함이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자가 되게 하소서.
종교적으로 열심이기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열심이 되는 사역과 삶이 되게 하소서.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