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라 에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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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개관

할렐루야 오늘 <열려라 에바다>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말씀에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 가운데 묶여 있고 눌려 있고 닫혀 있는 모든 답답함들이 활짝 열리는 은혜의 시간 되기를 간절히 축언합니다.
오늘 보문에는
귀먹고 말더듬는 이방인이 한 사람 등장합니다.
왜 이방인이라고 단정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당시에 갈릴리 북쪽의 이방땅을 다니시면서 복음은 전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귀가 먹고 말을 더듬으면 얼마나 답답하고 불편했겠습니까?

답답함의 괴로움

얼마전에 노량진교회 동산으로 청년부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수련회를 준비하는 과정에 참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코로나가 재확산되는 상황도 큰 어려움이었고
상황이 이러니 청년들이 얼마나 참여할 수 있을지도 알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노량진 동산도 코로나 기간동안 활용을 잘 못하다가
수련회를 진행하려니까 손봐야 할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답사를 몇번을 갔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큰 일을 하려고 하면 늘 관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서로 의견이 않맞고 일하는 스타일이 안맞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수련회를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한것은 결국 영적싸움 아닙니까?
무엇보다 청년들이 회복되고 변화되야 하는 것입니다.
몸이 좀 고생하면 해결되는 일들도 있지만 한 영혼이 회복되고 변화되는 일은 열심과 노력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치열한 영적 싸움이 있고, 이 싸움을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영적인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깨어 있으려고 두달에 걸처서 40일 정도를 작정하고 저녁을 금식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나 사람이 참 연약한 것이
수련회를 몇주 남겨 놓고 한쪽 귀에 돌발성 난청이 온겁니다.
갑자기 한쪽귀에서 이명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귀가 먹먹해지면서 잘 들리지가 않는 거에요.
잘 쉬면 낫겠지 했는데, 나아지지가 않아서 결국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더니 “돌발성 난청”이라는 거에요.
귀가 두갠데 한쪽이 잘 들리면 됐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먹먹하고 잘 들리지가 않으니까 불편하기도 하고, 일은 많은데 이명 때문에 집중도 잘 안되고, 무엇보다 마음이 상심이 되고 낙심이 되니까
일이 손에 안잡히고… 속상하니까 눈물이 나더라구요.
그래도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다행히 약을 먹으면서 일주일을 잘 견디고 나니까 상태가 많이 호전 되고 이명도 사라져서 지금은 괜찮아졌기 때문이입니다.
덕분에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더 깊이 공감하면서 묵상할 수 있어서 참 감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방인은
귀만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도 더듬는 것으로 봐서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청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고 그로 인해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이 무너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잠시 돌발성 난청으로 잠시 고생하면서도 그렇게 눈물날 정도로 답답하고 힘들었는데,
이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날들을 보냈겠습니까?

예수님의 처방

예수님은 이 사람을 보시고 33절 말씀에 그 사람을 무리가 없는 곳으로 따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고 그를 치료하시는데 참 독특한 방법으로 하십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쪽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바다! 열려라!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하게 되었다는 거에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엄히 경고 하시기를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럴 수록 사람들은 더 널리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했던 유대인들과는 달리 이방인들의 반응은 정말 폭발적이었습니다.
3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모든 것을 잘 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이방인들이 얼마나 이런 메시야의 구원 사역에 목말라 있었는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숨기려 하셔도 이방 땅에서는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모했고 구원에 목말라 했습니다.

우리의 답답함

그런데 우리에게도 이런 답답함과 목마름이 있지 않습니까?
귀가 먹고 말 못하는 답답함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못듣고 못말하는 답답함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이방인을 향해서 에바다! 라고 선포하실때
에바다는 단순히 귀가 열리고 말이 열리라는 치유와 회복의 선언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 에바다라는 단어는 수동형으로 열려지다는 의미로
장애물들이 치워지고 열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방해하는 세력을 향해 물러서라는 의미의 선전포고가 되기도 합니다.
그의 귀를 막고 말문을 막고 있는 세력들을 향해 물러서라 명령하는 선전포고 인 것입니다.
사람의 귀를 막고 진리를 듣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하고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게 하고
그래서 진리를 말하지 못하고, 은혜를 고백하지도 못해서
메마르게 하고 답답하게 하고 고립되어 영적으로 시들어 죽게 만드는
영적인 싸움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에바다! 라고 선포할때는
못듣고 못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못듣고 못말하는 영적인 상태를 깨뜨리고 회복하는 영적 싸움의 선포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내 몸의 상태는 불편함도 느끼고 고통도 느낍니다.
그래서 불편하고
힘들면 저처럼 병원도 찾아가고 치료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영적인 상태는 어떻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불편하고 힘들어도 큰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췌장암 같은 암이 무서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증상이 눈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더 치명적이고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예수님을 만난 이방인의 상태를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상태도 진단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매주 주일 말씀을 들으시지요?
말씀이 들리십니까?
말씀이 들리지 않는 증상을 대수롭지 않게 방치 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여러분 기도하시면서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계십니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계세요?
그게 아니라면 그 증상을 절대로 대수롭지 않게 방치하면 안됩니다.
왜 안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영이 목말라 시들어 죽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이 시들어 버리면 당장 죽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인 생명이 시들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바뀌어 버립니다.
더이상 영적인 생명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변화가 말입니다.
사랑하고 축복하는 말이 더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비판하고 비난하는 말, 미워하고 시기하는 말, 비교하고 판단하는 말
말 그대로 죽이는 말들이 나옵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영적인 카나라아와 같습니다.
옛날에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은 막장에 일하러 들어갈때 카나리아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카나리아들이 지하에서 나오는 유독가스에 사람보다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경보장치 같은 거였습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우리의 영적인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영적인 카나리아와 같습니다.
영적인 귀가 막히면 영적인 언어도 막힙니다.
은혜를 나누고 싶어도 은혜가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괴롭겠습니까?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음성이 잘 들리십니까? 마음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이 있습니까?
영적인 언어가 잘 열려 있습니까?

회복의 길

우리가 영적으로 시들어 있을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수님의 개인적인 부르심에 사모함으로 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이 이방인을 개인적으로 따로 부르시지 않습니까?
귀에 손을 넣으시고 침을 뱉어 혀에 손을 대신 것 처럼
우리의 수치스러운 부분 주님 앞에 정직하게 드러내게 하십니다.
자세를 상상해 보세요. 무릎꿇고 입을 벌려야 합니다.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자세 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주님 앞에 무릎꿇고 은혜를 구하는 것은 절대로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고 은혜로운 말이 나오지 않는 영적인 메마름이 연약함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육체를 따라 세속적으로 계속해서 사는 것이 훨씬 더 부끄러운 일입니다.
몇일 전 TV를 보다가 7년동안 나는 자연인이다 라는 프로그램을 7년동안 진행한 개그맨 이승윤씨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나는 자연인이다는 분주한 현대 사회를 떠나 산간 오지에서 자연속에서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을 찾아가 인터뷰 하는 프로그램인데
이 프로그램의 백미가 뭐냐하면 자연인들이 먹는 아주 독특한 레시피의 음식을 진행자가 함께하는 장면이다.
개구리 된장찌게, 귀뚜라미 요리, 짱돌찌게 이런 요리들이 나오는데
이승윤씨가 이것들을 먹으면서 깨달은게 있다는 거에요.
처음에는 이런것들을 먹으면서 아이고 더럽다 흙뭍은 손을 저렇게 만든 음식을 어떻게 먹나.
이랬는데, 놀라운 것은 7년 동안 자연인들이 주는 음식들을 먹으면서 한번도 탈이 난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도시에서 술먹고 고기먹고 하면서 탈 난적은 있어도 자연인이 주는 밥먹고 탈난적이 없구나.
더러운 돈 만지는 내 손이 더 더럽지 흙묻은 자연인 손이 더러운게 아니구나.
둘이 손잡고 악수 할때 오히려 자연인이 더 기분이 나빠야 하는 것이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영적인 생명을 얻기 위해 언제 어디서든 겸손히 무릎 꿇고, 눈물로 간구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영적인 생명 없이 사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모르긴 몰라도 개중에는
목사님 참 긍정적이시네요. 제가 안해본 줄 아세요?
그동안 들으려고도 해봤고 집중하려고도 해봤습니다.
그랬는데도 들리지도 않고 집중도 안됩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회복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냐 아니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광복절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독립과 관련된 영화들을 소개하는 영상이 여기저기서 자주 나오더라구요.
그 중에 암살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광복 직전에 독립군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데,
거기서 이정재 배우가 독립군을 배신한 이중첩자로 나옵니다.
독립이 되고나서 이정재 배우가 이중첩자로 활동한 것이 밝혀져서 재판을 받는데
그 장면이 암살이라는 영화의 아주 명장면입니다.
이정재 배우가 여기저기 독립운동하면서 다친 총알 자국, 고문당한 흔적들을 보여 주면서
자신은 애국자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왜 독립군을 배반했느냐는 물음에 이정재 배우가 아주 인상적인 대답을 합니다.
이렇게 빨리 독립이 올 줄 몰랐으니까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을때 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갈망했지만
정작 8월 15일에 독립이 선언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립이 정말 이렇게 빨리 올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주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고립되어서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들을 수도 말할 수 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독립을 기대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땠습니까? 광복이 오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영적인 상황도 마찬가지 입니다.
영적인 수치심과 죄책감 뒤에 숨지 말고
내가 최근까지 아무리 하나님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고
마음에 은혜가 없고
육체를 따라 살고 있다 하더라도
주님의 개인적인 부르심 앞에 정직하게 나와
무릎으로 은혜를 구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34절 말씀, 하늘을 우러러 탄신하신 것 처럼
우리의 답답함과 연약함 긍휼히 여기시고 고쳐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뻐하기만 하면 됩니다.

결론

오늘 본문에서 이방인들이 이 치유의 소식을 듣고 심히 놀라며 찬양하지 않습니까?
치유받고 자유해진 사람은
기쁨과 즐거움이 회복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회복이
여러분의 예배의 자리에, 개인적인 기도의 자리에
또한 다가오는 산상집회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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