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의롭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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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
1. 도입
2.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믿으십시오.
2.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믿으십시오.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바울은 창세기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만나 하늘의 별처럼 셀수 없는 자손을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아브람은 나이 많은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런 노인에게 앞으로 수 많은 자녀를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아브라함을 의롭다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의롭게 한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믿음에 대해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믿음이란,
첫째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우리의 경험으로나 과학적인 사고로 이해가 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외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 명령할 때,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고 손을 들어 이삭을 죽이려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100가 넘어서 얻은 유일한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외 아들 이삭을 통해서 수 많은 자손을 주신다는 믿음이 견고 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이삭이 죽더라도 하나님은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 확신 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 처럼 부르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른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아는 언어로 다시 말하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 입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 하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창세기일장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부터 이 물리적인 세상을 창조 하셨습니다. 죽은 몸 같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 같은 자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믿음과 “의"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의"란 무엇입니까? 원어로는 “디카이오"라고 하고 , 모든 영어 번역에서는 “righteousness” 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정리 하면 “의"란 “옳음", “정당함"이라는 뜻입니다. 이 “의"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법적으로 정당함"이란 뜻입니다. 즉, 제가 무슨 범죄를 저질렀다고 고소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법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판사가 저의 행동은 정당하다" 판결합니다. 다시 말해서 죄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의"란 법정 용어로 “죄가 없음, 정당함, 옳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의미는 의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의사는 환자를 성심껏 온 노력을 기울여서 치료를 하는 것이 의사의 “의"입니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 그것이 “의"입니다. 선생은 열심히 수업 준비하고 학생을 잘 가르치는 것 그것이 “의"입니다.
이 번 수해때에도 어김없이 의인들이 등장했습니다. 반 지하에 갇혀 죽음의 위험에 놓여 있는 한 청년을 동네 모든 주민들이 비에 흠뻑 젖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어떤 이는 온 힘을 들여 창문을 깨려 하고 또 다른 이는 연장을 찾아오고 그리고 그 중에 천정까지 차 오르는 물에 떠 있는 청년을 안심시키고자 어떤 이는 용기의 말을 전했습니다. 이런 이들의 행동을 의로운 행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의인들이라 부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땅히 사람이라면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의 목숨을 구해야 한는 것이 옳은 행동 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옳은 행동이 바로 의 입니다.
비록 “의"에 대한 해석이 이 두가지로 나뉘지지만, 중요한 공통적인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의로움이란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사의 의로운 행동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바로 환자입니다. 그럼, 선생의 의로운 행동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학생입니다. 이 처럼, 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의"를 논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다시 오늘 본문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여기서 아브라함의 “의"의 대상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대표 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의롭다 여겨진 바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로운 행위를 했다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여겨졌다 라고 표현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아브라함은 어떤 의로운 행위를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그냥 의롭다 여겨 주셨다는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은 어떤 행위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오직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그 것을 믿어 의롭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졌듯이, 우리들도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것을 믿어 의롭게 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게 여기신 이유에 대해서 바울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 바로 아브라함 때에는 그 땅에 없던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게 여기시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한 마디로 없는 것을 있는 것 처럼 부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수 천년 전 아브라함 시대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우리들을 이미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보이셨던 은혜를 따라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주시고 계십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의롭게 여기십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3.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으로 부터 의롭다 함을 여겨지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셨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셨을까요?
2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음으로 부터 부활시키셨습니다. 즉,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 주시고, 부활시키셨습니다. 아멘?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굳이 의롭게 여기시고자 예수님을 죽이시고 부활시키셨을까요?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은혜"라고 말합니다. 4 5절을 보겠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은혜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의로운 행위를 하지 않았는데,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 범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이 것을 우리 기독교의 복음이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믿음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이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믿어 의롭게 되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멘!
눈치 채셨는지 모르겠는데, 항상 이 복음을 기억하기 위해서 설교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과 관련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시작되고 끝날 때에 우리에게 남아 있어야 하는 유일한 기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입니다. 기타 다른 교훈들은 곁가지에 불과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리고 특히 부활하심을 떠나서 우리는 결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박옥수 같은 구원파 이단들과 기타 거짓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은 교묘하게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합니다. 박옥수 같은 사람들은 “죄사함"에 촛점을 맞춥니다. “부활”에 복음의 촛점을 두지 않고 “죄"에 복음의 촛점을 둡니다. 매우 교묘하게 복음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리라", 또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이라고 분명히 오늘 본문에서 복음에 대해서 확실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기독교를 옷 입은 이들은 “마음의 위로"를 기독교의 복음으로 강조 합니다.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믿음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 의롭다 함을 얻을 확실한 이 복음을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이 바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