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관하여(2022년 청년부 수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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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 관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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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 대한 오해 풀기

코로나가 지속되면서 결혼을 미루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런데 미루는 정도가 아니라, 계속되는 경제 위기와 삶의 불안으로 인해서 결혼을 포기하는 일까지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코로나 이전에도 매년 혼인건수는 감소하고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서 가속이 붙어버린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에서의 문제만은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 일반적인 결혼의 동기
사랑의 실현 -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기 때문
성적 욕구의 충족 - 결혼관계가 아니어도 성적 욕구는 충족될 수 있으나, 결혼이라는 사회제도 안에서 남녀는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법으로 보호를 받는 성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상대에 대한 성적 독점성과 다른 성적 관계에 대한 배타성을 하나의 권리로 인정받는다.
부모됨의 성취 - 성행위는 자녀 생산을 목적으로 한다. 자녀를 얻고 부모가 된다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중요한 목표가 된다. 현대에서는 자녀 출산이라는 동기가 약화되어 가지만, 여전히 결혼을 통해 자녀 출산을 이루려고 한다.
정서적 경제적 안정 - 배우자를 통해서 자신에 대한 이해와 정서적 뒷받침을 통해 감정적인 안정을 얻고, 배우자와 함께 재정을 관리하면서 자산 증식과 합리적 소비활동을 통해서 안정을 얻게 된다.
성인으로의 신분 획득 - 미성년자도 혼인하게 되면 법적으로 성인으로 인정하며 독립된 존재로의 신분을 얻는다.
주변과 사회적 기대의 부합 - 나이가 차면 사회적 기대로 인해서 결혼에 대한 압력을 받게 된다.
※ 부정적인 결혼의 동기
혼전 임신, 순간적인 열정 또는 욕정, 외로움에서의 도피, 신분 상승의 수단, 헤어진 사람에 대한 복수, 부모로부터의 도피, 상대방에 대한 동정심, 불행한 가정환경에서의 탈출
그러면 왜 젊은이들은 점차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가?
전문가들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생각한다.
첫째, 경제적 이유
둘째, 개인주의
결혼을 선택하는데, 경제적인 이유가 걸림돌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상 욕심 때문이 아닌가?
결혼에서 개인주의는 왜 문제가 되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개인의 만족 추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결혼도 개인적인 만족을 위한 수단 정도로만 여긴다.
결혼을 통해서 연합을 이루고 우리라는 공동체를 이룬다는 개념은 점차 사라지고, 공동체라는 특징을 가진 결혼이 개인적인 만족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주권적 자아”라는 개념이 현대 사회를 주도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 겨울왕국의 주제곡
모아나를 향해서 할머니가 하는 질문 “너는 누구일까?”
할머니는 모아나에게 마음속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이 참자아라고 가르쳐준다.
과거처럼 개인적인 욕망을 가족과 이웃을 위한 선으로 승화시키던 것과 달리 현대는 우리의 개인적인 욕망을 주장하고 그것을 성취할 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는다.
이런 생각은 배우자와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해야 하는 결혼의 위대한 가치와 상충된다.
※ 온라인과 현실의 차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는가?
과거 싸이월드가 유행을 했을 때, 사람들은 온라인이라는 가공의 세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채색해서 드러내려고 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나 쇼츠가 유행하는 것도 그 맥락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가족과 친구와 부대끼는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는 자신과 온라인에서 채색해서 만든 자신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인가?
결혼은 배우자와 부대끼는 과정을 통해서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가는 과정이고, 배우자와 함께 성장해가는 과정을 만드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었다.
결혼을 통해서 나라는 존재를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실제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이 목표로 삼았던 자아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한 욕망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욕망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성관계에 대한 바른 인식

남녀의 성관계는 사적인 영역인가?
혼외 관계에서의 사생아, 성병, 인격적 관계가 아닌 쾌락의 도구로 여기는 인식 등과 같은 것들은 남녀의 성관계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려준다.
※ 성관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
과거에는 혼인 관계에서만 성관계가 가능했는데,
오늘날은 언제든지 성관계가 가능해졌다.
언제든지 아무나와 성관계를 갖는 것이 진정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택이 될 수 있는가?
1)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성관계
2) 나를 알고는 있으나 거부하는 사람과의 성관계
3) 나를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며, 나의 약점까지도 알면서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성관계
※ 성경적 성윤리
남녀의 성관계는 헌신의 상징이자 수단이며,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몸을 내어준다면, 평생의 삶 전체를 서로가 공유하며, 존경과 사랑으로 상대를 대하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 이러한 개념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성관계가 현대 사회의 성윤리를 파괴하였다.
서로의 삶을 주고 받으며 전인격을 나누는 도구로서의 성관계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혼인언약을 통해서 서로에게 매이게 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배우자 선택인가? 욕망의 실현인가?

배우자의 선택 기준은 무엇인가?
성격을 보통은 우선순위에서 언급하지만,
한 두 번으로 그 사람의 성격을 다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 보통 결혼을 전제로 사람을 정한다고 할 때, 키, 얼굴, 외모, 체형, 몸무게, 직업, 재력, 특기 등이 선택의 기준이 된다.
이런 식으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쇼핑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자신이 선택 기준에서 이탈하게 될 때, 결혼관계가 위태롭게 된다.

결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

결혼이라는 제도는 분명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아서 돕는 배필을 지으셨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꼭 맞는 존재를 지으셨다.
그런데 배필이라는 단어의 원문을 직역하면, “그와 같으면서도 정반대인”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모순처럼 생각될수도 있는데, 마치 퍼즐의 짝을 생각하면 된다.
두 짝이 맞으려면, 서로 똑같아서는 안 되고, 그 특성이 달라서도 안 된다. 이것은 둘이 서로 보완적이면서도 일치하는 특성을 가진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지만, 같은 목적을 향한다. 이것이 돕는 배필의 성경적인 의미이다.
게다가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리고 오실 때의 장면을 생각해보라. 창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에게 하와를 넘겨 주는 최초의 역할을 하나님께서 직접하셨다. 마치 신랑에게 신부를 넘겨주는 신부의 아버지처럼~
결국, 결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들은 다시 되돌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
결혼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에게 있지 않다.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는 것이 결혼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즉, 결혼을 통해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도 못하고, 진정한 의미도 찾지 못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이유를 갖게 된다.
그렇다고 결혼을 통해서 자신이나 배우자의 행복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부부의 행복은 결혼의 당연한 결과여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야 한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과 승인을 확신할 만한 결혼을 하게 할 정당한 이유 없이 정욕이나 성급함으로 결혼하지 않게 주의하라.
대부분의 정욕은 순간적이지 영속적이지 않다.
부모의 동의를 얻어서 결혼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동의는 더욱 필요하다. 그래서 여러가지 면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결혼을 허락하셨는지를 살펴야 한다.
특히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더 구할 수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이것은 나혼자만의 생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배우자가 될 사람과 함께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 시각으로 살펴보고 서로가 상대에게 신앙의 걸림돌이 될지, 돕는 배필이 될지를 잘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이 결혼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결혼을 통해서 가족 전체가 하나님께 헌신하며 거룩한 상태가 되어 가기를 소망하며 힘써야 한다. 그 이외의 목적들은 부수적인 것인데, 부수적인 것을 궁극적인 목적과 바꿔버리면, 부수적인 것들로 인해서 결혼 자체가 불신앙의 표현이 되버린다.
배우자 선택의 보편적 기준
첫째, 기독교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과 하기.
우리 입장에서 개혁신앙을 사는 사람이 배우자로 고민된다면 신앙적인 면에서는 큰 고민이 필요없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상대적으로 너무 적다. 그래서 적어도 기독교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데 매우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소통이다. 서로 말이 통하고, 마음을 털어놓고, 상대를 이해하고, 같은 소망을 품어야 하는데,
신앙이 없거나 다르다면, 그 배우자는 신앙생활의 돕는 자가 아니라, 분명히 걸림돌이 될 것이다.
신앙생활을 조건으로 결혼을 약속한다면, 그것은 정서적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둘째, 겉으로 보이는 매력으로 판단하지 말라.
외형은 노력하면서 가꿀 수 있다. 외적인 것이 선택의 기준이 될 때, 젊음을 지나 노년에 이르게 될 때는 그 결혼관계가 사랑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이어지거나 깨는 결과를 가져온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배우자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
남자는 여자의 성숙한 삶의 자세를 바라보고,
여자는 남자의 신앙과 삶의 지도력을 바라봐야 한다.
내면적 아름다움은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지속 가능하고, 오히려 더 발전 가능하다.
백스터의 표현 “황금으로 된 여물통 때문에 돼지와 결혼하지 말고, 멋진 육체 때문에 추한 영혼과 결혼하지 말라”
셋째, 자신의 시각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주위 사람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라.
콩깍지가 씌인 상태에서의 판단은 온전하지 못하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의 조언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자 한다면, 자신과 예비 배우자를 모두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특히 오늘날처럼 온라인에서 관계를 형성하는 시대에서는 주위 사람들의 조언을 듣는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렇기에 결혼을 준비한다면, 상대와 함께 신뢰할 수 있는 주위 사람을 자주 만나도록 자리를 만들고, 타인의 시각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을 두도록 해야 한다.
넷째, 결혼할 상대와 그 가족 전부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상대 가족에 어떤 결핍이나 문제가 있으면 결혼을 바로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결핍이나 문제가 있어도 품고 함께 해결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오히려 결핍과 문제는 배우자를 사랑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보통 결혼을 생각할 때, 당사자들은 자신들만 바라볼 뿐, 그 너머를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 가족의 분위기와 신앙, 경제적인 상황과 가족문화를 미리 살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부부의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고, 걸림돌이 되거나 부부 사이의 갈등을 만들기도 한다.
단순히 사랑이라는 것으로 그것을 다 이겨낼 것이라는 상상과 자만을 버리고, 그 모든 것을 함께 살피면서 이해와 공감 속에서 다가가야 한다. 결혼은 생각보다 더 현실이다.
다섯째, 결혼할만큼 사랑하는 감정이 생긴다면, 때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된다.
정욕적이고, 순간의 감정에 의한 사랑을 따라서 결혼을 하게 되면, 후회하는 일이 많다.
사랑은 감정을 무시할수는 없으나, 결혼은 현실이기에, 결혼을 위한 사랑은 합리성을 가져야 한다.
상대와 항상 함께 있으면,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정욕이나 불타는 감정에 지배를 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때로 약간의 거리를 두면서 불타는 감정을 다스리며 합리성을 동반한 사랑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여섯째, 상대가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잘 살펴보라.
사랑하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이 사람의 당연한 이치이다.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잘 살펴봐야 한다.
상대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와 교회와 목사를 사랑하는지를 살피라. 이것을 사랑한다면, 경건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이러한 것이 아닌 세속적인 것을 사랑한다면 경건을 힘쓰도록 권면하고 거룩한 것을 사랑하도록 안내해보고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미련을 남기지 말라.
일곱째, 불신자와 결혼을 생각하거나, 참된 믿음과 거리가 먼 신앙인을 만나서 결혼할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라.
자신이 상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역으로 그 상대가 당신을 경건하지 않은 상태가 되도록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변화시켜주실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배우자로 생각하는 그 사람에게 그러한 은혜가 나타날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그러한 생각은 신앙적이라고 표현하기보다 요행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생을 도박하듯이 확률로 접근하지 말라.
독신은 결혼보다 못한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7 장에서 독신에 대한 내용을 언급한다.
바울의 논점은 에베소서에서 남편과 아내를 그리스도와 교회로 설명하던 아름다움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전통적인 개념에서 독신은 결혼보다 못하다.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자녀를 얻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자녀가 없다는 것은 상속이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상속이 없다면 미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남자같은 경우 성적 욕구로 인한 범죄가 발생하기가 쉽다.
그런데 바울은 고전7 32-34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에서 독신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좋은 조건이며 결혼보다 낫다는 평가를 한다.
바울이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자녀를 낳아서 유산을 물려준다는 상속의 개념이 미래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의 자녀이든지, 교회의 자녀이든지 복음과 건강한 교회를 상속해서 천국을 함께 바라본다는 개념에서 가장 값진 상속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결혼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이다.
결혼의 가치가 분명하지만,
결혼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일 뿐이다.
에베소서 5장에서 자세히 설명하듯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신비이다.
결혼을 통해서 배우자를 더욱 사랑하며 사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결혼으로 배우자를 우상처럼 섬기는 일이 벌어지면, 그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가 아니라, 우상과 우상숭배자의 관계가 되버린다.
그래서 결혼을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는 결혼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결혼이나 혼인관계가 최우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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