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18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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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292장 주 없이 살 수 없네
본문 : 시 85:1-13
자비하신 하나님, 늘 우리의 선한 아버지가 되심에 감사드립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자하심을 맛보게 하시고, 그 사랑 안에서 더욱 담대하게 주님을 찾게 하심도 감사드립니다. 비록 연약한 우리가 때로 넘어지고 지칠지라도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시고, 더욱 주님의 은혜를 갈구하는 우리의 삶이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함께 봉독한 본 시편말씀은 후대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회복을 구하는 기도의 시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과거 자신들의 선조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의지하며,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 자신들에게도 과거 선조들에게 베푸셨던 그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새벽의 시간에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 생활하던 이스라엘을 다시 이스라엘 땅에 돌아오게 하셨다. 그것은 1-3절을 통해 보듯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며, 그들을 향한 모든 분노를 거두시고, 진노를 거두셨기 때문이다. 즉, 과거 이스라엘이 출 바벨론 하여 다시 이스라엘 땅에 돌아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오늘 본문 1절에 ‘은혜를 베푸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은 ‘기쁘게 여기다, 애정을 품다, 호의를 보이다’라는 뜻으로서, 본래 자기 자녀에 대한 부모의 깊은 애정을 나타낼 때 사용되던 표현이다. 참 부모는 자녀가 아무리 잘못을 하고 못난 짓을 할지라도, 순간적으로 혹은 일시적으로 매를 들 수는 있지만, 징계를 할 수 있지만, 자기 자녀를 영원히 미워하지는 않는다.
물론 오늘날 이 시대 가운데 부모답지 않은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던가? 화장실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를 버리고 가는 일들, 자기 아이를 자기 손으로 죽이는 참담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참부모는 어떤 자들인가? 때로 자녀들이 실수해도, 때로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걸어가 그들을 징계한다 할지라도, 자기 자녀를 포기하지 않는다. 끝까지 사랑으로 돌이키게 하려는 자들이다. 무한한 사랑으로 자녀들의 허물에 대해 인내하고 품어주는 존재가 바로 참 부모이다.
저는 학창시절 때 육군 장교이시던 아버지께 정말 많이 혼났다. 일찍이부터 맞을만한 잘못들을 참 많이도 했다. 그렇게 혼도 나고, 매로 맞으면서도 부모의 억압이 싫어서 할수만 있거든 더욱 곁길로 엇나가려 했던 것 같다. 그 날도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아버지께 지휘봉으로 엄청 두들겨 맞았다. 종아리에 피멍이 잔득 생기고, 그래도 매질은 그칠 줄 몰랐다. 그렇게 한참을 맞고나면 언제나 그랬듯이 아버지는 안티푸라민을 가져오라 하시고는 엎드린 제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시곤 했다. 철없던 당시에는 병주고 약주는 것도 아니고, 왜 실컷 때리고 약을 발라주냐며 속으로 엄청 원망을 했는데, 유독 그 날만큼은 피멍이 든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시던 아버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자식이 다른 길로 가서 그 죄 때문에 심하게 책망하셨지만, 그로 인한 징계의 상처들을 바라보시며 마음 속으로 울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던 순간이었다.
참 부모는 자기 자녀가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때로 혼을 내기도 한다. 징계를 하기도 한다. 때로는 매를 손에 들 때도 있다. 물론 그렇게 혼을 낼 때에는 징계를 당하는 자녀처럼 몸이 아프거나 하진 않아도 그 마음은 그 육신의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참 부모는 자녀가 징계로 인해 슬퍼하거나 낙심하는 모습을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혹 내 징계가 아이에게 과했던 것은 아닐까, 혹 내 훈계가 아이에게 상처로 남지는 않을까? 그래서 더 이상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않도록 더 많은 애정을 표시하곤 한다.
사람인 부모도 이와 같은데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어떠하실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참 목자 되시고, 참 주인 되시고, 참 아버지가 되시기에, 자기가 낳은 자녀, 곧 이스라엘이 비록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지었더라도, 그들을 영구히 버리지 않으시고, 때로는 훈계도 하시고, 때로는 징계도 하시며, 때로는 매를 드셔서라도 그들을 끝까지 바른 길로 돌이키고자 하셨다. 그들은 아버지를 떠나고자 했지만 아버지는 한없는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주심으로 마침내 고국에 돌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아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 아버지가 되시고, 자기가 낳은 자녀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아는 자라면, 비록 일곱 번을 실수하여 징계를 받는다 할지라도 여덟 번 일어서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 자기 자녀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아버지를 믿고 확신함으로, 오히려 용서와 회복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9장 15절 말씀을 통해 이렇게 약속하셨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여러분 생각해보라. 우리 중 누구라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이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할 자는 없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 은혜와 자비의 아버지가 아니시라면 그 누가 천국문에 이를 수 있겠는가? 우리 중 어느 누구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 없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와 회복 없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 입장에서는 조금 뻔뻔해 보이고, 조금 염치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의 아버지가 되심을 아는 자라면, 지금 내가 당하는 징계와 답답함에 낙심하고 좌절하여 주저않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은혜를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와 같은 자를 뻔뻔한 자로 여기실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로 여기시고, 그에게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를 기뻐하시며, 그에게 심판과 저주를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이다.
과거 자신의 선조들에게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은혜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확신하던 시인은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새로운 용서와 회복을 구한다. 그 내용이 4-7절까지의 말씀이다. 그런데 1-3절의 내용과 4-7절의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듯 보인다. 1-3절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이 노를 그치시고 주의 백성을 용서하셨으며, 그들의 삶을 회복시키셨다고 하였는데, 4-7절에 와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되는 것을 탄식하며, 하나님께서 노를 그치시고 주의 백성을 회복시키시기를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1-3절의 내용을 모두 미래시제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본시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쉽게 해결된다.
포로에서 해방된 이후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로 말미암아 포로귀환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거주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정착 후의 그들의 삶은 여전히 좌절과 갈등으로 얼룩져 있었다. 땅은 황폐화되어 있었고, 아라비아 사람들, 암몬 사람들과 같은 적대적인 세력이 이스라엘의 재건을 시시 건건 방해하고 있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비참했던 포로기를 마치고 하나님의 은혜로 본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러한 기쁨도 잠시, 황폐한 땅과 적대적인 주변 상황으로 인해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따라서 시인이 1-3절의 내용과 4-7절의 내용을 서로 모순되는 듯 고백하고 있는 이유는 그러한 대조를 통해 이스라엘의 현재의 상황을, 이스라엘의 절박한 현실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즉, 시인은 모순되는 대조를 통해 여전히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을 처지에 있음을,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비참했던 포로기를 끝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으로 은혜가 중단될 것이 아니라, 이후로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하나님의 구원이 절실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큰 구원과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여전히 매순간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는 필요하고,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래서 포로생활이 끝나고 본국으로 이스라엘이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는 땅이 회복되어야 하고, 도시가 회복되어야 하는 등의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필요하다. 이처럼 이미 구원과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는 매 순간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구원여정에 빗대어 생각해보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완전히 사하셨다. 믿으시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하셨는데, 저와 여러분에게 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죄인들을 의롭다고 여겨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받은 자인데, 그렇다면 이후의 우리의 삶 가운데 더 이상의 구원과 은혜는 필요 없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구원과 은혜가 필요하다. 왜인가?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죄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다. 새롭게 창조된 정직한 영, 정직한 마음을 통해 우리의 삶을 가꾸고, 보수해 나가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는 성화의 과정이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또, 그 과정을 여전히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여전히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지는 육신을 가진 상태에서 이루어가야 하기 때문에 매순간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는 반드시 필요하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라는 것과 ‘나는 어떤 존재인가?’ 라는 것을 통해 얻게 되는 결론이기도 하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이 참 부모로서 자기 백성에게 은혜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것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어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에 대해 살폈다. 따라서 두 사실을 통해 얻게 되는 최종적인 결론은 무엇인가? ‘하나님 백성은 은혜 주시는 하나님 없이는 결코 의롭고 선하고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없으며, 오직 은혜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동떨어지게 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은혜를 입은 자가 은혜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 안에서만이 하나님 백성으로서 아름답고, 영광되고,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길 바란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자마다 8절에서 말씀하는 바대로,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가지 않기를’ 바라게 되며, 나아가 9절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함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그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의와 희락과 화평의 좋은 산물들이 넘쳐 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도제목
1. 은혜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칠전팔기하여 끝까지 믿음의 길 걷게 소서
2. 하나님만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늘 가까이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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