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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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기도
사랑의 하나님 이 시간 말씀이 육신되시고, 창조의 능력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시간 되게 하시고, 저희 연약함 속에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는 믿음의 시간 되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말씀
본문 말씀
요 19:25-27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Intro
Intro
가상칠언의 3번째 시간입니다. 이전에는 누가복음에서의 두 가지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저들을 사하소서라는 주님의 기도에 대해서 나누었고, 이 기도에 근거한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의 기도, 즉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요청에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특히나 2번째는 변화에 초점했습니다. 우리 힘으로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며, 주님의 사랑의 복음으로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듣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십자가는 가장 중요한 클라이막스에 틀림없습니다. 특히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외침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들려줍니다(요 19:30). “다 이루었다.” 그러나, 이 말씀 이전에 아직 중간 단계로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사역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하는 제자로 불리는 제자 요한과 그의 혈육의 모친인 마리아를 서로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로 묶으신 것입니다.
사실 다소 기이한 일입니다. 1) 왜 십자가에서 이와 같은 사역을 행하신 것인지, 2) 또 왜 하필 마리아와 요한인지, 3) 이 사역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3가지 질문들을 가지고서,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향취를 느껴가며, 정리하고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Main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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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들은 이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요한을 아들과 어머니로 새롭게 관계를 이어준 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5계명을 이루기 위한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일면 타당하긴 합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은 부모님과 동떨어져서 사역에 매진하셨고, 그 기간 동안 그리고 이후로 5계명에는 약점이 있어 보입니다. 이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이후에는 어머니 마리아를 돌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에 대해서 왜 ‘요한’이 이 역할을 담당해야하는지, 왜 십자가에서 이와 같이 이야기하셔야했는지 타당하게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Who 다른 형제들도 있음 / When 최후의 만찬이라든지, 부활 후에도 가능하지 않았는가)
오늘 본문의 흐름 속에서 먼저는 보아야합니다. 17절부터 살펴보면,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지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이 두드러집니다.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자칭이라는 말을 붙여달라는 요청에도 수용되지 않습니다. 이 십자가 사건이 유대인과 로마인들의 결탁에 의해서 행해진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체성이 드러나야했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26절에 자기의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가 어머니를 존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2장에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부족했을 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말씀과 같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공적인 사역을 행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육신으로는 어머니이지만, ‘여자여’라고 부르시며,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하신 창조주로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런 관점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내용과도 잘 연결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치적인 왕은 아니십니다. 본문의 장면을 봅시다. 십자가 주변에는 로마 군병들이 포진해있고, 심지어 23-24절에서는 예수님의 옷을 취하여 네 깃으로 나누고, 속옷도 제비를 뽑아 탈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눈에 보이는 대로 바라보면, 엄청난 수치와 모멸이지요. 하지만, 또 달리 바라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풍경에 대해서 초연해 계시다는 점입니다. 그가 왕 되신다는 것은 이 땅에서 힘이 행사되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영원 속에서 이 땅을 바라보고 계시는 참 왕이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고, 참 빛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왕으로 드러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정리할 것은 <★십자가: 예수님은 참 왕으로 참 생명과 참 빛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소 결론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명한 것이지만, 이것이 십자가 위에서 강렬하게 빛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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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혹자들은 이 본문을 두고서 마리아와 요한의 관계성을 두고서 새로운 관계의 시작점이다. 관계의 재창조가 이루어졌다라고 평가합니다.
이 해석 또한 타당한 부분이 있고, 한편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타당한 것은 예수님의 세번 째 가상칠언은 독특하게도 가장 관계성을 가진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성부와 성자, 또는 한 강도와의 대화였다면, 이제는 성자와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소서’라는 말도 참 독특합니다. 요한복음 안에서 이 보라라는 감탄사 내지 명령어는 ide라는 단어인데, 무언가를 주목하여 보게 합니다. 주로 예수님을 주목해서 보게 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도 이를 사용하시는데, 무리와 함께 사용할 때는 새로운 공동체, 즉 말씀으로 세워지는 새로운 공동체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는 이전에는 한번도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 였던 적이 없었고, 이후로도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이 관계의 변화는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두번 째 정리할 부분이 있습니다. 27절에서도 ‘그 때로부터’라는 구절이 중요합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는 때가 이르지 않았다. ‘hora’라고 발음하는 이 때는 그냥 단순한 때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때를 이야기합니다. 영원하신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이 말씀이 참 생명과 참 빛으로서 성취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의 시작점과 재창조가 왜 요한과 마리아에게만 국한되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25절에서 어머니 마리아 외에도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들을 향해서는 딸이요 누이요 자매라고 선언하시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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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서 요한과 마리아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말씀의 성격이 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사실 서로 엮이기가 어려운 관계입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에 대해서 현재 진행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마리아의 입장에서 이를 살펴보면, 잉태때, 이미 예수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시임을 들었습니다. 또 정결례를 위해서 성전으로 왔을 때, 시므온으로부터 축복을 받으며,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카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라고 눅 2:34-35로 알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아는 여인이었고, 예수님이 가실 길을 자세히는 모를 수 있지만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과는 특별한 관계성이 없습니다. 다른 12제자들과도 특별한 관계성이 없습니다.
어찌보면,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동거동락하며 떨어져 지냈습니다. 같이 계셨던 순간은 요 2:12로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를 기점으로 떨어지내셨던 것이지요.
이렇게 떨어지내면서, 자연스레 예수님의 형제 내제 친척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러 이적들을 베푸는 것으로는 이해하지만, 왜 중앙 정치로 뛰어들지 않는지 답답해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요 7:2-5을 보면 초막절이 다가왔을 때, 형제들이 유대에서, 또 세상으로 그의 일을 나타내보이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 그리고 누이들이 찾아왔을 때(눅 8:19-21), 그들을 맞이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너희가 어머니요 형제라고 말합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예수님과 요한은 가까울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동일하게 주님을 믿지만, 또 십자가 사역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를 갖춘 사람들이지만,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로 맺어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나 추정하건데, 마리아의 마음에는 이 십자가의 순간이 칼로 가슴을 찌리는듯한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 고통의 시간 속에서 ‘요한’이 곁에 서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이 마치 마리아의 고통처럼 모든 것이 아득한 상황이었을 겁니다. 설령 조금 정신을 차리더라도 ‘요한’이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고통받는 길로 가는 것이, 예수님의 공생애가 제자들의 탓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한편 요한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더욱 빛나고 자신은 익명의 제자처럼 사랑하는 제자로만 묘사하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어쨌든 사랑받는 제자로서의 정체성은 중요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보다도 더욱 예수님과 친밀함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랑받는 제가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사로잡힐 때는 그를 떠나고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주님을 생각하는 가운데 대제사장의 뜰에서, 또 십자가의 자리에서도 군중들에 섞여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6절과 같이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가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는 마리아와 눈을 마주치며, “guinai, 여자여, ide, 보소서, ho huios su, 당신의 그 아들” 이렇게 말합니다. 동사 조차 없이 아주 간결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선언적으로 ‘요한’이 이제는 마리아의 아들임을 선언하십니다.
또 이어서 요한을 바라보시면서 “ide, 보라, he meter su, 너의 그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힘드신 상황 속에서 던지시는 말씀인지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선언이 힘 있고, 변화를 일으키는 말씀으로서 역사합니다.
요한복음의 프롤로그에서 시작된 창조의 능력을 가진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상칠언의 두번째 말씀에서도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강도의 마음을 회개케 했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선언은 한편으로는 마리아와 ‘요한’이 서 있는 자리에서 전해졌다는 측면에서 우리 모두에게도 지향점이 있습니다. 우리 또한 누군가의 어머니이고, 또 누군가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즉 사랑하는 자로서 서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고, 우리가 함께 서 있다면, 우리 옆에 있는 사람이 바로 이와 같은 선언이 들려지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세번째 정리는 <★사랑이 부어지는 십자가의 자리는 사명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쫓아 십자가 앞에 섰을 때, 그곳에서 새로운 변화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이 아들과 어머니에 대한 명령은 다른 사람들에게 문자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와 ‘요한’이 부여받은 사명의 자리의 성격을 보면, 우리 또한 유사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먼저 요한의 입장에서는 그는 성정은 우레의 아들로 불렸던 사람입니다. 그 또한 순교의 길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삶으로 나가는 것이 적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리아를 모심으로서 이와 같은 성정을 가다듬고 보다 주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서, 마리아를 지극히 섬기고 보살피는 성도의 교제를 깊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사랑으로 성도가 연합됨이 무엇인지, 날마다 성도의 교제가 새롭고 깊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그의 복음서 요한복음과 사랑의 서신인 요한서신, 그리고 끝까지 소망의 인내를 촉구하는 요한계시록까지 쓰게 했습니다. 사실상 ‘요한’이 아니라면 누가 쓸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과 가장 친밀함을 누렸던 제자, 바로 그가 써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혼자 기록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를 모심으로서 깊은 사랑의 교제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사랑은 잠시 잠깐이 아니라,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라면 30년(이재철)이라는 시간 동안 인내의 사랑으로서, 또 오래토록 깊어진 사랑을 통해서 전해졌습니다.
한편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장래에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유다 등 모두 다른 사역으로서 활발하게 활동을 합니다. 그녀를 모실 아들이 필요했습니다. 또 한편 이것이 결과적이라면, 과정적으로도 필요했습니다. 형제들과 제자들의 교류를 잇는 역할로도 마리아와 요한의 역할이 컸을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는 무언가 매끄럽지 않았던 제자들과 마리아와 형제들의 관계가 행 1:13-14 절에서 함께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그 사이에 매개가 된 부분들이 있다면, 바로 이처럼 요한과 마리아가 아들과 어머니로 묶이기 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요한으로부터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적인 의미들이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결국 요한과 마리아에게 주어진 말씀,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소서 네 어머니라”라는 이 말씀은 십자가를 향한 자리에서 주어지는 사랑의 사명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우리 모두 다양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사랑의 사명의 자리라는 것은 동일합니다. 단지 요한과 마리아는 좀더 이른 시점에 부여받은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사명의 자리를 어떻게 감당하고 계십니까. 어떤 분들은 교사로, 또 목자로, 또 중보기도자로, 또 찬양팀, 방송실, 안내팀, 여러 섬김으로 우리들의 자리는 다양합니다.
저 또한 사역자로서 사명의 자리로 부르셨죠. 그러나 때로는 이 자리가 제가 잘 어울리는 자리인가 고민할 때도 많습니다. 마치 요한의 성정과 마리아를 모시는 일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처럼요. 그러나 주님의 뜻 안에서 우리는 가장 적합한 자리로 부르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면서 서 있는 그 자리가 사명이 부여된 자리입니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사랑과 또한 주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실제적인 능력을 믿으며 순전한 마음으로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도제목
기도제목
1.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 또한 사랑의 사명의 자리를 충실히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사역자의 자리, 교사와 목자의 자리, 중보 기도의 자리, 찬양팀, 방송실, 안내팀 등 섬김의 자리 등 모든 자리에서 사랑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2. 여름 기간 동안 수해로 피해를 입고, 고통받으신 분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은혜가 함께 하기를.
더 큰 피해가 없고, 조속히 복구 작업도 이뤄지도록, 앞으로는 동일한 문제로 피해가 재발되지 않도록 피해 환경들이 개선될 수 있도록
3. 9월부터 시작될 하반기 사역들을 위해서 힘있게 진행될 수 있도록. 목장 모임과 양육 가운데 십자가의 사랑과 성령의 은혜가 함께 하길
그 외 여러 사역 가운데 성령의 기름 부음과 사랑으로 한 마음되어 나아가는 역사가 있도록
4. 담임목사님과 선교사님들을 위해
정민규, 정수정 선교사님(브라질)
임창원 선교사님(캄보디아)
이신애 선교사님(탄자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