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지키시는 하나님

사무엘상 강해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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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새벽기도에 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담임목사님께서는 청년회 수련회를 준비하시기 위해서 어제 구미로 가셨습니다. 담임목사님과 청년회 수련회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월요일에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새로움을 주신다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오늘은 이 새로움을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보호하시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성도를 지키신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성도를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쳐서 라마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사무엘을 만나서 사울이 다윗에게 한 행동을 다 이야기 하고 사무엘과 함께 살았습니다. 한편 어떤 사람이 다윗의 위치를 사울에게 고발해서 사울이 사람을 보냅니다. 다윗을 암살할 사울의 수하들입니다. 사울의 수하들이 갔는데 선지자의 무리들이 있습니다. 아마 이 선지자의 무리들은 사무엘의 밑에서 선지자 직무에 대해서 배우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무엘이 머무르는 라마나욧은 마치 선지자 학교와도 같고 교회와도 같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이야기한대로 말씀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면 선지자들의 예언이 있는 라마나욧은 구약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울이 보낸 수하들이 그곳에서 다윗을 잡아야 하는데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러자 선지자도 아닌 그 전령들이 갑자기 예언을 하기 시작합니다. 다윗을 암살하는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예언을 합니다. 이때 이들의 예언은 선지자들의 예언과 다릅니다. 원어상으로 선지자들의 예언은 니베라고 해서 정돈된 형태의 예언을 말하고 사울의 수하들이 한 것은 히트나베라고 해서 몰아지경의 상태에서 정돈되지 못한 예언을 하는 것은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수하들은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아서 예언자 직무를 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왔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의 악행을 막아준 것입니다.
21절은 이 현상이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정확한 목적을 가지고 하시는 하나님의 일인지 설명합니다. 사울의 첫 번째 암살조가 들어가서 다윗을 죽이지 못하자 다른 전령들을 보냈는데 2차로 온 부하들도 예언을 했고 그다음에 또 사람들을 보냈는데 그들도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회성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예언하는 곳에 가서 그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아서 생긴 종교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일관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사울의 부하들을 막은 사건입니다. 그들이 다윗을 암살하러 왔지만 모두 성령의 역사로 예언만 하다가 돌아갑니다.
이 예언이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본문이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암살하러 온 이들에게 불벼락을 내리거나 혹은 기절을 시키거나 죽이거나 하지 않고 예언을 하게 했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이들이 무슨 예언을 했겠습니까? 다윗을 암살하러 갔다가 암살하지 못했는데, 이들이 어떤 예언을 했겠습니까? 예언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하는 것이라면 사울의 수하들이 어떤 말을 했겠습니까? 추측을 하는 것이지만 이런 식의 예언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다윗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버려 왕이 되게 하셨다.’ 이런 이야기들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20절에 다윗을 죽이러 다가 예언을 한 사람들이 2차로는 가지 않습니다. 21절을 자세히 보시면 다른 전령들을 보냈다고 이야기합니다. 1차로 갔다가 벼락을 받아서 굳이 몸이 상한 것도 아닌데 왜 1차로 갔던 사람들이 다시 오지 않았겠습니까? 혹은 왜 굳이 다른 전령들이 갔다는 것을 언급했겠습니까? 라마나욧으로 가서 성령이 주시는 예언을 체험한 사람들은 다윗을 죽이면 안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여서 메시아의 왕조를 이루려는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주의 성령과 말씀이 그들을 막았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말씀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말씀을 통하여 다윗을 지키고 다윗의 왕조를 지키고 그리스도가 오는 길을 지키셨습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생각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을 지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성도를 지키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사도행전에도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사도행전 9장에 사울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도 사울이 나오는데 사울과 이름이 똑같은 다른 사울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울입니다. 신약에 나온 사울도 구약에 나온 사울처럼 죄 없는 이를 박해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강렬한 예언적인 현상을 체험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영적인 체험 때문에 더 이상 교회를 박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가두거나 죽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박해하는 사울을 막으시고 엎드리게 하시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를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적용)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성도를 지키십니다. 성도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붙드십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이들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의 무기는 말씀과 성령입니다. 말씀과 기도입니다. 우리는 지략이나 무력이나 금권력으로 교회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역사로 사람을 변화시키고 회개시키키며 교회를 지킵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지키는 하나님의 역사는 지금 이순간도 계속 됩니다. 우리가 교회로서 세상 가운데 살아남으려면 교회 안에서 말씀의 능력으로 기도의 능력으로 보호받아야 합니다. 사울로부터 다윗을 지키신 그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지금도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사울의 부하들이 가진 칼이 날카로울 것 같고 그들의 무력이 위협적일 것 같지만 말씀의 능력앞에 모두 꺾일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대적을 이기신다.
(설명) 그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협하는 대적을 물리치신다는 것입니다. 부하들을 보낼 때마다 다 이상해져서 돌아오니까 이번에는 사울이 가기로 다짐합니다. 사울이 라마나욧으로 갈 때는 그 부하들이 간 것과는 좀 다르게 본문이 이야기합니다. 22절에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서 사무엘과 다윗의 행방에 대해서 묻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사무엘과 다윗이 라마나욧에 있다는 것을 알립니다.
우물에서 뭔가 질문하는 장면에 대해서 이전에 설명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9장에 약혼전형장면이 나오는데 과거에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우물에서 아내를 만나지 않습니까? 이삭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고 족장들은 우물에서의 대화를 통해 아내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9장에 보시면 물을 길으러 가는 여인들이 사울의 질문에 경쟁적으로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후에 사울과 사무엘이 만납니다. 우물에서 질문하고 대답하는 이 장면은 사울과 사무엘의 관계가 마치 부부의 관계처럼 밀접한 관계가 되어 함께 이스라엘을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섬길 동역자가 될 것을 암시합니다.
오늘 나오는 우물에서의 장면은 약혼전형장면은 사울과 사무엘이 이전에 동역자로서 친밀했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24절에 어떤 모습이 나오냐면 사울이 벌거벗은 사울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것은 사울의 수하들이 겪은 일은 아닙니다. 사울만 옷을 벗고 예언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성령이 하시는 역사로 생긴 일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옷을 벗은 것입니다. 다윗을 죽이러 왔는데 성령을 통해 다윗을 죽이면 안된다는 내용의 예언을 하면서 어떤 강렬한 계시적인 체험으로 말미암아 그의 옷을 벗었을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의 파혼은 신랑이 신부의 예복을 벗기는 것으로 형상화 되었습니다. 사울과 사무엘의 관계는 더 이상 부부처럼 친밀한 동역자가 아닙니다. 옷이 벗겨진 것을 통해 그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지자의 동역자인 왕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했습니다. 18절의 다윗은 선지자의 동역자가 되어 사무엘과 함께 살지만 사울은 더 이상 선지자의 동역자가 아닙니다. 다윗과 사울의 입장이 날카롭게 대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아마 무장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을 죽이러가는 길이니까 무장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다윗이 수금을 타고 있었을 때도 창을 들고 있었고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러 갈 때 그의 갑옷을 벗어서 챙겨줄 정도로 무기나 갑옷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울의 옷, 갑옷, 무기를 다 해체시키셨습니다. 왕의 복장을 해체시키셨습니다. 세상의 힘과 권력을 갖고 교회를 억누르려 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억누르려 했지만 말씀과 성령의 역사 앞에서 그것들이 다 해체당했습니다.
한편 사울이 벌거벗은 것은 수치와 부패한 상태에 대한 상징도 있습니다. 사울이 벌거벗은 것은 마치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벌거벗은 것과도 같습니다. 아모스 2장 16절에 아모스 선지자가 용사가 벌거벗고 도망칠 것이라 예언한 그 벌거벗음과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3년 동안 벌거벗으며 애굽과 구스의 수치를 예언한 것과 같습니다. 구약성경은 어떤 것이 벌거벗었다고 할 때 수치스러운 상태, 지위가 낮아지고, 무력한 상태, 포로가 된 상태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가엽고 불쌍한 상태 이런 것을 두고 벌거벗은 상태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벌거벗은 것은 왕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수치스러움을 겪고, 나약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울이 왕으로서의 지위와 권력을 갖고 나아갔지만 결국 이것은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 앞에서 무너집니다. 다윗을 무력하게 만들고 수치스럽게 하려고 했겠지만 그것이 다 사울에게 돌아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키고 그 계보와 구원의 물줄기를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24절에 사울이 사무엘 앞에서 벌거벗고 하루 밤낮을 누워있고 예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 앞에서 이것을 행하였을 때 다윗도 아마 이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만일 다윗이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사무엘이 이 사건을 다윗에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사울이 왕의 권력으로 모든 상황을 조정하고 사람을 움직여서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지만 결국은 벌거벗고 누워서 무력한 상태가 된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메시아의 왕조를 이룰 것을 확실히 믿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고 하신 것처럼 세상의 모략과 권력과 폭력이 결코 성도를 해치지 못하고 하나님의 언약공동체를 해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적용) 우리에게도 이런 사울 같은 존재가 있습니까? 나의 믿음 생활을 방해하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나 권력이 있습니까? 혹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내 안에 어떤 욕망이나 동기가 나의 믿음 생활을 방해하고 교회와 주의 나라를 섬기는 일을 방해합니까? 오늘 본문에 나온 이 역사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적하는 세력, 복음에 대적하는 세력을 무너뜨리고 해체시키십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사울을 벌거벗기시고 눕혀서 제압하신 것처럼 주의 성령과 말씀의 역사가 세상을 벌거벗기고 눕혀서 제압할 것입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말씀과 성령으로 성도를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교회를 대적하는 것들을 무력화 시키고 무너뜨립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과 성령으로 성도를 지키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며 이 소망 안에서 복된 하루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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