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자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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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새벽기도에 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라마나욧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도 믿음이 흔들린 다윗이 어떻게 위로받는지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사람은 고난 가운데 위로자를 찾는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사람은 고난 가운데 위로자를 찾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계속해서 다윗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합니다. 다윗이 라마나욧으로 도망쳤을 때 세 번이나 암살부대를 보내고 사울 자신이 직접 다윗이 있는 곳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이 위기 가운데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다윗을 지켜주셨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사무엘 앞에서 벌거벗기시고 눕히시면서 아무리 권력과 힘이 있어도 하나님을 대적하면 비참하게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다윗은 라마나욧에서 이런 장면들을 다 봤거나 사무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 본문 1절에 보시면 다윗이 라마나욧에서 도망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에게 갑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라마나욧에서 다윗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몇 번이고 보거나 들었고 분명하게 깨달았을텐데 다윗은 그곳을 도망하여 나옵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 사울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지만 계속되는 죽음의 위협 앞에 믿음이 흔들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제까지고 하나님께서 똑같은 방식으로 다윗을 보호해주실지 모른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도망가고 숨은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라마나욧에서 도망치는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주 신실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는 요나단을 만나서 나눈 대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요나단을 만나서 요나단에게 따지듯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요나단이 대답합니다.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크고 작은 일을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는 행하지 아니하나니 내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 다윗은 왜 자기가 이렇게 목숨의 위협을 당해야 하는가 따지고 요나단은 너 절대 안 죽는다 우리 아버지가 뭐 할때마다 나한테 이야기 하니까 너 괜찮다라고 위로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보다는 자신의 지인이자 사울의 최측근인 요나단을 만나서 자신의 입장을 토로하고 정보를 얻으면서 위로 받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이 여기서 한 술 더 뜹니다. 3절의 내용이 좀 긴데 요약하면 “너랑 나랑 친하니까 사울이 나를 죽였을 때 너가 슬퍼할까봐 나 죽이는거는 너한테 이야기 안하고 나를 그냥 죽이면 어떡해?” 이런 이야기입니다. 사울이 사고를 치면 그 아들 요나단한테 이야기해줄꺼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 알려줘서 안 죽게 해준다고 했는데 다윗의 불안감은 한도 끝도 없이 뻗어갑니다. 이번 건은 너한테 숨기고 나를 슥삭하면 어떡하냐 이겁니다. 라마나욧을 피해서 자신을 위로할 사람을 찾아서 위로를 얻으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지켜주심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고 자꾸 불안한 생각만을 합니다. 3절 하반절에 어떤 이야기까지 합니까?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건 무엇을 걸고 사실을 증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종의 관용어구인데, 이스라엘 사람 입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또 지금 다윗 앞에서 요나단이 숨을 쉬고 있는 것도 당연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당연한 것처럼 다윗과 죽음이 한 걸음 거리라는 사실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죽음의 위기를 강하게 느끼고 있고 깊은 절망 가운데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너무 불안해하니까 4절에 요나단이 이야기합니다.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인지 이야기 하라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여기에 대해서 다윗은 사울의 반응을 한 번 살펴봐달라고 부탁합니다. 원래 다윗이 초하루날이 되면 사울과 식사자리를 가지는데 요나단이 사울에게 ‘다윗이 지금 매년제를 드리기 위해 집에 갔습니다.’ 라고 했을 때 사울이 그 자리에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면 초하루날 식사 때 안 온 것에 대해 화를 낼 것이고 그냥 ‘어 그래 집에 잘 갔다오라고 해라’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하면 이제 다윗을 죽일 생각이 없는 것으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말해도 좋을텐데 다윗이 또 이상한 말을 합니다. 8절에 요나단한테 자기를 인자하게 대해달라고 합니다. 자비롭게 대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죄가 있으면 요나단보고 자신을 죽여달라고 합니다. 만약에 다윗이 사울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죽어도 좋다는 극단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요나단이 아니라 합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들면 반드시 알려준다고 이야기 합니다. 다윗이 요나단에게 인간적인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만 사실 그 인간적인 위로에도 마음에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자꾸 요나단이 다윗의 생명을 지키는데 도움을 준다고 해도 안심을 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고난을 겪으면 다른 사람을 찾아가서 위로를 구하지만 그 위로가 충분한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적용) 우리도 다윗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지만 사람에게 위로 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를 위로하시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지 못해서 사람에게 달려가서 하소연하고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위로 받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절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너무 불안하고 힘든데 그걸 어쩌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이 주는 위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1번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나 죽으나 우리의 참된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2- 동역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전해야 한다.
(설명) 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동역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말씀과 기도로 위로를 얻지만 성도도 사람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위로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하고 이야기하고 위로받고 싶은데 그게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하는 위로는 좀 달라야 합니다. 우리의 위로는 인간적인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10절에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야기하기를 사울이 만약에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 요나단에게 너무 엄하게 이야기 하면 어떻게 하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역시 요나단이 사람으로서 하는 위로는 다윗에게 별 소망이 되지 못합니다.
이 때 요나단은 다윗을 들로 데리고 나가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위로를 합니다. 이때까지 요나단의 대화에는 왕궁의 상황이 어떤지 요나단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이 때부터 요나단의 대화에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12절과 13절에 요나단은 만약 다윗에게 무슨 변고가 있을 때 반드시 다윗에게 알린다고 이야기 합니다. 12절에 이것이 하나님의 증언이라 합니다. 다윗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3절에 만약 다윗이 위험에 처했는데도 요나단이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요나단을 벌하신다는 자기저주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나단에게 함께 하신 것처럼 다윗에게도 함께 하실 것이라 다윗에게는 복을 선언합니다. 14절과 15절에 요나단이 다윗과 약속을 합니다. 다윗이 이다음에 요나단의 집을 보호해주기로 하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16절에 요나단이 선언하기를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을 치실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요나단은 이때까지의 대화와 다르게 하나님의 위로를 다윗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합니다. 다윗을 도와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요나단을 벌주실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자신과 자신의 후손을 돌봐달라고 요청하는데 이 요청은 그냥 다윗을 돌봐주는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다윗이 요나단과 그 후손을 돌볼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축복이 담겨 있습니다. 다윗이 맨날 천날 쫓겨다니다가 사울에게 죽임 당하면 무슨 수로 요나단과 그 후손을 돌보겠습니까? 이건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대적을 치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요나단의 아버지인 사울이 있습니다. 요나단은 혈연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계획을 믿고 다윗을 지지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하시고 다윗의 대적을 물리치시고 다윗을 높이실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동역자는 이렇게 인간적인 위로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근거 없는 위로가 아닙니다. 다윗을 통해 메시아의 왕조를 세울 것이라는 복음의 확신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적용) 우리가 사무엘상을 쭉 읽다가 보면 주로 다윗이 활약하는 이야기에만 집중하기 쉬운데 요나단도 다윗 못지않게 정말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요나단을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역사를 위해 쓰시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울이 방황할 때 전쟁에 나서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고 다윗이 두려워 떨 때 믿음의 동역자로서 다윗을 위로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요나단이 참 지혜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요나단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다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이야기 했으면 다윗에게 큰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라마나욧에서 사울이 발가벗은 그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도 사울이 무서워서 도망친 사람입니다. 눈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봐도 도망치는데 요나단이 다윗을 만나자 마자 하나님이 도와주실꺼다 이래봤자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처음에 자신이 인간적으로 해줄 수 있는 위로를 해줍니다. 다윗이 그 인간적인 위로를 붙들다가 그 인간적인 위로도 별 위로가 안된다는 것을 깨달을쯤에 하나님의 위로를 전합니다. 다윗은 맨처음에는 친구의 진정성 있는 위로를 마주했지만 결론적으로는 그 친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에 도달했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믿음의 동역자가 시험 들었을 때 처음부터 하나님이야기를 꺼내면 어떻겠습니까? 제 이야기를 오해 없이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사람은 사람에게 위로받고 싶은 연약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인간적으로 위로해주고 공감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인간적인 위로로 한계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위로, 복음의 위로를 전하면 됩니다. “아이고 힘들어서 어떻합니까? 제가 최선을 다해 도울께요. 제가 거기에 대해 좀 아는데 아마 괜찮을 거예요. 그런데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형제님을 도우실 거예요. 형제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하나님이 자기 자녀 하나 책임 못지겠습니까? 하나님이 일하실 겁니다.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있는 이상 시간은 우리 형제님의 편입니다. 그래서 가면 갈수록 좋아질 거예요.” 이렇게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역자에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고 거기에 도달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는 사람의 손길, 인간미가 있는 따뜻한 언어도 필요합니다. 아마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람으로 오셔서 아픈 사람들을 만지시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룬 구원자가 되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삶과 인격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가 전달될 수 있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사람은 사람에게 위로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는 동역자를 위로할 때 우리의 삶과 인격으로 품으며 위로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위로의 최종적인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