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24 작정을 이루는 창조(8-9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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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
본문 : 창 1:1
창세기 1장
1일차 : 빛을 형성함 (1-5) 4일차 : 태양과 달로 채움 (14-19)
2일차 : 하늘과 바다를 형성함 (6-8) 5일차 : 새와 물고기로 채움 (20-23)
3일차 : 마른 땅을 형성함 (9-13) 6일차 : 땅의 피조물로 채움 (24-31)
창세기 본문은 ‘하나님의 영’이 맴돌고 있는 원초적인 물의 혼돈이 존재함을 증거한다.
다른 고대 근동의 창조 이야기는 혼돈을 의인화해서, 폭력적인 전투를 통해 그 혼돈을 극복한 창조주 신을 묘사한다. 하지만 창세기는 이 이미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말하고, 무언가를 존재하도록 명령하고, 혼돈은 흔들리지 않고 반응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창조의 본래 의도를 회복한다. 예수는 죄를 이기고 창조 세계를 하나님이 본래 의도한 대로 다시 세우는 새 아담이다.
*에누마 엘리쉬는 창조를 두 신, 마르둑과 티아마트 사이의 격렬한 전투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마르둑을 티아마트를 물리친 후에 그녀를 반으로 자른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친근한 하나님으로, 창조 세계오 깊이 관계를 맺고 창조된 질서의 개선을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일하는 존재로 이해한다. 반대로, 에누마 엘리쉬에서는 인류가 신들의 고된 작업을 수해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고대 이스라엘은 창조가 신들 간의 원시적인 경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창조에는 폭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에누마 엘뤼시는 남성 신이 여성 신을 폭행한 결과로 세상이 창조된다.
*이집트의 우주론이 근거한 관념은 세계의 모든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모두가 하나의 원시 물질에서 발전했다는 것인데, 그 원시 물질은 눈이라 불리는 물의 혼돈으로 상징된다. 창조의 신 아툼이 이 원시의 심연에서 진화해서 다른 여덟 명의 높은 신을 낳았다. 그는 누트(하늘)과 게브(땅)을 창조해서 세계를 눈(심연)으로부터 분리했다. 누트의 아치형 아래에, 그는 하늘을 지탱하기 위해 슈(공기)를 창조했다. 아툼 자신은 레(태양신)로 변했고, 그러고 나서 마아트(찔서)를 창조해서 자신의 동반자이자 조수로서 세계의 구조와 온전함을 유지하는 데 봉사하게 했다.
(고대 신화는 ‘다신론적 창조’이다. 여기에는 ‘다양성’은 있지만 ‘통일성’은 없다. 그러나 창세기의 창조는 ‘삼위일체적 창조’이다. 여기에는 ‘다양성’과 함께 ‘통일성’도 있다. 그래서 세상에는 너무도 다양한 나무들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같은 본질을 공유하는 나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나무는 제각각 하나도 같지 않다. 이건 정말 완전한 다양성이다. 하나도 같은 나무가 없다. 그런데 그 나무들이 하나의 종류로 묶인다. 단풍나무, 소나무, 은행나무 등등. 너무도 제각각인 나무들이 같은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
(창세기에서의 만물들은 인간 친화적이다. 하늘과 땅, 바다와 동식물,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선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실제 경험과 같지 않다. 실제로 하늘과 땅은 적대적이고, 바다와 동식물로 인간을 해친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이야기는 인간이 지어내가 어렵다.)
(또한 고대 근동 우주론에 따르면, 하늘과 땅, 바다, 해와 달 별 등은 하위 신들이다. 이들은 인간보다 위대하고 인간들을 지배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창세기에 따르면 이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며 신이 아니다. 이들은 인간보다 위대하지 않다. 오히려 인간들을 위해 주어진 선물들이며, 인간들은 이것들을 다스리도록 부름 받았다.)
혼돈은 창조를 취소할 위험이 있는 힘이다.
이 혼돈의 물은 장에서,
8-9문
제 8문 : 하나님께서 그분의 작정을 어떻게 이루십니까?
답 :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작정을 창조와 섭리의 일로서 이루십니다.
제 9문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답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은 엿새 동안에 아무것도 없는 중에서 그분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신 것인데, 하나님의 보시기에 모든 것이 매우 좋았습니다.
작정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을 위해 세우신 영원한 계획.
하나님의 작정은 그의 피조물의 삶 속에서 현재도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 ‘신적 작정’이라는 표현을 쓸 때는 주로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관해 이 세상에 창조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결정하셨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의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모든 창조세계를 제어하고 계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강하게 주장하는 의견을 향한 일반적인 반론은 ‘지나치게 인간을 로봇’처럼 치부하여 자신의 주인이 명령하는 그대로를 행하는 존재로 인간을 전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아들임으로 하루는 ‘선택자’가 될 수 있고, 또 다른 날에는 구원을 거부함으로 ‘유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성경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주권이 그의 피조물의 변화무쌍한 변화 아래 거한다는 구절을 찾기는 힘들다.
신적 작정에 관한 교리는 복잡하며 목회적으로도 어려운 교리다.
그러나 이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본적으로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 혹은 신자의 신앙 생활 속에서 신적 작정 교리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유한한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가 함께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신적 작정 교리를 살펴보는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유한한 이해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직접 대면하는 시간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선택하시며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며),
주권적이 존재이다. (역사 속에서 자신이 이루어나가시는 어떤 목표를 가지고 계신다)
사람들은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이 내린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들의 선택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창세 이전에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계획되었으며 구약성경에서 상세히 예언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진하여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알고 계셨음로 일부러 거기로 가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빌라도, 가야바, 헤롯 및 기타 예수님을 죽일 권한이 있는 자들이 의도한 바였다. 사탄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리라고 생각하며 거기에 관여 하였다.
양자의 뒤엉킴
예수님의 죽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의 상호 작용은 극히 밀접하므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너희에게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다.”
이러한 모든 사실로부터 우리는 예정과 인간의 선택이라는 두 가닥의 실이 풀 수 없도록 서로 뒤엉켜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작정이란, 하나님께서 장차 발생될 일체의 사건들을 미리 정하시는 그의 영원하신 계획 혹은 목적을 뜻한다.
만물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께서, 창조와 섭리에서 뿐만 아니라, 구속의 과정에서도 역시 한 명확한 계획에 따라 일하신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작정은 창조하시며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내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들의 죄행과 함께 그들의 행위를 포함한다. 그러나 죄가 세계에 들어와서, 천사와 인간생활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 것은 확실하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그것들을 유효케 하려고 결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작정은 허용적 작정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장차 될 모든 일들을 작정하셨는데 이는 그의 뜻에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대로 하신 것이며, 자유로이 또는 변동 없이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죄를 내시지는 않았으며, 피조물들의 의지를 억압하지 않으셨고, 자연 법칙의 자유나 우연성을 빼앗지 않으시고 도리어 성립시키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들과 천사들 가운데서 얼마는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예정하셨고, 또 달리 얼마는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
*이는 마치 집을 짓기 위해 청사진을 그린 것과 같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계획을 인간을 통하여 이루어 가십니다. 청사진으로 그려진 집을 지어야 할 의무가 인간에게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찬송하는 존재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삶의 모든 영역과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의지하고, 그 뜻에 기쁘게 순종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소요리 첫 번째 문답의 답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역사를 통하여 창조와 섭리로 나타났습니다.
창조
작정의 교리는 필연적으로 다음 단계로 작정의 시행을 고찰하게 하며, 이 시행은 창조의 사역에서부터 시작하게 된다.
창조는 모든 하나님 계시의 시초요 기반이며, 따라서 모든 윤리적, 종교적 생활의 근원이 된다.
‘창조’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의 현현을 위하여, 부분적으로는 기존자료를 사용하지 않고, 또 다른 부분은 실질적으로 불충분한 자료에서, 세계와 그 세계 안에 있는 만물을 창출하여 내신 하나님의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자유행위이지, 필연적인 행위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자아충족자이시기 때문에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창조는 일체 범신론적 교리를 대항한다.
그러므로 우주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나 또는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 생각될 수 없다.
동시에 하나님은 세계를 구성하시되, 세계가 항상 하나님께 의존하여, 매일같이 그의 권능에 의하여 유지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결코 그의 전창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편재하고 계신다.
태초라는 말은, 모든 일시적인 사물의 시초와, 심지어는 시간 그 자체의 시초도 의미한다. 세계는 시간 속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창조된 것이다.
**창조의 궁극적 목적
(1) 인간의 행복이 궁극적 목적이라는 교리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완전히 자명의 이치이다. 피조물이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더욱이 창조에 있어서 만물이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봉사한다고는 거의 말할 수 없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선언적 영광이 궁극적 목적이라는 교리
이것은 하나님이 본래, 피조물에게서 경배와 찬송으로 영광 받으려고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다만 그의 영광의 나타나심을 위하여 창조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궁극적인 목적은 ‘다른 종속적인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
시작
우리 집도, 우리 옷도, 차도, 세탁기도, 우리 자신도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무’는 아무 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태초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 지혜, 선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엿새 동안에 세상과 그 가운데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없던 가운데서 매우 선하게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창조의 범위는 ‘만물’이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 세계,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결과물 모두가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물이다.
*물리적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활동, 문명, 문화, 사회, 정치, 예수 ㄹ등의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만들어진 목적이다. 비록 죄로 인하여 이 목적을 상실한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반은총을 통해 셋ㅇ을 자신의 목적대로 다스리고 계신다.
*창조는 목적이 있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역인데, 이런 창조 사역은 하나님 자신 밖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
*창조 교리는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말하는 교리이다. 온 세상 만물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다루는 교리다.
섭리
우리 세대에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연의 독립적인 힘으로 다스려진다는 자연주의의 영향이 크다.
섭리라는 말의 어원적 의미는 ‘앞서서 보다’, 혹은 ‘공급하다’이다. 이 단어는 섭리 교리의 깊은 의미를 전달하지는 못한다. 이 교리는 하나님이 단순히 인간사를 지켜보는 이가 아니라는 의미다.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붙드시고 그 행동과 사건들을 가장 큰 것에서부터 지극히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지도하시고 처리하시며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섭리와 무오하신 예지와 그 마음의 자유롭고 변함없으신 뜻을 따라 다스리시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오 권능과 공의와 선하심과 긍휼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함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보존하신다.
그분은 우주를 조성하셨을 뿐 아니라 유지하신다.
우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존재할 수도 없고 활동할 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우주에 우연한 사건이란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시면서 인간의 의지적 행동을 통하여 자신의 의지를 실행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