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21 제자들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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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5: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복이 다 미래형이다.
3절에,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절에,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9절에,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계속해서 미래형이죠.
그렇다면 현재는?
3절을 보세요.
심령이 가난하다.
현재에요.
애통하고 있다. 현재에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현재입니다.
현재는 복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런데 미래는 복이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에 복을 받기를 원하지, 미래에 받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밥도 지금 당장이지,
내일 준다.
나중에 준다.
죽고 나서 준다.
이런 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미래가 아니라, 현재, 지금 복 받기를 바라는 거죠.
*마태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10절을 보세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또, 11절에도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핍박을 받았습니다.
특히, 말로, 언어적인 핍박을 많이 받았는데,
왕따를 시키거나,
아예 그 사회에서 살지 못하게 나쁜 소문을 내서, 못 살게 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래서 마태는 마태복음 5장을 기록한 거에요.
1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제자들이 나아왔어요.
제자들이 누구에요?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
특별히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제자들이 아닙니까?
그런 선택받은 사람들,
구원 받은 귀한 사람들에게, 지금 예수님이 앉아서 설교를 하세요.
여러분들, 여러분들에게 해당되는 복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세요.
3절에는, 마음이 너무 무너지고,
마음이 너무 가난해서 죽을 것 같은 사람
4절에는, 너무 슬프고 괴로워서 눈물이 절로 나는 사람,
5절에 온유한 자는,
자기 힘으로는 되는 게 하나도 없어도,
자기 힘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어떻게 보면 연약하고 무기력한 인생,
6절에, 하나님에 대하여 갈급하고 목마른 인생,
7절에, 마음에 동정심이 너무 많아서,
타인의 아픔을 보면 가만히 못 있는, 어떻게 보면 오지랖같은 인생,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순진하고 순수해서,
세상에서 손해나 보는 인생,
9절에 화평하게 하는 자는,
자기 체면이나 자기 명예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의 체면, 남의 명예나 챙겨주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
마지막 10-12절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욕을 먹고, 언어적 학대를 당하고, 왕따를 당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시는 거에요.
*여러분, 이런 사람은 복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정확히 이야기해서, 저주 같은 인생이죠.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요.
너희 제자들아,
너희가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고,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지만,
두려워하지 말아라,
근심하지 말아라,
너희들의 인생은 보장되었다.
너희들은 반드시 행복해질 인생들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복이 있다.
복이 있다.
복이 있다.
라고 하시면서, 현재적 복의 개념을 완전히 뒤바꾸셔서,
미래에 받게 될 완벽한 복을 갈망하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초청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요.
제자란 누구입니까?
제자란 현재적 고통을 지불하고, 미래의 완벽한 행복을 구매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영광이 있다.
하늘에 나의 영원한 집이 있다.
이 땅은 나의 집이 아니다.
이 땅은 내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다.
나의 집은 하늘에 있다.
라고 노래하며, 현재적 고난과 아픔을 잔잔한 은혜로 견뎌가는 인생이 바로, 제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요?
여러분은 제자입니까?
여러분은, 미래에 임할 확실한 행복을 위해서,
지금의 고난을 견딜 줄 아는 제자입니까?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다!
너희 전에 있던 믿음의 선조들도 이와 같은 박해를 받았느니라.
제자의 자부심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늘의 영광을 기대하며, 현재적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합니다.
제자의 삶을 살도록
현재적 고난을 견디고
미래의 영광을 기다리도록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
에릭 에릭슨, 정체성은 개인의 고유성과 자기 연속성에 대한 감각과 집단 이상과의 동일시를 포함한다.
정체성은 인간으로서 내가 누구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획득하게 되는데, 사회성의 결여와 개인의 고립은 정체성에 대한 위기를 초래한다.
관계성이 약화되고 개인주의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은 이미 이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1인 가구가 급증하였고, 혼밥, 혼술 등은 사회적 트렌드로 자리하고 있었다.
타인과 맺는 관계에 대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를 돌보고 편하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반영된 것이다.
사람들과 실제적인 관계는 동물이나 전자기기, 인터넷 네트워크상 관계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비인격적인 관계는 하버드 교수인 세리 터클의 지적대로 피상적이며 불완전한 관계로서 결코 사람들과의 관게를 대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개인주의화가 만연한 유럽 상황에서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매스 미디어의 발달과 인간 관계망의 확장은 필연적으로 인간 소외 현상을 낳는다고 지적하였다.
오늘날 다양한 작은 모임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그것이 유기적인 통일체라고 보지 않았다. ‘집단화’로 표현하는 이 현상은 개인주의 문제에 대해 해법을 주지 못했다.
이처럼 ‘개인화’와 ‘집단화’는 표면적으로 서로 양 극단에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개개인을 간섭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적이다. 이것은 개인화와 집단화 모두 타자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얻게 되는 ‘사랑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공동체가 부재한 시대에, 각 개인은 자신의 재능과 역량을 발휘하지만, 그것을 인정해줄 수 있는 타자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을 빚게 된다.)
규율사회 : 억압과 부정으로 특징지어짐. ‘~을 하면 안 된다.’는 부정성이 지배하고, 규율에 따라 움직인다. 여기서 주체는 ‘복종적 주체’로서 금지와 명령으로 일을 수행하고,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구분하는 외부 기관에 영향을 받는다. 이 사회에는 나와 남 사이에, 자신과는 다른 것을 부정하려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낯선 것을 부정하려는 맹목성을 가졌다고 하여 ‘면역학적 시대’라고도 일컫는다.
그러나 한병철은 오늘날에는 이미 이질성과 타자성이 소멸되었다고 진단한다.
더 이상 타자에 대한 부정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성 과잉’이 자리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더 이상 규율 사회가 아닌 ‘성과사회’이다.
성과사회 : ‘성과’가 중심이 된다. 신자유주의 이념에 따라 중심 가치로 떠오른 ‘생산성 극대화’는 타자의 부정성과 같은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모두 비교 가능한 ‘같은 것’으로 도열시킨다.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 가능한 것’으로 됨으로써 더욱 경쟁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이에 금지가 아닌 ‘과잉소통과 소비’, 배제와 부정이 아닌 ‘허용과 긍정’이 외쳐진다. ‘할 수 있다’는 캐치 프레이즈. 금지보다 긍정이 생산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과 사회는 개개인의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개인으로 하여금 더욱 활동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한병철은 성과사회에서 활동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오히려 주체로 하여금 강제하게 하며 ‘고유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만든다고 본다.
성과사회.
성과사회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주인은 성과주체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로 만든다.
성과사회의 주요 상품은 ‘자기 자신’이다.
성과사회는 성과주체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더욱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 것을 부추긴다. 이 과정에서 각자의 ‘고유함’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비교 가능한 것’으로, 마트 선반에 가지런히 놓여있듯, 줄 세워진다.
성과사회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하여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성과의 극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자유’에 대하여서는 ‘강제’하는 자기 착취적 요소가 있다.
우리는 스스로 성과를 내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억압’하거나 ‘강제’한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읙 ㅡ림자를 초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 속에 빠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과사회는 성과주체로 하여금 자신에게 책임을 물게 하며 ‘죄’를 짊어지게 한다. (심판자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변모한다.)
자기 스스르와의 싸움으로 인한 ‘과도한 긴장과 과부화, 탈진과 우울’상태로 자신을 소모하는 성과주체는 결국 ‘우울증’이라는 시대적 질병으로 결말을 맺는다.
과도한 긴장으로, 내적 에너지를 끊임없이 소모한다.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착취자가 된다.
자신의 무한한 착취는 타자와 다른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없는 끊임없는 개발을 통해서 자신을 상품화 하고 결국에는 자기 강박에 내몬다.
제자도
마태의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지역 회당 내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들과 연관성을 갖기 위해 노력했을 수도 있다.
마태는 예수가 율법에 명시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 참된 교사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이 예수를 따른 것처럼 마태 공동체로 하나님께 인정받도록 바로 서야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 가족, 친구 그리고 이웃들로부터 거부와 적개심을 받고 있는 어려운 상황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팔복에서 말하는 성품은 예수님의 품성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품성을 닮은 제자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런 제자에게는 천국이 유산으로 주어지며, 위로를 받고,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묵상
‘4:25’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랐다.
‘5:1’에서 예수는 그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신다.
‘5:2’ 예수님이 하신 일은 ‘가르치는 일’이었다.
‘복이 있나니 “ (3, 4, 5, 6, 7, 8, 9, 10, 11) 9번 나타난다. 9복이다.
3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10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0, 11, 12절에서 ‘박해’가 3번 나타난다.
1-12절 문맥에서 10-12절이 3/4의 분량을 차지하는데, 그 중에도 ‘박해’라는 단어가 중심이 된다.
10절에서 ‘의’를 위하여 받는 박해는, 11절에서 ‘예수’로 인하여 받는 박해로 구체화된다.
의는 곧 예수를 위하여 사는 삶이다.
주석
‘산 위의 예수’도 마태복음에서 좀더 일반적인 주제이다.
이 모티프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님의 위대한 설교가 시작되는 팔복에는 구약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암시가 들어있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아마도 하나님을 유일한 희망으로 인식하고 있는, 예언서와 지혜의 구절들, 특히 이사야에서 나타나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암시한다. ‘사61:1
Isaiah 61:1 NKRV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사 61:6’은 영적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주님께 와서 먹고 마시게 되는데, 이방나라들의 재물과 영광을 먹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을 향하여 ‘사 61’장의 말씀이 성취되는 주님의 나라 백성들이라고 이야기하시는 것과 같다.
이들은 복이 없는 인물들이었으나, 주님이 전하시는 아름다운 소식을 듣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하여, 황폐한 땅을 다시 새롭게 건축할 것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 이방 나라들의 섬김을 받게 될 사람들이다.
제자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신약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만 아니라 ‘그의 삶과 운명을 나누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을 의미한다.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자들에게 ‘오 복되도다’ 라고 하지 않는다.
산 위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자들에게 ‘ 오 복되도다’라고 하신다.
3절 :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필요’를 안다는 것이다.
5절 : 온유함은 힘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힘의 사용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나님은 처음에 에덴 동산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다. 그러나 타락 이후로 그 땅을 상실한다. 이제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얻게 될 것이다.
6절 - 굶주림과 목마름은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과 연결된다.
7절 - 전통적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의로운 사람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은 다르다. ‘자비를 베푸는 자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께 자비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비는 다른 사람의 나쁜 상황에 대하여 슬픔을 느끼고, 그것을 위하여 무언가를 해주고자 하는 마음이다.
8절 - 마음의 순수함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에게 요구된다.
마음이 순수하다는 것은 -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좋은 번역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를 보는 것’이다.
9절 - 화평이라는 단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해당되는 말이다.
사람들을 친구로 만드는 사람들,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도록 돕는 사람들,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사람들이 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다.
신적 수동태 - 하나님은 그들을 나의 자녀라고 부를 것이다.
10절 - 이는 당시 교회가 박해를 받고 있던 상황을 가정한다.
‘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다.
11절 - 10절의 박해받는 자들은 구체적으로 제자들과 교회에 적용하고 있다.
욕하다는 것은 ‘강한 언어 학대’를 의미한다. 어떤 주석가는 유대인들의 언어 폭력이 극도로 악랄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격모독을 겪은 사람은 그 지역 공동체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렸다.
이들이 박해 받는 이유는, ‘예수를 따르기 때문에’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이기 때문에”이다.
이처럼 박해를 받을 때, 당신은 사실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12절 - 마태는 어려운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계속하여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상’은 합당한 상의 개념이 아니라, 내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을 훨씬 초과하는 개념의 ‘상’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는 은혜로운 상을 의미한다.
복, 행복
자아와 초아자의 일치?
과열된 도시의 시간은 쉼 없이 빠르게 흘러간다. 도시의 공간에는 나와 타자 사이의 거리에도 여유가 없다. 늘 부딪치지 않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버스는 급하게 떠나 버린다. 결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식당에 가도, 쇼핑몰에 가도 북적이는사람들에 둘러 싸이고, 은행 업무를 보거나 한 끼 식사라도 해결하려면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한다. 도시는 항상 분주하고 수선스럽다. 그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신경은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처럼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아직 이유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불안과 관련된 정신장애는 시골에 비해 도시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환경심리학자인 로저 울리히는 담낭 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병상에서 창문으로 자연 풍경을 볼 수 있을 때 콘크리트 벽만 볼 수 있는 환자들에 비해 더 빨리 회복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냈다.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환자이 각성 수준이 낮아지고, 심장 활동이 더 건강해지며, 뇌 활동이 더 평온해짐으로써 회복 속도를 촉진한다는 것이다.
많은 연구들에서 인간은 보편적으로 둥근 윤곽선을 선호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곡선을 보면 안와전두피질과 대상피질 같은 보상이나 쾌락을 관장하는 뇌 영역이 크게 활성화된 반면, 삐죽한 모서리를 보면 공포를 지각하고 반응하는 기제의 중요 영역인 편도체 활동이 증가한 것이다.
도시의 과도한 소음 역시 인지 수행과 정서 상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처럼 감각이 과도하게 자극받고, 위협이나 범죄에 항시 노출된 도시 환경에서 어쩌면 우리의 뇌와 신경과 마음이 편안하게 이완되고 쉴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고통
인간이 육체적민 면과 정서적인 면 모두에서 겪는 고통이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악이 유혹과 타락을 통해 세상에 들어왔다. 그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와 인간 상호간의 소외, 깨어진 관계들, 육체적 고통과 정서적 고통, 고된 일, 죽음이었다. 그래서 성경 정경의 초반부는 고통을 낙원의 불법 침입자로 묘사한다.
요셉이 학대받는 것이나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살이 한 것
(그들의 애굽의 학대를 받고 해방을 염원하였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의 교회는 사탄과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으며 애통하고 있었다.)
구약 내러티브들은 하나님을 자기 백성의 고통들에 대해 고뇌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복음서들은 고난이 자신의 사역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라고 선언했던 예수의 고통들에 초점을 맞춘다.
예수는 다른 사람들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고통을 겪었고, 깊이 동정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지복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에게 복을 준다.
버림받음을 경험하기까지 했던 그리스도의 수난은 괴로움과 고통의 중심이었다.
성경은 자주 고통을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한 인류 가운데 사는 것의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결과로 묘사한다.
일부 고통은 자신이 저지른 죄나 타인들이 저지른 악행의 직접적인 결과다.
(악은 관념이 아니다. 악은 실제이고 경험되는 것이다.)
현재의 고통들은 부패에 의해 묶여 있고 속량을 기다리는 피조물의 탄식을 반영한다.
신자들은 부활의 약속과 회복에 대한 기대를 붙든다.
탐바스코는 성경의 전통에서 핵심적인 질문들은 ‘왜’ 내가 고통당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부당한 고통, 우리 자신의 죄성, 우리 공동체의 패배, 우리 중 대다수를 기다리고 있는 때 이른 죽음 등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지, 극복할 수 있는지, 우리 하나님께 신실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겸손과 인내로 받아들여야 하고, 주님 안에서 피난처를 구하고 그분을 신뢰해야 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해야 하고, 신실함을 유지해야 한다. 심지어 신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통과 시련 중에서도 주님 안에서 기뻐할 것을 권한다.
전반적으로 성경은 신자들에게 고통에서 물러나거나 수용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신자들에게 할 수 있는 한 고통을 완화할 것을 요구한다.
예수가 그러했듯이 신자들은 고통을 능동적인 방식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야 하고, 서로의 짐을 져야 하며, 아픈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환대를 보이고 갇힌 자들을 돌봐야 하며,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서구의 풍요, 안락, 현대 의학의 발전과 더불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픔 없고 고통 없는 삶을 신성한 권리 또는 약속으로 보는 경향을 보인다.
청소년기는 발달단계상 급격한 변화로 인한 정서적 혼란과 학업부담 등으로 정신건강에 위협을 받을 수 있다.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2018년 13-18세 청소년의 42.7%는 전반적인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50.7%는 학교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응답하였다.
2019년 한국 어린이와 청소년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OECD 22개국 가운데 20위에 해당되었고, 삶의 만족도는 최하위를 기록하였다.
발달적 과도기라 할 수 있는 청소년기의 특성에 더하여 성적이나 진학문제로 인한 스트레스가 한국 청소년의 정신건강을 악화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고통 감내력 : 고통스러운 내적 경험을 견뎌내는 능력으로서, 불쾌한 경험에 머물며 견뎌내는 과정을 포함한다. 즉 고통 감내력이란 스트레스 상황에서 겪을 수 있는 고통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인 것이다.
낮은 고통 감내력은 선행 연구들에서 다양한 심리장애의 위험요인으로 확인되고 있는 바, 우울과 불안과 같은 정서장애, 물질사용장애, 경계선 성격장애와 반사회성 성격장애, 자해와 자살행동 등 다양한 정신병리의 발생과 유지에 밀접히 관련된다.
고통 감내력이 낮을수록 우울 및 불안 증상을 많이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고통 감내력이 낮은 집단은 생활 사건을 많이 경험할수록 우울 증상이 증가한 반면, 고통 감내력이 높은 집단은 생활 사건이 우울 증상에 미치는 영향이 완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활사건이란, 일상생활에서 개인이 보편적으로 경험할 수 있으며 ‘변화와 적응’이 요구되는 긍정적, 부정적 사건을 말한다.
Linehan(1993)에 따르면, 고통 감내력이 낮은 경계선 성격장애자들이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충동적인 행동을 더 자주 한다는 점에서, 고통 감내력의 부족이 경계선 성격장애의 핵심 기제라고 보았다.
비슷한 맥락에서, 고통 감내력이 낮은 사람은 부적 정서를 완화시키기 위해음주 행동을 보이는 경향이 있었으며, 고통 감내력이 낮은 알코올 사용장애 환자는 금주기간이 짧고 치료 초기에 탈락될 가능성이 유의하게 높은 것으로 보고되었따.
고통은 개인으로 하여금 불쾌한 상태를 감소 또는 제거하는 반응을 하도록 유도하는데, 고통을 빠르게 완화시키는 반응을 ‘회피 또는 도피반응’이라고 한다.
이 때 고통이 유발하는 자동적인 회피반응을 억제하는 것이 ‘고통 감내력’이라 할 수 있으며, 결국 고통 감내력이란 고통스러운 내적 경험을 할 때 회피반응을 억제하는 능력으로 정의 될 수 있다.
정지현과 권석만(2013)의 연구에서, 고통 감내력은 부적 정서 및 정적 정서의 영향을 넘어 우울과 불안 증상 및 심리적 안녕감과 삶의 만족도를 유의하게 설명하였으며, 이들 관계에서 탈중심화가 어렵고 회피적 대처를 많이 함으로써 우울 증상을 만힝 경험하는 반면, 고통 감내력이 높을수록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회피적 대처를 덜 함으로써 심리적 안녕감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떤 상황의 한 면에만 주의를 집중해 다른 측면이 무시되어 비논리적 추리를 하게 되는 것을 ‘중심화’라 하고 반면, 자신과 타인의 관점에서 모든 가능한 측면에 주의를 배분하여 대상에서 얻어진 정보를 통해 보다 적절한 추론을 끌어내는 것을 ‘탈중심화’라 한다.
중심화가 자신에게 향해진 것을 ‘자기중심성’이라 하며, 유아기 사고의 특색을 이루고 있다. 자기중심성에서의 탈중심화는 인지발달과 사회화의 과정을 전제로 한다. 탈중심화가 이루어진 유아는 양, 크기, 무게에 관한 보존개념과 서열화 및 분류능력을 갖게 된다.
청소년기는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조절하고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전략을 발달시켜야 하는 시기로서, 고통 감내력은 아동기에 걸쳐 형성되어 초기 청소년기에 안정화된다고 알려져 있다.
만일 청소년기에 고통 감내력을 충분히 발달시키지 못한다면 부적응적인 회피반응을 통해 다양한 심리장애가 초래될 수 있다.
우울이나 불안과 같은 내재화 문제와 더불어 물질 남용이나 비행과 같은 외현화 문제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유아들이 자신과 어머니에 대한 신뢰감을 발달시키는 것같이 청소년들은 그들이 믿고 따를 모델을 찾는다.
유아들이 부모를 떠나 인형이나 베게 등의 가시적인 변환적 대상물을 자신의 일부로 여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청소년들은 부모를 떠나지 않지만 친구나 정서적 차원의 변환적 대상물을 만든다.
정체성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자아형성이지만, 자아를 형성한다는 것은 내가 타인과 구별되는 자아식별을 내포하는 것이다.
자기를 만들어가고 자기가 타인과 다른 것을 찾아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시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청소년기에 경험하는 고독과 외로움은 모든 인간에게 있는 궁극적인 공허의 문제이다.
피터 버거는 현대 사람들이 맞는 위기를 영구적인 정체성의 위기로 보고,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가 ‘홈리스’가 되었다고 이해한다.
유독 청소년기에 들어서면 이것이 심각하게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는 이유가 있다. 청소년기가 되면 자기됨을 찾아가는 작업을 의도적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청소년기가 되면 이러한 공허의 문제를 채워나가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질서와 의미를 생성한다. 그들은 더 이상 숨어있지 않고 친구, 문화, 놀이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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