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21 저녁] 거룩한 산제물로 자신을 올려드리는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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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426 이 죄인을 완전케 하시옵고 / 423 먹보다도 더 검은
본문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많은 성도님들께서 관심과 기도로 도와주셔서 아시겠지만, 이번주일과 다음주일, 주일 두번에 걸쳐서 청년부 수련회를 진행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 살펴볼 주제 역시도 청년부 수련회의 주제인 “예배를 회복하자" 와 연속선상에 있다. 지난 주일 저녁예배를 통해서 오늘 본문과 동일한 본문으로 예배의 영광에 대해 말씀을 전해 들었다. 오늘은 같은 본문으로 “거룩한 산제물로 자신을 올려드리는 예배" 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 한다. 바라옵기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올려드리는 모든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본문의 말씀 롬12:1 을 보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다분히 구약의 제사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본문 1절의 말씀은 구약 제사의 어떤 광경들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일전에 제가 번제에 대해서 설교했던 적이 있다. 번제 제사를 드리는 광경을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라. 번제의 제물은 목이 잘린 채로 피를 흘리고 있고, 몸은 반으로 갈라 쪼개지며, 내장 중 더러운 것들은 제하여 버리고, 살점들은 하나하나 칼집을 넣는다. 제사장들은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피를 담아내는 과정들 가운데 제단 주변으로 여기저기 피 투성이일 것이다. 피로 얼룩진 제사장들의 옷과 제의 기구들은 너무나도 참혹한 광경일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이처럼 피로 낭자한 장면을 볼 때 누구나 공포심을 느낀다. 두렵고 잔인하며 온몸이 쭈뼛거린다. 그래서 이런 장면이 등장할 때마다 19세 미만 시청금지라는 딱지가 붙기도 한다. 그토록 참혹하고 잔인하며 공포스럽기 때문에.
구약의 제사드리는 광경이 이와 같았다. 죽음을 직감한 제물로 바쳐질 짐승의 두려움에 떠는 모습들,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짐승의 울부짖음, 목이 베어진 채로 각이 떠지고 있는 제물의 광경, 여기저기 온통 피로 얼룩진 참혹한 모습, 속이 울렁거릴 것 같은 피비린내 등. 이러한 참담한 광경은 그 자체만으로 예배자에게 아주 강렬한 메세지를 전달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당해야 할 비참한 죽음이 바로 이와 같다" 는 것이다. 그 비참함, 그 처참한 죽음은 본래 내가 당했어야 했던 일이다.
이 제사의 핵심은 제물의 부정한 부분을 제외하고, 그 제물 전체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었다. 이는 예배자의 죄를 대신하여 짐승이 죽임당하는 희생제사였다. 물론 구약의 희생제사는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일종의 모형이었다. 예배자의 죄를 대신하여 짐승이 죽임당하는 희생제사는 일종의 그림자요 모형이다. 그 실체가 되시며 자기 자신을 완전한 희생제물로 올려드리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부분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 모형의 본체,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천년 전 자기 자신을 완전한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심으로서, 모든 신자들의 죄의 문제를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해결하셨다.
우리가 로마서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은, 2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게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그분과 믿음으로 연합된 그리스도인 역시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증언한다. 이제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로서 참 성도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날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물로 올려 드려야 한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방금 읽은 구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고 말한다. 지금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거룩한 산제물이 무엇일까? 지금 바울은 의도적으로 구약 희생제사의 이미지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 잔인하고 처참하며 참담한 광경을 말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을 그렇게 화목제물로 올려 드리셨던 것처럼, 이제 그분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제단 위에 올려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렇다.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성도들은 이제 그분의 쫓아 우리 자신을 번제단 위에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제물로 올려 드려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나를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인가? 구약 희생제사처럼 나 자신을 실제적으로 죽이라는 것인가?
바울은 이에 대하여 본문 2절에서 조금 더 명확하게 해설하고 있는데, 2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이지만, 여전히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참된 성도라 할지라도 죄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심으로 우리 안에 새롭게 창조된 정직한 영, 정직한 마음을 불어넣어 주셨지만, 여전히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여전히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지는 육신을 가진 상태이기에 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렇기에 날마다 나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복종시키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내 안의 죄의 정욕들과 싸워가는 작업, 죄악된 본성을 죽여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분명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임하는 예배 가운데 죄인의 신분이 아니라 아들의 신분으로 담대하게 들어가게 되었고, 참되게 아버지 하나님을 예배함이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가 아버지께 드리는 참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죄사함의 은혜를 날마다 누리며, 아버지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 힘과 능력을 예배를 통하여 공급받는다. 하지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죄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요 그분의 백성, 그분의 자녀가 되었으나 여전히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죄의 영향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우리를 억압하고 억누르던 죄와 사망의 권세는 깨어졌지만, 여전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 우리 몸의 구속이 완성되는 날,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거듭해서 나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아버지께 올려드려야 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 우리가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한 성화는 완성되진 않는다. 성화는 언제 완성되는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모든 성도들을 일으키사 영광의 몸, 부활의 몸을 입게 하실 그 날에 비로소 완성된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영화" 라고 한다. 영화되기 전까지 우리의 성화는 완성되지 않는다. 성화, 곧 점점 거룩해가는 과정은 사람마다 그 진행속도가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갑자기 진행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아주 오랜 기간동안 더디게 진행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신 자, 칭의된 자는 반드시 성화의 단계를 거쳐간다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는 반드시 같이 간다. 하나님은 성화되지 않을 자를 칭의하지 않으신다.
바울은 갈2:20 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말씀하였다. 이는 매일 같이 죄악된 나를 죽이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어 나의 더럽고 추악한 모든 것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그분의 피로 닦으시고, 청소해 주시며, 어지럽고 더러운 내 마음을 정돈해 주시고, 그분의 거룩하심과 영광이 내 안에 충만하게 임하시며, 이제 내 모든 주권들을 그분의 손에 올려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요, 거룩과 성결로 나아가는 성화의 삶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가장 먼저 행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 죽는 것이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바울처럼 날마다 내가 죽는 것이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번제단에 제물로 올려진 제물이 죽지 않고 계속 살아있다면 이 제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기 위해서는 그 제물이 죄의 짐을 짊어진 채로 처참하게 죽어야 한다. 죽어야만 한다. 바울은 말한다.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이 받으실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거룩한 제물이 되도록 나의 부정한 모든 것들을 제거하여 물로 씻어야 하고, 내 모든 것들이 번제단 위에서 잘 타오를 수 있도록 내 몸통을 가르고 몸에 하나하나 칼집을 넣어야 한다. 이 과정이 쉽겠는가? 우리가 종이에 손가락 조금 베어도 그것이 얼마나 화끈거리던가? 하물며 우리의 죄로 기울여진 본성, 우리의 죄로 물든 본성을 잘라내고 끊어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죄의 지배 가운데 놓여있었을 때, 죄가 주는 즐거움과 탐욕에 익숙했던 우리였다. 악으로 완전히 기울여져서 도저히 의를 택할 수 없던 우리였다. 그랬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부터 죄에 속하였던 모든 것들, 죄에 익숙했던 내 생활 습관들을 하나하나 끊어 내어야 한다. 잘라 내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다. 때로 아프고 고통스럽다. 악을 버리고 의를 선택할 때 손해보는 것들이 생길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마음을 날마다 말씀으로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여러분 자신을 거룩한 산제물로 올려드려야만 한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의 죄악된 부분들을 자르고 도려내며, 칼집을 넣는 행위들이 여러분들의 신앙 여정 가운데 일어나야 한다.
그 모든 일들의 중심에 바로 예배가 있다. 이 모든 일들은 예배를 통하여, 예배 안에서 일어난다.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예배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뭔가 이런 일들이 내게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예배는 드리고 싶지 않다? 뭔가 더 거룩해지고 싶고 뭔가 더 예수를 닮아가고 싶으며 뭔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고 싶은데 예배는 싫다? 뭔가 은혜를 받고 싶은데 예배의 자리에는 앉아있기 싫다? 착각하지 말라. 예배를 통하지 않고는 이런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배 밖에서 뭔가 찾으려 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한다면 마땅히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방법대로 그분을 섬겨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모든 법규대로 아론이 제사를 드릴 때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와 제단위의 모든 제물을 불살랐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진실되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셨다는 증거로 불을 내려 주셨다. 당시 제사장은 이 불을 절대로 꺼뜨려서는 안되었다. 왜냐하면 이 불은 인간이 고안해 내거나 인간이 만든 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부터 출발한 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불은 하나님께서 친히 내리신 불이었다. 그 출발점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이 불이 날마다 꺼지지 않기 위해 제단의 불씨를 지켜야 하는 것은 제사장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꺼지지 않는 불은 결국 택하신 백성들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영원히 합당한 예배를 가리킨다. 제단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늘 예배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고, 그 불을 주셨다는 것은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길 기대하신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의 예배에 접목해 보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불씨를 여러분들은 성실하게 잘 지켜가고 있는가? 나의 불씨는 어떠한가? 여러분의 제단 위의 불은 지금도 변함없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가? 혹 심지가 꺼져가기 직전은 아닌가? 과연 내 마음 속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단에는 그 불씨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는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의 제사가 멈추지 않고 선포되고 있는가? 나 자신을 거룩한 산제물로 올려드리는 회개의 제사, 성화의 제사가 멈추지 않고 진행되고 있는가?
특별히 이 제사를 신약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꺼지지 아니할 불길을 내려주셨으니 바로 성령님이시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보내주실 보혜사를 기다리며 기도하던 무리들에게 성령님이 강림하시면서 각 사람의 머리 위에 불꽃같은 것이 임하였다고 사도행전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신약 교회에게 내려주신 불은 바로 성령님이었다. 성령의 불은 그리스도인의 마음 가운데 여전히 잔존하는 죄악들, 불순함, 연약함, 게으름, 나태함을 지속적으로 불태우시고 소멸하시는 능력과 권능의 불이시다. 그분은 영원토록 우리 마음 가운데 좌정하셔서 우리를 성화의 삶으로 인도하시고 무엇보다 능력과 권능의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게 이끄신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이 불길을 유지해야 할 사명이 주어졌다.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늘 그 불을 유지하는데 힘써야 했다. 하지만 그 불은 하나님의 성전이 훼파되면서 결국 사그러들고야 말았다. 그러나 영원히 사그라들지 않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영원토록 내주하신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누구라도 그 마음 속에 계시는 성령님을 빼앗길 수 없다. 세상 어느 존재도 그분을 감히 꺼뜨릴 수 없다. 어떤 권세라 할지라도 그분을 우리 마음 속에서 사라지게 할 수 없다. 바울이 롬8장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소멸시킬 수 없다. 왜? 이 불은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능력의 불이신 성령님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존귀하신 그분께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 가운데 거하신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할렐루야.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특별히 청년부 여러분, 우리의 힘으로는 나 자신을 온전하게 하나님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올려드릴 수 없다. 내 능력과 내 지혜를 의지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다. 나 자신의 경험이나 내가 체득한 지식으로도 이 악한 세대 가운데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할 수도 없고, 변화를 받을 수도 없으며, 아버지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조차 할 수 없다. 저는 감히 단언한다. 앞에 서 있는 저는 할 수 없다. 또한 함께 앉아있는 여러분도 할 수 없다. 우리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가능하게 하신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한 여러분 마음 가운데 영원까지 좌정하시는 성령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도우사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합당하신 거룩한 산 제물로 변화시켜 가실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창세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릴 위해 낮고 천한 이 땅 가운데 내려오셔서 우릴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시며, 우릴 위해 도우시는 삼위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와 같이 변화시킬 것이다.
빌1:6 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우리 안에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이루어가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하시고, 칭의를 허락하신 그분께서 또한 성화의 단계를 걸어가게 하실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사 영화의 단계에 이르게 인도하실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신다. 하나님이 시작하셨으니 하나님이 완성하실 것이다. 신앙의 깊이가 더해져갈 수록 우리 마음에 거룩을 향한 갈망을 더하여 주시고, 성화의 삶을 소망하게 하시며, 우리의 신랑되시는 사랑하는 예수 닮기를 바라고 앙망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소원대로 이루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라.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소원대로 이루실 것이다.
설교의 결론을 맺으려 한다. 연애를 생각해보라.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떠올려보라. 서로 사랑한다면 어떠한가?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고, 더 많은 추억들을 만들고 싶다. 무엇보다 사랑하면 서로 닮아간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시는가? 거룩한 산제물로 자신을 올려드리는 일은 어떻게 보면 우리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인도하셔야만 가능한 일이다. 내 힘과 내 의지와 내 뜻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함으로 그분께 온전히 접붙인 바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거룩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된다. 나 자신을 날마다 죽이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이 살아 계시기를 사모한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 살기를 앙망한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름다운 주님을 점점 더 닮아가길 원하게 된다. 그분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즐겁고, 그분을 묵상함이 기쁘며, 그분께 나아가는 예배의 자리가 복되다. 그분이 거룩하시니 나도 거룩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그분이 의로우시니 나도 악을 버리고 의를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 그분이 사랑이시니 나도 그 사랑을 닮아간다. 우리 안에 거룩한 열정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내가 원하고 바라며 간구하는 성화를 그분의 능력으로 이루어가신다. 거룩한 산 제물로 나 자신을 기꺼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하나님이 받으시기 합당한 예배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가신다. 거룩한 주님의 신부인 교회의 참된 모습으로 나를 성숙하게 하신다. 특별히 예배를 통해서.
예배 가운데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선재적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며 강력한지 깨닫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의 허물과 죄를 발견하게 되며,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이켜 거룩과 성결의 삶을 사모하게 된다. 말씀을 통하여 인내를 이루게 되고, 말씀을 통하여 감사하며, 말씀을 통하여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 가운데 품게 된다. 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길 구하게 되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과 능력과 위로를 경험하며, 기도를 통하여 나의 뜻을 굽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 또한 세례를 통하여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크고 위대하신 사랑을 깨닫게 되고,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나도 동참함을 깨닫고 믿음으로 고백하게 되며,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과 그분의 희생을 묵상하게 하시고, 성찬을 통하여 우리의 영이 자라가게 하시며, 성찬을 통하여 우리의 영이 천상의 예배에 참여하게 하신다.
따라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예배가 이와 같이 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단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빈 껍데기 예배가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사귐을 누리는 예배,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을 공급받는 예배, 특별히 오늘 설교 제목처럼 나 자신을 거룩한 산제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이다. 바라옵기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특별히 우리 청년부 여러분들의 예배가 이와 같이 하나님 흠향하시는 예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