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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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911테러와 함께 알카이다 조직을 무너뜨리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특히 핵을 보유하고 핵을 가지고 테러를 가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는데, 어느날 미 CIA정보에 빈라덴이 숨어 있는 곳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25명의 특수부대를 파견해서 빈라덴을 사살했다. 그러자 핵을 사용한 테러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져 버렸다.
고대사회나 현대에서도 전쟁은 정보력을 기반으로 그 전쟁에 나온 인솔자나 왕을 먼저 죽이려고 한다. king이 체크 메이트가 되면, 장기로 말하자면, ‘장이요~’라며 장이 먹히면 모든 전쟁은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귀도 한 공동체 리더를 중심으로 집요하게 넘어뜨리려 한다.
죽이려는 음모
1절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그 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
4장은 외부적인 적이 성벽 재건을 방해했고, 5장에서는 내부적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제 6장으로 들어오면서 또 한 번의 위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번에는 성벽재건의 리더인 느헤미야를 제거하려는 위기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악의 신실함을 확인한다. 악은 쉬지 않는다. 정말 부지런하다. 그리고 마귀는 포기할 줄을 모른다.
지금까지 나왔던 모든 대적들이 다시 연합하여 느헤미야를 공격한다. 산발랏과 도비야 그리고 아라비아 사람 게셈은 2장에 나왔었는데, 성벽을 재건하겠다는 느헤미야와 이스라엘을 비웃으며 방해했던 인물들이었다. 이제 성벽이 완성되어가자 위기의식을 느끼고 최후의 발악을 한다. 이제 느헤미야는 성문만 달면 모든 성벽의 완성을 앞둔 시기였다.
우리성경은 “산발랏과 도비야”로 시작되지만, 히브리성경은 “들려왔다”는 수동형으로 시작된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 성벽이 재건되리라 생각지 못했는데, 여러 어려움을 뚫고 재건되니까 견디지 못하고 한 사건을 기획하게 된다.
2절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그들은 느헤미야에게 만나기를 청했다. 겉으로 보면 중립지대에서 만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노평지는 산발랏의 영향력이 더 강한 곳이었다. 그들이 느헤미야를 만나려는 이유는 악이었다. 우리 성경은 “나를 해하고자”이렇게 번역되어 있는데, 직역하자면 “악을 창조하려고 했다”라는 말이다. 우리 성경은 잘 번역하였다. 이것을 알고 있는 느헤미야는 이 만남을 거절한다. 아마도 페르시아 왕의 곁에서 숱한 음모를 보고 들었던 직업이었기 때문에 무엇인가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을 것이다. 아니면 조금 더 느헤미야를 무딘 사람으로 본다면 느헤미야는 그가 대적들에게 답한 것처럼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 거절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평소 느헤미야의 모습과는 다르다. 느헤미야는 그들의 악을 간파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4절을 보면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4번이나 사람을 보낸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느헤미야를 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이들이 얼마나 악한 자들인가를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도 정신이 번쩍 든다.
은보 가족 여러분, 믿음의 싸움은 한 두 번 싸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귀는 우리를 계속하여 공격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 공동체도 부흥회를 하면서 은혜받은 것으로 안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은혜를 쏟아 버리도록 마귀는 성실하게 나를 찾아와 심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3절 말씀에 나온다.
3절 “내가 곧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이것은 느헤미야의 변명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에 집중하는 삶이다. 예수님은 대표적인 제자 3명을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셨다. 그것에서 신비한 체험을 한 제자들은 그곳에 있고 싶어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산에서 내려오신다. 예수님께서 3년이라는 시간을 사역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사명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도 몇 번이나 목숨을 구하면서도 이방인의 사도로 순종하였던 이유는 사명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시험에 든다는 것은 내게 맡겨진 사명과 멀어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예를들면 제가 목사인데, 말씀 맡은 것과 기도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은 시험에 들어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면 눈이 다른 곳으로 돌아간다. 교사의 자리에서 벗어나 있고 찬양대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거나 내게 맡겨주신 자리에서 이탈하거나 이탈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귀가 나를 제거하려는 악이다. 다시 돌아오셔야 한다.
믿음은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믿음을 낭만적으로 생각하면 마귀의 밥이 된다. 믿음은 치열한 영적 전쟁에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치열한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정신 없이 살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다. 물론 열심히 살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열심있는 삶 가운데서도 삶이 심플해야 은혜받는 자리를 지킬 수 있다. 삶이 복잡하면 영적인 일에 게을러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만남이나 상황들이 범죄할 것 같은 상황이라면 동참하지 않는 지혜도 필요하다. 느헤미야는 그들과 만남이 악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4번이나 요청해도 만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죄를 범할 것 같고, 넘어질 것 같으면 일을 만들지 않아야 할 단호함도 필요하다.
2. 가짜뉴스
5절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냈는데”
사람은 두 명만 악한 마음을 먹으면 한 사람을 바보 만들 수 있다. 오노 평지에서 다시 만나자고 끊임없이 요청하였지만 OH! NO~하면서 거절하였다. 그들은 느헤미야가 듣지 않자 이제는 방법을 바꾸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여론전이나 가짜뉴스를 만드는 것이었다. 고대사회에서 편지는 끊으면 묶고 인으로 봉하기 때문에 편지의 내용을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 산발랏은 인을 봉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이 편지를 사람들이 읽도록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내용이 퍼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있다면 저는 ‘억울함’이라고 말한다. 억울한 일을 당해 보셨는가. 자다가도 잠을 깨고, 갑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가 오르기도 하고,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나기도 한다. 정말 견디기 어렵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것을 즐긴다. 마녀사냥이 성공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말하며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정말 다를까.
6절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너와 유다 사람들이 모반하려 하여 성벽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편지의 내용은 느헤미야가 반역을 일으켰다는 말이다. 페르시아는 통치하는 민족마다 자율성을 허락했지만, 반역만큼은 엄히 다스렸다. 그래야 거대한 제국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반역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그런데 산발랏과 대적자들은 느헤미야가 왕이되려고 한다며 거짓 뉴스를 퍼트린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비슷하다.
이런 유형의 범죄가 더 악한 것은, 본인은 3자인 것처럼 하면서 다른 사람이 전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저는 지금도 어리숙한데, 신대원에 다니던 그때는 더 어리숙했다.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잘 속는 사람이었다. 등록금 때문에 학교 원우회 총무로 섬겼는데, 교수님과 교수님들 사이에서, 학생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가루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가짜 뉴스는 터무니 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약간의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혹하는 것이다. 그때 저는 사람들이 자살하려는 마음을 왜 먹는지 알았다.
지금은 다 목사님들이 되었겠지만, 저를 찾아와 협박하는 사람들도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우리 교회 계셨던 이광해 목사님께서 발언대로 나와서 저를 많이 지켜 주셨다.
그 이후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지금도 뉴스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반대되는 사람이라도 여지를 남겨 놓는다. 사람을 죽이려면 어떤 내용이라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내 귀에 들린다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한다.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비난하고, 똑같이 거짓 뉴스를 퍼나르는 스피커가 되면 안 된다. 사람들은 착각하는게 자신은 똑똑하고 판단을 잘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반드시 뛰는자 위에 나르는 자가 있다. 특히 형제님들은 정치적인 판단을 스스로 믿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자매님들은 입과 입으로 들려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듣지 말아야 한다.
산발랏은 느헤미야가 만나지 않고서는 안되는 상황을 만들려고 했다. 만약 느헤미야가 이 위기를 모면하려고 산발랏을 만났다면 오히려 그것으로 더 큰 함정에 빠졌을 것이다. 그때 느헤미야는 이렇게 행동했다.
8-9절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오히려 느헤미야는 스스로 당당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 제 발 저린 것이 없었기에 그것을 감당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오해해도 나만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면 그 모든 오해는 시간이 지나면 회복된다. 그런데 내가 앞서서 풀려고 하면 오히려 상처만 남게 된다. 혹시나 이런 어려움이 생길 때, 잘 인내하시기를 축복해 드린다. 그리고 이런 순간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9절 마지막이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이루지 못하다’할 때, ‘이루다’는 말이 ‘창조하다’는 말이다. 앞에 2절에서 산발랏과 그의 무리들은 느헤미야를 해하고자 악을 창조하였지만, 느헤미야는 성벽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내 손에 힘을 더하여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기도가 아니라 명령형으로 권면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의 간절함이 담겨 있는 요청인 것이다. 그만큼 느헤미야는 이 성벽의 역사를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이 저녁에 우리도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 앞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한다.
3. 스마야의 배신
10절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 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그가 이르기를 그들이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머물고 그 문을 닫자 저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문제는 가짜 편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느헤미야와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스마야가 며칠 보이지 않아서 느헤미야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자객이 올 것이니까 성전 외소 안에 숨어라고 말한다. 외소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소’를 말한다. 그러니까 이곳은 제사장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더구나 논쟁이 있지만, 느헤미야는 내시였다. 거세한 내시는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다. 선지자인 스마야가 이런 잘못된 판단을 하는 이유는 스마야도 그들에게 뇌물로 매수된 사람이었다.
12절 “깨달은즉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느헤미야는 스스로 정결케하였다. 땅을 사지도 않았고 총독으로서 세를 거두어 배불리지도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총독으로서 과분한 예전도 백성들이 가난으로 고통 중에 있었기 때문에 절제하였다. 그런데 스마야는 뇌물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가며 거짓 예언으로 느헤미야를 넘어뜨리려 했다. 여기에서 세상 참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이 이런 상황 때문에 나왔을 것이다.
스마야뿐만 아니라 14절을 보면 여러 선지자를 매수해서 느헤미야를 속이려고 한다. 6장에 나오는 이것으로 끝났을까. 아니다. 이들은 자손들을 이스라엘 백성과 결혼시키면서 끝까지 살아남는다.
은보 가족 여러분, 우리 눈에 보기에 정의는 늘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정의가 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악은 계속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악한 일을 창조할 수 없고, 그 일에 동참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정의에 서 있는지, 악을 만드는지 다 알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을 다 기억하고 계신다. 우리가 주의 품에 안기는 그때 우리 눈으로 흘린 그 모든 시름을 다 닦아 주신다. 그렇기에 악을 창조하는 자리에 서 있지 않으시기를 바란다.
계21: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살리니 죽이니’ 소리를 들으며 살아갈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시다가 갚아 주신다. 그리고 사람을 멸시하고 영혼을 죽이는 자는 이 세상에서 잘 되고, 살아남은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에 소리치게 될 것이다.
<결론>
우리 삶은 짧다. 시간은 빨리 흘러간다. 이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멈추지 않기를 소원한다.
15-16절 말씀을 보면, 성벽 재건이 52일만에 완성되었다. 주위 여러 민족이 놀라고 두려워할 정도로 놀라운 결과였다. 세상은 주어진 스케줄을 따라가지 않으면 도태되고, 실패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속도가 아니라 바른 삶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움직이시면 사람의 시간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16절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바라기는 우리 은보가 무너진 이 대구 땅을 다시 살리는 통로가 되기를 소원한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