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편에서 모욕과 슬픔을 겪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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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새벽기도에 오신 성도님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어제 본문에서 우리는 요나단이 복음의 편에 선 것을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복음의 편에 선 사람이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복음을 따르는 자에게는 수치가 따른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복음을 따르는 자에게는 수치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들에서 다윗을 보호해주겠다고 언약을 합니다. 다윗은 들에 숨고 초하루날이 되어서 요나단은 식사자리에 갑니다. 그 식사자리는 사울과 사울의 군사령관인 넬과 다윗이 동석하는 자리입니다. 다윗이 이 자리에 동석한다는 것은 다윗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왕자인 요나단도 이 자리에 동석해서 식사하는 것이 아니라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엔 사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생각엔 다윗한테 무슨 일이 있어서 다윗이 부정한 상태가 되어서 초하루 식사에 오지 못했나보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에 의해서 부정한 상태가 되면 초하루날 식사를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누구나 실수로 부정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죽은 동물의 사체를 만졌다거나 유출병이 있는 사람과 접촉하거나 하면 그 날 하루는 부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모종의 일로 인해서 다윗이 부정하게 되어서 초하루 식사에 오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다윗이 초하루날 식사에 출석하지 않자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 사유를 물어봅니다. 28절부터 요나단이 사울에게 설명을 합니다. 이 설명은 어제 본문에 다윗이 사울에게 부탁한 내용입니다. 다윗이 매년제를 드리기 위해 고향에 간다는 내용입니다. 30절에 보면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소위 막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하기에는 굉장히 심한 말을 합니다. “이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사울이 정치적임 감각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나단은 그저 다윗과 사울이 마주치는 상황을 피하게 하기 위해 다윗이 매년제에 갔다고 말했을 뿐인데 사울은 다윗과 요나단이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캐치해냅니다. 그리고 아주 무지막지한 말을 합니다. 아들한테 화를 내는데, 자기 아내를 패역무도한 계집이라고 말해가면서까지 아들에게 모욕과 수치를 줍니다. 여기에는 아브넬도 있었고 사울을 섬기기 위한 다른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을 선택한 것이 마치 요나단의 어머니가 벌거벗은 것 같은 수치라고 주장합니다.
31절에 보시면 사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여기 이새의 아들은 당연히 다윗을 뜻합니다. 다윗이 너무 밉고 원수 같으니까 다윗을 다윗이라 부르지도 않고 그냥 이새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요나단을 요나단이라 부르지 않고 패악무도한 계집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사울은 이새의 아들이 살아있으면 요나단과 요나단의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한다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은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의 소유로 착각을합니다. 지금 이 나라가 사울의 나라이기 때문에 나중에 사울이 죽으면 요나단의 나라가 될 것이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지금 요나단에게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이 될지 나라의 주인이 될지 물어보고 있습니다. 이새의 아들을 선택하면 나라를 얻지 못하고 그냥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죽어야 할 자로 묘사합니다. 원어상으로 이 죽어야 할 자는 죽음의 아들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다윗을 다윗이라 하지 않고 그냥 이새의 아들, 죽음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32절에 요나단은 더 이상 말을 아끼지 않고 사울에게 직언을 합니다.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이 말은 다윗이 아무런 잘못도 안했는데 왜 다윗을 괴롭히냐 이 말입니다. 사실 요나단의 말이 타당합니다.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사울은 요나단에 말에 뭐라고 반박한 것이 아니라 단창을 던져서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이 하는 행동을 보면 악령의 역사 때문인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까전엔 요나단이 나라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더니 이제는 단창을 던져서 죽이려고 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에 노하기보다는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에 화가나서 그 자리를 떠납니다. 밥을 먹지 않을 정도로 화가났습니다. 34절에는 번역상의 이슈가 하나 있는데 ‘이는’ 이라는 말 뒤에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어상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요나단을 욕되게 한건지, 다윗을 욕되게 한건지 원어상으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 판단할 수 밖에 없는데 문맥상 사울이 요나단의 면전에서 요나단을 수치스럽게 하고 요나단에게 모욕을 주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요나단을 욕되게 하였다고 번역하는 게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특이한 것은 요나단이 모욕을 당했는데 요나단은 도리어 다윗을 위하여 슬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윗을 옹호하기만해도 요나단 자신이 모욕을 당하는데 다윗을 향한 사울의 미움의 크기가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에 다윗을 생각하면 슬픈 것입니다.
어쨌든 본문을 살펴보면 요나단은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누구를 통해서 이뤄질 것인지 잘 판단해서 사울이 아닌 다윗을 선택하고 다윗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면 요나단이 영광스러워야 하고 잘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사울은 어머니까지 들먹이며 요나단에게 수치를 주고 사람들이 다 보는데서 화를 내고 창을 던졌습니다. 복음의 편에 서니까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을 경험합니다.
(적용)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살면 나에게는 항상 햇빛만 비치고 장밋빛 미래가 펼쳐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이야기하면 뭐 그런걸 믿냐고 이야기 합니다. 교회를 위해 헌신하면 그것을 시간낭비, 돈낭비, 마음낭비라고 핀잔을 줍니다. 그거 할 시간에 일이나 더하라 합니다. 공부나 더 하라고 합니다. 가족들이나 더 돌보라고 이야기 합니다. 마치 교회에 미쳐서 비효율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대합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살면 너의 왕국은 없는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의 편에 서지 않고 자신과 함께 욕망을 추구하는 삶을 살자고 생떼를 쓸지 모릅니다. 복음을 따르는 길은 때론 수치스럽고 또는 모욕적인 일이 될 수 있습니다.
2- 복음을 따르는 자에게는 슬픔이 따른다.
(설명) 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복음을 따르는 자에게는 슬픔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편에 설 때 모욕을 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욕을 당할 수 밖에 없는 현실 때문에 슬프기도 합니다. 34절에 보시면 요나단이 다윗을 변호한 것으로 모욕을 당한 것 때문에 다윗을 위해 슬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나단이 슬퍼하는 내용을 본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복음 때문에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그자체로 속이 상해서 슬퍼할 수 있습니다. 이걸로 슬퍼하는데 누가 이걸 잘못된 슬픔이라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요나단은 좀 더 고차원적인 슬픔으로 슬퍼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대신에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셨고 다윗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역으로 늘 바삐 움직입니다. 요나단이 볼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메시아의 왕조를 세울 것이고 다윗을 통해 구원계획을 이뤄나갈 것인데, 사울이 이걸 알지 못하고 계속 다윗을 없애려고 하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반대편에 서고 복음의 반대편에 서니까 너무 슬픕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데 다윗이 미움을 받으니까 슬픕니다. 복음을 따르는 요나단의 수치스러운 입장이 속상한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가 평가 절하되고 욕되는 것이 슬픈 것입니다. 복음을 따르는 자에게는 이런 슬픔 또한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증명) 대학 다닐 때 전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병원에 병실을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해봐야겠다고 해서 병원 병실을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한 10년 전이니까 그 땐 그게 그렇게 안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병실에 돌아다니면서 전도지를 나눠주고 예수님 믿으세요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다가 저 복도에서 무서운 표정의 할아버지가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여깃 전도하면 어떻게 하냐고 저를 막 뭐라 했습니다. 그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서 저 혼자 혼이 나니까 너무 부끄럽고 창피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좀 높은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병원 이사장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그 할아버지 말씀이 “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인데 교회 다니는 사람이 이런 데서 전도한다고 하고 피해를 주면 되나?” 이렇게 말씀하셔서 ‘아 죄송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한테 어느 대학 다니냐고 물어보시길래 고신대학교 다닌다고 하니까 “아 그래 내가 고신대학교 총장이랑 어디도 같이 가고 그랬어” 하면서 갑자기 총장님과의 친분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혼난게 부끄럽기도 하고 교회 다니는 할아버지가 전도 못하게 하는게 황당하기도 하고 동시에 병원에서 전도해서 곤란해질 것 같으면 혼 안내고 좋게 좋게 이야기해주면 안되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총장님이랑 친한거 같은데 병원에서 전도 했다고 학교 쫓겨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고신에서 쫓겨나면 나는 도대체 어느 교단으로 가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스무살 어린 나이에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복음으로 인해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낄 순 있지만, 그것이 복음의 전파가 방해받는다는 슬픔으로는 이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편에서 복음을 위해 애쓰다가 수치스러운 일이 생기면 자신의 인격에 생채기가 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은 원래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존심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걱정은 접어두고 복음 자체가 확고하게 서지 못할까봐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슬픔인지 모릅니다. 복음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슬픔입니다. 자신의 입장보다는 복음의 선포가 더 중요한 사람만이 이런 슬픔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슬픔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슬픔이 있어야 복음에 대해 더 절실할 수 있습니다. 내가 수치스럽더라도 모욕적이더라도 끝까지 복음의 편에 서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슬픔이 있어야 교회를 저버리지 않고 교회와 함께 고난받을 수 있습니다.
(1, 2대지 적용)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복음의 편에 서서 수치스럽기만하고 슬프기만 하면 참 복음을 따르는 인생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울의 유혹처럼 복음을 배반하고 나의 왕국을 건설하며 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런 유혹이 들 때 다윗과 사울이 언약한 내용을 생각하면 됩니다. 다윗이 요나단의 집에 인자함을 영원히 끊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복음의 편에 서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최후 심판이 오기까지 주의 십자가를 사랑하면 고대하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땅에서 고난으로 인해 모욕도 받을 수 있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더 큰 영광과 기쁨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복음의 편에 서는 것은 수치심과 슬픔을 감당하는 것을 동반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장차 올 큰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위해 어떤 모욕도 감당하고 복음을 위해 슬퍼하며 최후 승리 얻는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