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r, O our God(느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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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일시 : 2022년 8월 21일 주일
제목 : Hear, O our God
본문 : 느헤미야 4장 1-23절 *구730
결단찬양 : 주님여 이 손을
[도입]
여름수련회가 끝이난지 벌써 2주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그때의 은혜와 그때의 뜨거움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까? 아직 남아 있는 친구들도 많겠지만, 식어간 친구들도, 또 아직 뜨껍게 남아 있는 친구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이 은혜와 뜨거움이 유지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소에 치여 살아가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분명 경건한 삶을 유지하며 살아내고자 하지만, 많은 방해 요소들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기도 하기에 이전의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뜨거움”이 유지되는 것이, 이 “은혜”가 유지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번주부터 공모가 들어간 “사역 동아리”가 좋은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2주간 모집될, “제자훈련”이 좋은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들을 비웃은 산발랏]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저번 주 우리는 3장의 내용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금 중수되어 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니 기어코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일입니까? 이들을 방해하는 자들이 등장했습니다.
1절입니다.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앞서 등장했었던 산발랏이 다시금 등장합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중수 되어짐을 듣고 “크게 분노”했고 “비웃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2절에 기록을 볼 때, 정말 그가 “크게 분노”했을까? 의문을 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행한 행동과 모든 말들이 “조롱”과 “비웃음”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절은 어떻게 기록하는가 보니,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산발랏은 어떻게 말합니까? 5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느헤미야를 비롯한 성전 중수에 힘쓰는 자들을 비웃습니다.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얼마나 자존심 상할 일입니까?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여러분들을 향해, “약하다.”고 평가한다면 얼마나 우숩습니까? 또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할 상황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라고 물었고,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그리고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라고 물으며 비웃음에 비웃음을 더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들이 이미 페르시아로부터 노예였다가 해방되어 나온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향해, “미약”하다 표현하는 것이 틀린 표현은 아닙니다. 또 “스스로 견고”하게 하는 것이 틀린 일이 아닙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중수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즉 다른 이방신들과 교류하며 연합할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었습니다. 그저 스스로 견고하게 세워져 가는 것이 이들에게는 중요했습니다.
제사? 맞습니다. 성전을 세워 다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단 하루? 그만큼 많은 이들이 동원되어 함께 일을 행하고 있었으니 그들 눈에는 하루에 끝내려 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는 것이요? 맞습니다. 성전은 불탔고 그 누구도 지나갈 길 하나 없는 곳이었지만, 이들은 그 터 위에 다시금 세우고자 했습니다.
산발랏의 비웃음은 근거 없는 비웃음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을 비웃은 도비야]
산발랏만 그랬습니까? 아니요. 암몬 사람 도비야도 비웃었습니다. 3절입니다.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상당한 과장법입니다. 여우가 올라가 무너질만큼 연약한 성전을 이들이 세웠겠습니까? 절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도비야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곳”처럼 비꼬아 표현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 중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는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한 일은 쉽게 헛되이 되지 않으며 그만한 보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3장을 보십쇼. 얼마나 수고하고 정성을 다하며 최선을 다했습니까? 그런데 그들을 향해, 여우 하나 올라간다고 무너진다 말하니 얼마나 얄밉습니까? 진짜 기빠지는 말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비웃음에 대처하는 느헤미야]
그런 그들을 향해 느헤미야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4절과 5절입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느헤미야는 비웃음치는 그들을 향해 분노나 육체적 접촉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비웃음에 그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왔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그에게 있어 기도의 주체는 명확했습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으며, 그가 이 모든 기도에 응답하심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너무 경건해보입니다. 보고 본 받을만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내용이 아이러니합니다. ‘우리를 업신여긴 저들이 이방에게 사로 잡히게 해달라며, 그들의 욕이 그들에게 돌아가도록, 그들의 악을 절대 덮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이게 맞는가 의구심이 듭니다. 분명 성경은 ‘서로 사랑하고 품으라’ 말하는데 느헤미야의 기도가 참 아이러니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향해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말씀하셨던 그 말씀을 느헤미야가 인용한 것입니다. 즉 느헤미야는 자신을 위한 성전이 아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위한 성전을 중수하는데, ‘하나님 이들이 하나님을 욕하는데, 결코 가만 두지 마십시오.’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보게 됩니다. 여호와를 욕하며 떠나는 자들을 향해 내려지는 결과는 결국 저주입니다. 멸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며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수련회때 이런 내용을 전했습니다. 오늘 분명 뜨겁게 여러분들에게 은혜가 주어질 것인데, 그 은혜로 우리는 내일을 살아갈 수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은혜로 내일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의 것은 오늘로 끝이 납니다. 마치 ‘만나’처럼 말입니다.
바라옵기로는 여호와를 경외하기에 힘쓰며 날마다 부어주시는, 날마다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내는 청소년부 친구들 되길 소망합니다.
분명 우리가 은혜를 구하며 살아갈 때, 또 받은 은혜로 살아갈 때 분명 방해요소는 존재할 것이며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분명 우리를 힘들게 할 산발랏이, 도비야가 존재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찌 행동해야 합니까? “우리 하나님이시여 들으시옵소서” 느헤미야가 보여준 것처럼 우리도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용]
사랑하는 청소년부 여러분. 느헤미야는 기도하며 움직이는, 또 뒷 일을 기획하며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방해가 있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행동합니까? 13절과 14절입니다. “내가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이 그들의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하고 /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또 22절 하반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일하리라 하고”
느헤미야는 방해가 오는 것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방어했고 싸웠습니다. 이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방해가 올 때 원망하고 분노하지만, 크리스천은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무기삼아 방어해야 합니다.
위기가 언제 찾아오는지 아십니까? 평안할 때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 아닌, 위기가 막 지나갔을 때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돈이 없을 때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돈이 주어졌을 때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은혜를 막 공급받았을 지금 이 시점에 사단의 방해는 강하게 접근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이겨낼 힘, 기도와 말씀을 붙들며 살아내길 소망합니다.
그렇게 살아낼 수 있도록 사역 동아리와 제자훈련의 기회를 붙잡는 우리 청소년부 친구들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