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25 새벽] 노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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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294 하나님은 외아들을
본문 마 5:21-26
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를 이 땅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세상의 빛으로 세워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리의 언행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채워주셔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만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은혜만이 전달되고 선포될 수 있도록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중심을 온전히 주장하여 주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999년 7월 4일, 예배를 마치고 교회당을 나가던 26살의 한국인 유학생 윤원준 씨가 백인우월주의자였던 벤자민 스미스의 무차별 총기난사에 쓰러졌다. 윤원준 씨는 일리노이 대학을 졸업하고 인디에나 에서 대학원 공부를 준비하고 있던 앞날이 창창하던 청년이었다. 그가 총기사고로 숨을 거둔지 8일 째 되는 날, 미국 전 지역에 그의 추모예배 광경이 생중계 되었다. 예배의 마지막 시간에, 희생당한 윤원준 씨의 사촌형이던 박성호 목사가 가족을 대표하여 마지막 인사를 했는데, 이 장면을 지켜보던 수많은 미국인들은 전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오늘 가족을 대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형제를 죽인 벤자민 스미스를 용서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오늘 내 사랑하는 형제의 꿈을 빼앗고 피를 흘리게 한 이 미국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용서를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족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자들입니다"
약3:7-8 말씀에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라고 하신다. 어쩌면 하루 24시간, 우리가 가진 신체기관 중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입과 혀일진대, 그 혀를 통해서 윤원준 씨의 사촌형 박성호 목사처럼 죽을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그 혀를 통해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자는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잠4:24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는 여섯번째 계명의 말씀, 곧 ‘살인하지 말라’ 라는 계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유대사회에서 살인에 대한 형벌은 오직 죽음이었다. 이 형벌은 다른 형으로 감소될 수 없었다. '살인’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혹 자기 자신을 해하거나, 혹은 살인을 방조하거나 살인자를 감싸 주는 행위들 모두를 포함한다. 아마도 당시 유대 사회에서도 살인을 이와 비슷하게 규정했던 것 같다. 즉 살인이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거나, 빼앗는데 동조하는 일을 가리켰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행위에 견줄만한 세 가지 사례를 말씀하신다.
첫번째 사례는 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화를 내는 것이 살인의 근원이 됨을 말씀하신다. 또한 성경에서도 이를 증언하기를, 요일3:15 말씀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말씀한다. 형제를 향하여 노를 발하지 않는 것이 십계명 제6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금하신 원래의 의도였다. 따라서 형제들에게 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두번째는 형제를 대하여 '라가' 라고 부르는 것이다. '라가'라는 단어는 '머리가 텅 빈 멍청이'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는 욕설이다.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으로 지은바 된 우리의 형제를 향하여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는 너무나도 심각한 죄라서 반드시 재판을 받게 될 것을 경고하신다.
세번째 사례는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 부르는 것이다. '미련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기본적으로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하게 한국사회에서 ‘어휴..ㅉㅉ. 미련한놈 같으니’ 라는 정도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유대 사회에서 때로 이 단어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형제들에게 이 말을 한다는 것은 도덕적인 정죄를 넘어선 종교적인 정죄이며, 앞의 '라가' 보다 훨씬 더 심한 욕설이 된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사람의 육체적 목숨을 해치는 것 뿐 아니라 인격을 모독하며 존엄성을 상실하게 하는 것까지 살인으로 규정하셨다.
여러분, 단지 물리적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만이 살인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굳이 칼이나 창과 같은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아도, 얼마든지 우리의 입술로, 우리의 혀로 수많은 형제들을 죽여왔고, 죽일 수 있음을 엄히 경고하신다. 굳이 내가 남의 생명을 물리적으로 빼앗는 일들을 행하지 않아도 약하고 지극히 작은 신체 일부인 입술과 혀를 통하여 충분히 우리의 형제들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 속에 품는 분노가 이를 가능하게 만든다. 형제를 향한 화가 이를 가능하게 만든다.
이 말씀 앞에 우리의 지난 날들을 돌아보자. 우리는 그간 별대수롭지 않게 6계명을 생각해 왔을 것이다. 내가 실제적으로 누군가를 죽이지 않았으니 나는 6계명을 잘 지켜왔노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다 말씀하신다.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의 교회 생활 속에서, 형제들을 향한 원망의 마음들, 형제에게 품었던 분노의 마음들 그 자체가 이미 살인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그러한 악한 마음들은 결국 말과 혀를 통한 살인으로 이어지게 되고, 결국은 행동으로 열매 맺게 되어 있다. 형제를 향한 원망과 분노는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드러내지만 않는다면 그 누구도 모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 형제를 향한 원망과 분노의 마음을 품는다 해서 세상의 법으로는 처벌을 받지도 않을 뿐더러 이것이 실제 살인처럼 큰 죄로 여겨지지 않다보니, 우리는 이 죄의 심각성과 파급효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듯 하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삶 아주 깊숙히 침투하여 수많은 악한 열매들을 맺는다는 것도 간과한채로 살아간다.
많은 사회학자가 진단한 것과 같이 오늘날은 분노를 참지 못하는 사회이다.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충동적이고 극단적인 성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뭔가 남이 나에게 조그마한 실수를 하거나, 조금의 피해만 입혀도 감정조절을 하지 못하여 분노를 쏟아 붓는 일들이 흔한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다. 누군가를 험담하고, 누군가에게 폭언을 하며, 이간질하고, 수근거리며, 이간질하고, 결국 교회 안에서 설 자리를 빼앗고 교회 밖으로 내쫓아버리는 일들이 더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닌 상황이 되었다.
주님께서는 '형제'와 '고발자'들과의 화목을 강조하신다. 21절에서는 '너희(복수)' 라고 말씀하셨지만, 23절에서는 '너(단수)' 라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청중들 개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희생제사를 의미한다.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이라는 구절에는 단순하게 적대감을 갖거나 원수되는 심각한 상황 뿐만 아니라 단순한 의견대립도 포함된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찾아왔다가 예배 직전에라도 형제들과의 아주 사소한 불화나 마찰이 생각난다면 먼저 그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측량할 수 없는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주셨음을 안다면, 우리도 마땅히 남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이 합당하다. 요일 4:20 에서도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에 나아가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택함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일로 간주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보다 먼저 우선되어야 할 것이 바로 형제와 화목하는 일임을 강조하신다.
또한 주님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라고 말씀하신다. '고발하다'라는 의미는 적대감을 가진 말로서 '원수' 혹은 '대적자'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26절의 말씀으로 유추하자면 이 재판은 돈과 관련된 분쟁일 것이다. 서로에게 진 빚 때문에 송사를 하고 감옥에 가두는 일은 당시 이방인들의 문화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법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법적인 공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지 말고 재판장까지 가기 전에 급히 화해를 하라는 의미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가? 형제에게 화를 내고, 인격적으로 모독을 하고, 종교적으로 정죄를 하는 것은 곧 살인을 하는 죄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여 구원받은 백성이라도 형제에게 화를 내고 인격적으로 모독을 하는 자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하시는 죄가 있는가? 진정으로 통회자복하여 회개하는 영혼을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성도라면, 마땅히 형제에게 화를 내지 않고, 형제를 향한 분노의 마음을 빨리 털어버리며, 그 연약함이 보이더라도 이를 감싸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용납해 줄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나에게 해코지를 한 자들, 나에게 불이익을 가져다 준 자들, 나에게 손해를 끼친 자들을 법적 공방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그들을 포용해줄 수 있고, 그들을 안아줄 수 있으며, 그들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훈의 말씀은 마18장에 등장하는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의 비유’에서 극대화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자라면, 비록 받은 만큼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베풀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형제와 화목해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 새벽의 시간에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자.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원수’ 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생각나는 얼굴이 혹 있지는 않으신가. 함께 신앙생활 하는 믿음의 형제들 가운데 분노의 마음을 품은 채로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는 얼굴이 떠오르지는 않는가. 공동체 안에서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나에게 안좋은 이야기를 퍼트리고 다니는 자들의 얼굴이 떠오르지는 않는가. 또한 나 자신은 형제들에게 그렇게 한 적은 없는지 생각해보라.내가 안좋게 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던 사람의 얼굴이 있는지. 내가 굴욕을 주고, 핀잔을 주고, 떨쳐내려 했던 사람의 얼굴이 있는지 말이다.
여러분,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동일한 사랑으로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해야 함을 기억하라. 내가 받은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나도 나의 형제들을 용서하고, 먼저 손을 내밀어주며, 그들을 품어줄 수 있는 우리가 되자. 형제를 향한 분노가 열매를 맺어서 악독과 험담과 저주의 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을 이제는 형제들을 향하여 마음껏 흘려보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자. 이를 통해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우리 양문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도하자.
주여, 우리 마음 가운데 형제를 향한 원망과 분노의 마음들이 있다면 성령께서 그 마음을 소멸시켜 주옵소서. 우리의 말과 혀로 형제들을 살인했던 우리의 죄를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의 마음으로, 우리의 입술로, 우리의 행실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드러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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