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사람을 꾸짖으라(느5:1-13)

느헤미야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07 views
Notes
Transcript
일시 : 2022년 8월 28일 주일
제목 : 옆사람을 꾸짖으라
본문 : 느헤미야 5장 1-13절 *구732
결단찬양 : 아무 것도 두려워말라
[도입]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 “상대방을 안다”는 것을 베이스로 합니다. 생판 모르는, 애당초 처음 들어보는 사람을 싫어하기란 당연 불가능할 것입니다.
또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정말 가까운 사람”을 싫어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절교”의 경험을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왜 절교합니까? 정말 친했던 존재였고, 함께 열심히 놀았던 친구와 “정말 사소한 무언가 하나”가 나와 내 친구의 절교를 만들어 냅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것은, “상대를 앎”과 동시에 “가까운 관계”일 때 싫어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입니다.
이를 한 번 증명 해볼까요? 혹시 여러분들 중에 “이레나 샌들러”(사진)를 싫어하시는 분 계십니까? 사실 “이레나 샌들러”를 아는 자가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여하튼, 왜 우리는 이 “이레나 샌들러”를 싫어하지 않습니까? 첫째,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둘째, 나와 가까운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그녀를 안다고 해서 딱히 그녀를 싫어할 이유는 없습니다. 설교의 개연 속에 굳이 안해도 되는 이야기이지만, 그녀는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600만명을 학살할 당시, 나치 수용소에서 유대인 어린이들을 무려 2,500여명을 구출시켰던 사람입니다.
일화를 들어보아도 싫어 할만한 인물이 아님을 압니다. 그러나 먼저는 그녀를 알지도 못했고, 나와 가까운 관계가 아니기에 싫어하고 말고할 것조차 없었던 것이지요.
오늘 본문은 정말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의 어려움이 있음을 보여주고, 그리고 이에 느헤미야가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이 우리를 “지혜롭게 살아가는 힘”을 주실 것을 소망하길 바랍니다.
[몹쓸 문화가 이어져 가다]
1절입니다. “그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무엇이 눈에 띕니까?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아닙니까? 우리가 앞서 말했던 상황이 지금 펼쳐진거 아니겠습니까? 왜 원망합니까? 첫째, 그들을 압니다. 그들이 유다 사람이기에 서로 잘 압니다. 그리고 둘째, 가까운 관계입니다. 그들은 형제라 부를 정도로 가까운 관계입니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원망합니까? 2절부터 4절을 함께 봅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자녀가 많으니 식비가 상당할 것입니다. 둘이 생을 이어가는 것보다 셋은 더 큰 비용이, 또 넷은 그 이상의 비용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습니까? “얻어 먹어야”하는 상황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왜 이들은 식비를 자신들이 충당하는 것이 아닌, 얻어 먹어야 하는 처참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까? 4절 마지막을 볼 때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지금 “흉년”이 임한 것입니다.
성전을 재건함에 힘쓰는 것도 고달팠을 것인데, 거기에 흉년이 함께 임했으니 이들의 심정이 얼마나 무거웠을 것이며, 이들의 육이 얼마나 지쳐있겠습니까? 당시 페르시아에서 이 흉년을 견디지 못해 식량난을 겪은 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팔아 식량을 얻었고, 가진 것이 떨어지면 자녀를, 그리고 아내를 끝내 자신을 팔아 흉년을 넘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녹아든 그 문화는 페르시아를 떠나며 잊혀져간 것이 아니라, 끊어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그들의 삶에 여전히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그 몹쓸 문화는 형제들간에 유효해졌습니다.
5절입니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자녀를 종으로 파는 자가 있는데, 딸들 중에는 벌써 종된 자가 있습니다. 그렇다하여 재산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밭과 포도원은 남의 것이 된 상태입니다. 형제간 이런 교류가 있었으니, 어찌 형제를 사랑하겠습니까? 어찌 내 자녀를 종으로 데려간 형제를 내가 품고 사랑하겠냔 말입니다. 이들에게는 원망만이, 어쩌면 증오가 이들에게 남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을 꾸짖는 느헤미야]
그런 그들을 향해 느헤미야가 외칩니다. 6절입니다.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이런 부조리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향해 크게 노하여 꾸짖었습니다. 그 꾸짖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8절 함께 보겠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지금껏 이들이 어디의 노예로 살아왔습니까? 페르시아의 노예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그들을 어떻게 하였습니까? 노예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이방인 손에 팔린 형제를 “우리의 힘”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힘”으로 데리고 온 형제들을 대상으로 다시 노예로 삼고, 종 삼아 이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분노했고, 이들의 불의한 행동에 “꾸짖음”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서로를 꾸짖으라]
옆에 함께 나아온 친구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우린 서로를 향해 “불의한 행동에 꾸짖음”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모습을, 말씀의 기준을 벗어나 발걸음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들을 꾸짖어야 합니다. 잘못된 길을 갈 때, 바로 잡아주는 것이 단순 저와 선생님들만의 역할로 그치기 보다는 우리 모두의 역할이 되어야 합니다. 설령 저와 선생님들이 잘못된 길로 걸어갈 때, 여러분들이 붙잡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이렇게 서로를 위로하고 권면했으면 합니다. “성경을 벗어나 살아가지 맙시다.” /. “내가 너의 올바른 길잡이가 되어 줄게.” / “나만 믿고 따라와.”
[여호와 하나님, 우리 삶의 지표이자 기준]
물론 우리의 꾸짖음이 “감정적 꾸짖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단순히 옆의 친구가 미워서, 싫어서 꾸짖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담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이들을 바로 세워가야 합니까? 방금 우리가 위로하고 권면했듯이, “성경”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9절 하반절을 보니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우리의 발걸음이 누구 가운데 걸어야 하는지, 누구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 무엇을 기준으로 걸어가야 하는지 느헤미야는 선포합니다. 즉 우리가 걸어갈 방향의 기준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되어야 합니다. 또 그가 말씀하신 “성경”이 우리의 삶의 지표가 되어야 합니다.
[적용]
사랑하는 청소년부 여러분. 서로 상처 받을까 걱정되어 말 한마디 쉽게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내 친구가, 또 내 가족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불의를 행할 때 우리는 그들을 향해 꾸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꾸짖음에 있어 단순히 감정이 우선되서는 안됩니다. 감정이 우선될 때, 우리는 문제 하나에 대한 피드백이 오고 가기 보다는 다른 부가적인 피드백이 오가기에 우리는 감정이 우선된 꾸짖음은 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준과 지표가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바로 “말씀”이 곧 기준이고, “하나님”이 나의 지표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어렵습니다.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정말 많이 하는 걱정이 무엇이냐면, “분명 잘못된 게 맞는데, 괜히 내가 나섰다가 관계만 멀어지면 어떻게 하지? 내가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것일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기준과 지표가 바로 세워져 있다면, 결코 두려워 할 것 없습니다. 나의 걱정, 괜한 오지랖이라 느껴질 수 있지만 이 모든 것에 ‘나’대신 일하실 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결코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바라옵기로는,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우리 삶의 기준과 지표가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오늘로써 제자훈련 신청을 마감합니다. 한 주간 기도로 결단하신 것을 행하길 소망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