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12)

느헤미야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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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
느7:1-4
코로나가 지속되면서 믿음이라는 영역에서 교회의 거품을 걸러내는 긍정적인 역할이 있었다고 본다. 특히 신념과 믿음이 걸러졌다고 본다. 신념은 내가 믿는 것이고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다. 신념으로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은 믿음을 포기하거나 숨어 버렸다. 또 한가지는 환경이 문제가 아님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코로나를 멈춰주시면 예배 잘 드리겠다는 것은 핑계였고, 예배자들은 코로나와 상관없이 예배자였다. 코로나가 잠시 주춤할 때에도 그들은 기도의 자리나 예배의 자리에 돌아오지 않았다.
저는 가나안 성도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혹시 모르실까 싶어 그러는데, 가나안성도는 교회 안나가 성도를 말한다. 믿음은 개인적이지만 공동체를 떼어놓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이 느헤미야라는 성경이다.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통해 예루살렘의 성벽을 세우게 하셨고 그 성을 거룩하게 구별하셨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는 그곳에 사람들을 이주시키며 예루살렘 성을 안정시키는 말씀이다.
지도자를 세우다.
1절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지난 시간 살펴본 것처럼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은 52일이라는 모두가 놀랄만한 짧은 시간에 완성하였다. 그런데 성벽이 재건축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 성벽을 감시하고 지켜야 했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의 형편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5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너무 가난하고 형편이 어려운 백성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 모두가 예루살렘에 거주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 안에 사람들이 모자랐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개척교회에서 시작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배당을 지은 것과 같았다. 그래서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도 문지기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교역자들도 문지기를 서고 성가대도 예배당 청소하는 일에 동참하였다는 말이다.
그중에 특별한 직책이 있었는데, 2절을 보시면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
히브리 성경에는 “함께 다스리게 했다”는 말이 가장 앞에 나온다. 그들은 하나니와 하나냐였다. 하나냐는 모르겠지만, 하나니는 느헤미야의 형제였다. 요즘 시대 같았으면 친인척 비리나 친인척 특혜로 공수처에 기소당할 수 있었겠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지키는 수장에 자신에 동생을 임명하여서 정치적으로 안정적이고 마음대로 조정하고 싶어서 하나니를 세웠을까. 그렇지 않다. 하나니는 페르시아에 있는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의 소식을 전한 사람이었다. 만약 하나니가 물질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된 삶을 원했다면 페르시아에 있는 느헤미야에게 자리를 원했을 것이다. 누가 봐도 황폐한 예루살렘보다는 페르시아에서 말단 공무원이라도 임명받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왜 하나니를 성벽 문지기 리더로 세웠을까.
1:2절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하나니는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열정과 마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리더로서 가장 나쁜 사람은 실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대통령이 나라 살림에는 관심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니가 예루살렘의 형편을 바라보며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그 먼 길을 여행하며 페르시아에 있는 느헤미야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느헤미야가 하나니를 세운 이유는 동생이기 이전에 예루살렘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냐는 원래 성벽을 담당하던 사람이었다. 하나니는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소개가 없지만, 인지도가 없었던 하나냐는 느헤미야가 이런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2절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
“충성스럽다”는 말은 ‘바르고 신실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인지도는 없었지만 그를 하나니와 함께 리더로 임명한 것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지키고 부흥시키기에 적합한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은 예루살렘에 대한 애증을 가진 사람이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한 자들이 되지 않으시기를 바란다. 교회에서 상당수에 사람은 구경꾼으로 살아간다. 헌신하려고 하지 않고, 조금만 힘들고 어려운 일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마음의 문제다.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 이민족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우리 은보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 우리 가정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구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세상의 일과 다르게 우리가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처럼 규모가 작은 공동체는 늘 사람이 부족하다. 그래서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이 문지기로 나서야 하는 상황처럼 한 사람이 여러 일을 감당해야 할 수 있다. 그러다보면 빨리 지치거나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교회는 신선한 인물들이 동참해 주셔야 한다. 교회는 능력 많은 목사 한 사람에 의해 세워지는 곳이 아니다. 어느 믿음이 좋은 권사님 한 분으로 세워지는 공동체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이뤄진 각 지체가 함께 움직이는 곳이다.
하나님이 마음을 주신다면 어디든지 가셔서 섬기시기를 바란다. 지금은 방학중에 있지만, 예친회 리더들을 도와주시기를 바란다. 유초등부로, 찬양대로 가시기를 바란다.
3절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주민이 각각 자기가 지키는 곳에서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니”
느헤미야는 성문을 해가 완전히 뜨면 성문을 열고, 해가 지기전에 문을 닫도록 명한다. 왜냐하면 지금 예루살렘은 너무 연약했기 때문이다. 어둠을 틈타 적이 기습하면 방어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 이 거룩한 땅을 지키기 위해 성문을 일찍 닫고, 해가 뜨고 완전히 밝아지면 성문을 열도록 명한 것이다. 또한 느헤미야는 문지기 역할을 백성들 전체에게 골고루 맡긴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을 이주 시킨다.
4절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사람도 적고, 집도 없었다. 그래서 온 성도가 사역자로 섬기도록 했고, 지금 교회로 말하자면 새신자초청 예배처럼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이끌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을 이주시키려면 명단이 필요했는데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그 명단을 허락하신다. 예루살렘은 성벽이 건축되면서 도시로서 형태는 만들어졌지만, 사람도 집도 적었기 때문에 그 도시를 채우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
2. 내 마음을 감동하사
5절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하시므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는데 거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
우리 성경에 “감동하사”라는 말을 읽으면 어떤 신비한 역사를 기대하도록 만들지만, 여기에 감동이라는 말은 ‘넘겨주다’는 뜻이다. 선지자들에게 어떤 신비한 체험으로 말씀을 주시는 것처럼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그 명단을 넘겨주신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이주시킬 수 있는 틀을 마련하게 된다. 누가 몇 명이나 돌아왔는지를 알아야 이주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이렇게 꼼꼼하고 정확한 느헤미야도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일이 안 된다. 또 한 번 우리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꼭 필요한 명단을 느헤미야에게 주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 때로는 우리 마음이 앞설 수 있다. 그래서 실패 앞에 실망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자녀가 떡을 구하면 돌을 줄 부모가 없듯이 하나님은 정확하게 채워주실 줄 믿는다.
하나님께서 필요하면 사람도 보내 주시고, 필요하다면 돈도 주시고, 필요하다면 특별한 은혜를 허락하셔서 하나님이 주도하실 줄 믿는다. 이 순간 우리가 해야 할 것하나님의 싸인을 알아먹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과 기도 앞에 설 수밖에 없다. 말씀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말씀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이다. 또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한다는 것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고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은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말씀과 기도를 떠나지 않으시기를 바란다.
제가 새벽기도회 때 한번 말씀드렸는데, 하나님과 데이트하는 시간을 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루 30분이라도 격리된 곳에서 말씀을 읽든지, 찬양을 드리든지, 기도하든지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만드시기를 바란다. 그 시간만큼은 남편이나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홀로 아이들 방에 들어가 하나님과 만나시기를 바란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될 줄 믿는다.
그런데 우리가 5절에서 또 주목해야 할 말씀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는데..”라는 말씀이다. 느헤미야 손에 들려진 명단은 5만명 정도의 1차 귀환자들이었다. 이들은 거의 100년 정도 앞서는 자들이다. 그들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함께 귀환해서 성전을 재건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들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개척맴버나 교회 초창기부터 섬겼던 자들인 것이다.
그들은 지금 돌아온 사람들보다는 안정된 사람들이었다. 집도, 농사도, 물질적 형편도 조금은 안정된 자들이었을 것이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먼저 이주시켰던 것이다.
은보 가족 여러분, 사실 예루살렘 상황을 생각하면 인간적으로 이주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적들이 항상 노리고 있는 곳이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니 이곳에 이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성전 건축을 통해 먼저 일해본 경험과 경제적으로 안정된 1차 귀환자들을 중심으로 이주시켰던 것이다.
교회를 섬기기는 사실 쉽지 않다. 어두움의 영들은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적으로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관계적 문제 앞에 서야 한다. 그래서 불편하고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피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마귀만 성공했다고 웃을 것이다. 그래서 은보교회를 조금 더 아는 지체가 먼저 헌신해 주시기를 바란다. 새신자들 보다는 믿음의 경험이 많은 분들이 주변 자리가 아니라 중앙으로 먼저 나아오시기를 바란다. 예루살렘 공동체도 우리와 같은 여러 문제와 인간의 한계 앞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마음이 있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고?
① 8-24절을 보면, 17개의 가문이 나온다. 그들은 일반인들도 있었고 지도자들도 있었다.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들은 돌아와도 자신들이 살아갈 여지가 있는 자들이었다.
② 39-42절을 보면, 제자장 가문의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이 기뻤을 것이다. 왜냐하면, 직업적으로 해야 할 일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③ 43-45절을 보면, 레위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도 제사장 가문과 마찬가지로 큰 부담은 없었을 것이다.
④ 46-60절을 보면, 여기서부터 우리가 집중해야 한다. 먼저 ‘느디님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57절부터는 솔로몬의 신하들이 나온다. 느디님 사람들은 제사를 돕는 종이었다면,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은 왕궁을 섬기는 종이었다. 특히 느디님이라는 말을 5절에서 “감동”으로 번역된 ‘주다’라는 나탄이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그들은 ‘주어진 사람’ ‘바쳐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성전 일을 위해 바쳐진 종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가나안 원주민들이었다.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위험한 예루살렘 성으로 이주하지 않아도 되는 자들이었다.
여러분, 페르시아에 있으면 레위 사람도, 유다 지도자들도, 제사장들도 모두가 같은 이라는 신분이었다. 그런데 느디님 사람들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면 다시 종으로 살아가야 할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온 것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⑤ 61절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돈과 임멜로부터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들의 종족이나 계보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는 증거할 수 없으니”
이들은 족보를 찾을 수 없는 자들이었다. 한마디로 사연이 많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다. 고아로 자란 사람일수 있고 조상이 민족적으로 잘못한 사람일 수 있다. 이런 사람들도 귀환을 했다.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되고 전쟁터와 같은 예루살렘 성으로 이주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을 볼 때, 큰 것부터 보려고 하고 판단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믿음을 보실 때 작은 것부터 보신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를 구했을 때,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질 때, 예수님께 나아오는 어린 아이들을 안아 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큰 나무가 아니라 겨자씨를 먼저 보셨다.
우리는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기준을 만들어서, 나는 저들과 다른 믿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문이 없는 사연 많은 가문도, 조상들이 종으로 살았던 사람도, 유대인들이 인정하지 않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일에 동참시키고 있다.
우리 은보 식구들은 죄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막는 사람들이 아니라 도와주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비난은 1절로 끝내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한다.
오래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할 때, 많이 회자 되었던 일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어느 신학교에 입학했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학생들이 ‘독재자의 딸이 올 곳이 아니다’라며 막았다. 그때 학생들이 받아 주었다면 최씨 가문 사람들 때문에 삶이 엉망이 되었을까.
물론 이런 경우는 있다. 지금 몇 년전에 유명한 설교자로 단체를 만들었던 사람이 다시 사람들 이야기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여관을 다녔다. 그리고 선교단체 간사들과도 여러 사람과 문제를 일으켰다. 그 일로 다니던 신학교도 그만두고 어디론가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다시 받아주지 않았던 이유는 그의 회개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미국으로 가면 돈만 주면 안수를 받는 곳이 있다. 그가 회개하였다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서 사람의 회개를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을 찾고자 한다면 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막지 않기를 바란다.
<결론>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특별한 소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모두가 동참해야 하는 일이다. 적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먼저 움직였던 1차 귀환자들처럼 우리 모두가 주의 일 앞에 망설이지 않고 순종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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