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사랑한 그 제자 3] 육체적 건강, 신앙의 연약(요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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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2년 8월 31일 수요일
소제목 : 예수가 사랑한 그 제자 3
제목 : 육체적 건강, 신앙의 연약함
본문 : 요한복음 9장 1-12절 *신160
결단찬양 : 주는 완전합니다
[대표기도]
우리가 사랑하며, 또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 발걸음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말씀을 듣사오니, 오직 주님께서 일하시어 말씀의 은혜와 축복이 이 시간 차고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듣는 자나 전하는 자에게 동일한 은혜를 허락하사 우리의 삶에 힘과 능력이 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배의 주관자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봉독]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9장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는 신약 160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다 찾으신 줄로 알고 한 절씩 교독하신 후 마지막 12절은 합독하시겠습니다. 제가 먼저 1절 봉독해 올리겠습니다.
[도입]
오늘도 사복음서 중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사건 중 하나를 가지고 저와 여러분들이 말씀의 은혜를 누리고자 합니다.
사실 설교 제목이 지금껏, “윤리적 행위, 놓치는 진리”, “종교적 열심, 믿음의 부재” 또 오늘의 “육체적 건강, 신앙의 연약함”까지 너무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하면 조금 가볍게 바꿔볼 수 있다가, 한 강도사님이 이런 아이디어를 제안해주셨는데, 부제로 괜찮겠다 싶어 읽어 드리겠습니다. “육적 헬창, 영적 멸치”
그래서 먼저는, 이 소위 ‘헬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시작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께서는 운동을 좋아하십니까? 아마 다들 한 번쯤은 시도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바로 ‘다이어트’를 말입니다. 이 다이어트가 얼마나 핫하고, 또 얼마나 대중적인지 이에 관련된 용품들도 상당하며, 식품 또한 정말 많은 종류로 나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다이어트에 관련된 많은 명언들도 존재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 ‘괜찮아요. 치킨은 살 안쪄요. 살은 내가 찌지.’ 등 정말 많은 명언들이 있으며, 이에 많은 이들이 다이어트에 관심이 정말 많구나를 알게 합니다.
특히 이 다이어트가 붐을 일으키는 때가 있는데, 바로 여름 휴가를 앞두고 유독 그 붐이 엄청나집니다. 실제로 저는 새벽에 헬스장에서 가볍게 운동을 하는 편인데, 여름 휴가를 앞두고 이상하리만큼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아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 365일 중 300일 정도는 정말 잘 챙겨먹고, 두 달 정도의 시간을 운동에 쏟아 몸을 만들어 휴가를 가고자 하는 케이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우리는 참 외형적으로 갖추어지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패션이든, 신체적 멋드러짐이든 우리는 그런 존재인가 봅니다. 물론 그런 존재여서 ‘우린 잘못됐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이를 ‘넌 틀렸어!’ 라고 말하고 싶은 것 또한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우리의 외형을 가꾸는 일에 있어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한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해서 외형을 가꾸는 일이 부정적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김종국처럼 디스크의 질병을 해결하고자 운동을 하며 외형을 가꾸는 일이라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 없고, 틀린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유전으로 인해 질병의 문제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해지려면 운동을 해야만 하는 몸이고, 또 작년 허리디스크 판정을 받으며 운동을 하지 않았을 때 제 몸이 온전치 않음을 알기에 저도 운동을 통해 몸을 가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소위 ‘육적 헬창’이 되기 위해 힘쓰는데, 정작 ‘영적 헬창’이 되기위해서 힘쓰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오늘 우리는 사도 요한만이 유일하게 기록한, 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제자들의 질문 : 맹인 됨이 자기의 죄인가 부모의 죄인가]
1절입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우연인지 필연인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 누구를 만나게 됩니까?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시게 됩니다. 사실 우연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2절에 기록된 제자들의 질문이 이를 뒷받침 하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니 이렇게 기록합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이미 제자들의 시각에 그가 맹인인 것이 확실시 된 상황이었습니다. 즉 오래 전부터 그를 오고 가며 봐왔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문뜩 예수님께 묻습니다. “저 자가 눈이 먼 것이 저 자의 죄가 많기 때문입니까? 아이면 그의 부모의 죄가 많아 저 자에게 벌이 임한 것입니까?”
이 질문의 베이스는 우선, ‘저 자는 맹인’이라는 사실인 것과 또 하나는 ‘저 자는 죄가 많다’라는 것입니다. 다만 제자들은 맹인이 앞을 못봄이 ‘그 자의 죄인가’ 또는 ‘부모의 죄’인가에 논점이 있었던 것이지요.
만약 우리의 질병이 죄로 인한 결과라면 과연 이곳에 계신 저와 여러분들 중에 온전한 몸을 지닌 자가 몇이나 될까 생각이 듭니다. 만에하나 하나님께서 죄의 결과로 ‘머리카락 하나씩 뽑아가신다.’고 책정해두었다라면, 저는 대머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어쩌면 무모증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죄의 결과로 육체적 질병을 얻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앎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육체적 질병이 다가올 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라며 부르짖거나 외칠 때가 참 많습니다.
정말 이 죄가 질병을 가져온다는 공식이 사실이라면, 본문 속 맹인을 비롯한 많은 장애를 가진 자들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 삼촌은 어릴적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습니다. 목발도 아닙니다. 휠체어 없이는 어디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 삼촌은 죄가 많아 그 어린 나이에 하반신 마비가 된 것이며, 여전히 그 죄가 용서받지 못하였고, 그 죄가 여전히 유효하여 하반신 마비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누군가 제 삼촌 앞에 나타나 ‘당신이 하반신 마비가 된 것이 당신이 죄가 많던가, 또는 당신의 부모가 지은 죄가 많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 말이 곱게 들리겠습니까? 결코 그 말이 삼촌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예수님께 한 질문이 결코 옮다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러한 질문을 한 까닭은 자신들이 배웠던 지식, 즉 예수님께 묻고 지혜를 구하여야 한다는 사실에 입거하여 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질문이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라 할지라도, 또는 지식에 대한 확증 또는 지식을 뽐내기 위한 질문이라 할지라도 확실한 것은, 제자들의 질문이 결코 맹인의 귀에 곱게 들릴 질문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 :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의 대답은 ‘죄’에 초점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장 2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다시 한 번 더 묻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즉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에는 ‘죄’에 초점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명’에 초점이 있었습니다.
분명 기쁜 소식입니다. 생명을 주신다 하니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런데 맹인의 입장에서도 과연 그 소식이 정말 기쁜 소식이었겠냐는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긴 세월 맹인으로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맹인이었음을 알고 또 그가 꽤나 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으로 보아 오랜 시간 맹인이지 않았을까 하는 유추를 하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 가서 “너가 맹인 된 건, 너의 죄가 아니라, 너의 부모의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를 쓰시고자 함이래! 너를 통해 생명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래!”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 소식이 그에게 정말 기쁜 소식이 되겠냐는 말입니다.
저 또한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나름 공부에도 성실히 임했지만, 제 꿈은 ‘정직한 체육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나름 열심히 운동했고 또 친구들과 정보를 공유하며 실기 준비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3월에 저는 질병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콜린성 두드러기’라는 질병이 생겼는데, 스트레스를 받거나 또는 온도차가 심할 때, 또는 몸이 뜨거워질 때 온 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왔습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러다 말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몇일이 지나도 제 몸의 질병이 사라지지 않았고, 얼굴을 비롯한 온몸에 수두가 일듯 난 두드러기들이 소위 괴물과 같아 하교시에는 가능한 늦게, 친구들이 적을 때 또 친구들이 다니지 않는 샛길과 뒷길로 숨어 다녔습니다. 물론 그렇다하여 운동을 멈추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결정적으로 실기시험을 앞두고 팔을 다치는 결말로 ‘체육교사’의 꿈은 종료 당했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때 생긴 이 질병은 꽤나 긴 시간 유지되었습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오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업무가 병원에 가서 약을 4-5달치 챙겨 가는거였고, 정말 긴 시간 약을 복용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참 많이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똑같이 말했습니다. “제가 뭘 그리 잘못했나요?”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케 하기위해 이끄신 과정임을 말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 당시 누군가 “야 괜찮아. 너가 가지고 있는 그 질병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실거야. 널 쓰실거야.” 라고 말했다면, 정말 피터지게 싸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이 그 당시에는 결코 기쁜 소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맹인도 그랬을 것입니다. ‘과연 그 소식에 기뻐했을까?’ 그러나 그가 기뻐했던 기뻐하지 않았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이 그를 고치는 것에 핵심이 있었던 것이 아닌, ‘생명’에 초점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생명’길로 인도하기 위함이지 단순 질병을 고치시기 위해 오신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앞서 요한복음 6장 29절을 통해 보았듯,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시는 일이고, 영원히 우리가 그와 함께 살도록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지언정 그가 우리게 하신 가장 위대한, 가장 놀라운 일은 바로 우리게 ‘생명’을 허락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육체적 건강을 얻었지만, 여전히 신앙이 연약했던 맹인]
예수님께서는 ‘생명’에 초점을 맞추어 맹인에게 접근하였고, 맹인을 향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어 눈에 바르신 후 실로암이라는 못가에 나아가 씻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눈을 뜨도록 행하셨습니다. 이제 맹인은 더이상 맹인이 아닙니다. 왜요? 육체적 건강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헬창까지는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그가 건강을 얻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을 볼 때 여전히 연약함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그의 눈 뜬 모습을 보자 어찌된 것이냐 묻자 그가 대답합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분명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해준 사실이 명백하나 그는 여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메시야’임을 알지 못했고, 그저 ‘예수라 하는 그 사람’정도로 보았습니다. 그의 연약한 신앙은 9장 35절 이하의 내용을 볼 때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35절부터 37절까지의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그는 예수를 눈 앞에 두고도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함을 보였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한 안타까운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질병을 지녔던 과거의 저 또한 영적 무지함 속에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질병에 대해 말했을 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길이 너의 길이 아닌 거 같아.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효자였던 저는 그런 어머니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불순종했고, 꾸준히 운동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실기를 준비할 때 다치고서야 하나님의 막으심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막으심을 알았다기 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지난 3년간의 준비가 허망해짐에 큰 낙담과 좌절의 시기를 겪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재수의 시간과 또 학교에 들어가서 부적응의 시간을 보내다 도피하듯 군입대를 했으며, 그렇게 한참이 흐르고 나서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음’을 고백하게 되었고, 그리고 정말 거짓말같이 7년간 복용하던 약을 더이상 먹지 않아도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영적 무지함’으로 이를 알지 못한 저의 모습이 실상 저만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겪었던, 또는 겪고 있거나 겪어야 하는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영적 무지함을 벗어나,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신앙의 건강함까지 챙겨갈 수 있겠습니까?
[신앙의 건강함으로 가는 길, 순종]
6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우리가 신앙의 건강함으로 나아가는 길은 바로 ‘순종’이었습니다. 물론 맹인이라 몰랐을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십시오. 흙에 침을 툭하고 뱉는다 하여 진흙이 됩니까? 쉽지 않을 일입니다.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가래침이라 하여도 흙이 눈에 발라지도록 진흙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문뜩 보지도 못하는 맹인 앞에서 가래침 뱉는 소리가 얼마나 많이 들렸으며, 또 그 소리를 그는 그저 듣고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눈 앞에 그려졌습니다. 어쩌면 맹인 입장에서는 두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장애를 가진, 사회적으로 약자들을 향해 비웃고 놀리며 침 뱉는 것이 악습으로 있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앞도 보이지 않는 맹인 입장에서 침 소리는 PTSD가 오는 상황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눈에 흙을 발랐고 더 나아가 실로암으로 나아가 씻으라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가지고 실로암에 나아가 씻는, ‘순종’의 모습을 보였고 정말 예수님의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순종도 순종인데, 저는 예수님의 행동에서 우리는 어떤 순종이 우리의 삶에 주어져야 하며, 어떤 순종이 우리의 신앙을 건강하게 하는가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맹인에게 행하신 방법이 굳이 필요했을까 생각해보십시오. 그저 말씀 한 마디로도 고칠 수 있는 분이신데, 굳이 더럽다하면 더러울 수 있는 침을 흙에 섞어 눈에 바를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이게 우리에게 필요한 순종이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바대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어 눈에 바르는 것만큼 이해가 안될만한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이해가 안 되어도, 불가피하다 느껴져도 우리는 순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맹인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로를 믿는 것이 더럽고 또 힘들고 불편한 길이 될지라도 그것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면, 그 방법이 생명으로 안내하는 방법이라면 그저 순종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힘들고 불편한 길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실지라도 그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면 우리는 그저 순종하는 것이 매우 마땅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맹인은 육체적으로 건강함을 얻었지만, 여전히 신앙의 연약함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또 오늘 날 우리도 그런 모습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까? 육체적으로 건강을 추구하나 영적으로는 연약하고 무너져가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런 우리가 어떻게 신앙의 건강함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저 ‘순종’입니다. 주님께 순종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침과 흙을 섞어 진흙을 눈에 바르듯,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안내하실지언정 우리는 그저 불편함에도 주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견디는 것이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저 약속의 말씀 붙들고 세상의 유혹의 소리를 따르지 않고 끝까지 주님의 음성을 따라가는 것이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어진교회의 2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락방이 개강하였고, 다시 성도들간의 교제에 불을 지폈습니다. 그리고 일대일 양육이 곧 시작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훈련 신청을 받는 기간 중에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2학기의 일정들이 하나님 앞에 준비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순종해야 합니다. 이 수많은 일정이 ‘남의 일’이 될 것이 아니라, 불편해도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이끄시는 길’이라는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바라옵기로는 하나님의 이끄심에 그저 순종함으로 2학기의 일정들에 함께 동역함으로 육체적 건강 뿐 아니라 신앙의 건강까지 취하시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2학기의 모든 일정들 가운데,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함으로 나아가는 우리 되게 하소서
순종할 때 신앙의 건강함을 이루는 기회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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