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청을 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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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테바
테바
(영상)
몇 년 전 SNS를 뜨겁게 달군 일명 '과자 뗏목'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찾아보니 벌써 이 영상이 등장한지도 7년이 지났는데요, 과자를 만들 때 봉지 속에 실질적으로 들어 있어야 할 '과자'의 양은 적게 하고 충격보호제+산화방지제로 사용되는 '질소' 의 비중은 높게 하는 업체들의 관행을 지적하기 위해 벌인 퍼포먼스였습니다. 당시 저 영상을 보면서 두 청년의 열정에 감탄했던 기억이 나네요.
(ppt 컷)
오늘 과자나 과대포장에 대해서 주제를 삼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좀 뜬금없지만 이러한 질문으로 오늘 설교의 주제와 한 번 이어보려고 하는데요, 과자 뗏목은 배일까요 아닐까요?
선박법을 살펴보니 넓은 의미에서 배란 "수상에서 사람 또는 물건을 싣고, 이것들을 운반하는 데 쓰이는 구조물"을 말한다. 다시 말해 물 위에 뜬다는 부양성, 사람 또는 화물을 실을 수 있는 적재성, 그리고 적재된 것을 원하는 위치로 운반할 수 있는 이동성의 3요소를 동시에 갖춘 구조물을 배라고 부르는 거죠. 고로 과자 뗏목은 배가 맞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방주는 배일까요 아닐까요?
(ppt 컷)
방주를 상상하며 그린 복원도를 보면 여지없는 배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선박법에 따라 방주가 배인지 한 번 따져봅시다. 방주는 분명히 물에 뜹니다. 부양성을 가지고 있지요. 또한 방주는 사람 또는 화물을 실을 수 있습니다. 적재성도 가지고 있구요. 반면 적재된 것을 원하는 위치로 운반할 수는 없습니다. 이동성을 가진 듯 하지만 방주는 그저 물 위를 부유할 수 있을 뿐, 탑승한 사람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선박법에 의하면 부양성, 적재성, 이동성의 3가지 요소를 동시에 갖춰야 배라고 부를 수 있는데, 방주는 배라고 보기엔 어려운 것이지요.
방주라고 번역된 본래의 히브리어 단어를 보아도 방주는 배라고 보기에 어렵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배'를 가리키는 단어로 'אֳנִיָּה, 오니야'와 'סְפִינָה, 스피나'가 사용됩니다. 반면 ‘방주’를 가리키는 ‘תֵּבָה, 테바’가 사용되지요. 테바는 겉이 네모 모양을 띤 상자나 그릇을 통칭하는 단어인데요, 오니야나 스피아와 테바는 겉으로 보이기엔 모습이 비슷할 수 있습니다. 배나 방주나 겉으로 보기엔 모습이 비슷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요, 바로 키의 유무입니다. 겉모습이 배의 모습을 띄고 있다 할지라도 키가 없으면 그것은 배가 아니라 테바입니다. 배라고 불리려면 반드시 키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살펴본 선박법과 히브리어 단어의 뜻 모두 방주에 대해 핵심적인 부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방주는 방향을 조종하는 키가 없기 때문에 탑승한 사람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방주에 탑승해 있는 모든 것의 행선지는 결코 탑승자가 정할 수 없고, 오직 외부의 요인들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방주에 탑승하는 순간 내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방주 안에서는 그저 물이 흐르는대로, 바람이 불어가는대로 방주도 함께 떠밀려가다가 적당한 곳에 멈추기만을 바랄 수 있을 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방주에 탄다는 것은 나아갈 목적지를 결정하거나 나의 안전을 지킬 모든 수단과 방법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 땅을 뒤덮는 홍수 속에서 방주에 들어가면 생명을 보존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그저 내 운명을 거는 것이지요. 방주가 어디를 향하고 있고 어디에 멈추게 될지는 그 누구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방주를 운행해 가시는 것이니, 믿음이 없이는 결코 방주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방주는 스티어링 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곳, 나의 삶의 주도권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이 방주가 앞으로 닥쳐올 큰 고난과 시련에 비해서 너무 빈약해 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2장에 또 하나의 방주가 나오는데요, 바로 아기 모세를 담은 갈대 상자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갈대 상자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방주는 테바라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는데, 창세기에서는 방주, 여기서는 상자로 번역되었습니다. 둘 다 테바이기 때문에 갈대 상자와 방주 사이에는 재료와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그 본질과 쓰임은 같습니다. 즉, 갈대 상자는 노아의 방주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어쨌든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더 이상 모세를 숨길 수 없게 되자, 작은 갈대 상자에 모세를 담아 나일강물에 떠내려 보냅니다. 당시 나일강의 수위는 얼마나 깊었을까요? 물살은 얼마나 거칠었을까요? 갈대상자가 떠내려가기 시작해서 파라오의 딸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거리는 얼마나 됐으며, 가는 길목에 악어는 얼마나 많이 있었을까요? 모든 것을 다 따져 정확하게 그 과정을 추적하기는 힘들지만 분명한 것은 아기의 생명을 보장하기에는 이 작은 갈대 상자는 너무 턱없이 작고 초라해보인다는 것입니다. 튼튼한 나무로 만들어도 아기의 생명을 장담하지 못할 상황에 갈대를 엮어 만든 상자라니요! 급류에 휩쓸려 어디 바위에라도 부딪힌다면, 상자가 뒤집히기라도 한다면, 살냄새를 맡은 악어가 상자를 향해 입을 벌리기라도 한다면 아이는 한 순간에 세상과 이별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일강물을 이겨내기에는 갈대 상자는 너무 작고 연약했습니다. 노아의 방주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성이 무너지고 도시가 떠내려가는 큰 홍수를 이겨내기에는 방주 역시 작고 연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 테바에 관련한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작고 연약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갈대 상자를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또 비록 키는 없었지만 하나님은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갈대 상자를 붙드시고 운행하셨습니다. 노아와 모세는 그토록 큰 재앙와 고난 가운데에서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고, 조금도 빗나감이 없이 하나님께서 뜻하신 그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방주에 올라 하나님께 내 삶의 키를 맡겨드린 자들만이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지요.
교회
교회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갈대상자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예표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디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의 몸된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라는 테바에 믿음으로 함께 올라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겨내기에는 이 교회 공동체가 작고 연약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우리는 털끝하나 상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스스로 목적지를 정하고 방향을 조정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우리는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반드시 우리로 그렇게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우리가 주의깊게 살피며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방주 안팎에 역청을 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6: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출 2: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혹시 역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두산백과를 검색해보니 “일반적으로 역청이라고 하면 천연의 아스팔트나 그 밖의 탄화수소를 모체(母體)로 하는 물질을 가열 ·가공했을 때 생기는 흑갈색 또는 갈색의 타르 같은 물질을 말한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앞의 설명이 무슨 말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뒷부분 역청을 오늘날 타르라고 부른다는 것을 보면 무엇인지 조금 감이 오죠? 역청은 타르를 말합니다. 원재료가 무엇인지에 따라서 크게 목타르와 콜타르로 구분을 하는데, 목타르는 나무 진액으로 만든 타르를, 콜타르는 석탄으로 만든 타르를 가리키지요.
콜타르가 발견되고 사용된 것은 노아의 시대 이후로 보입니다. 그래서 추측하건대 노아는 아마 목타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노아가 당시 어떤 나무로 역청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고대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역청을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소나무 줄기를 끌로 파서 빼쭉한 가시모양을 만들어 송진이 그 홈으로 내려오게 하여 나무 밑에 항아리에 모은다.
2. 송진이 더 이상 흐르지 않으면 그 송진을 제공했던 나무들을 베어 공기를 차단시켜 천천히 태워서 순수한 탄소의 형태인 숯을 만든다.
3. 마지막으로 이 숯을 분말로 만들어 이미 얻어진 송진에 으깨면 선박의 방수처리를 위한 역청이 된다.
이 목타르는 시대가 지나 콜타르가 발견되면서 점차 대체가 되었는데, 목타르던 콜타르던 역청의 용도는 같습니다. 수많은 용도 중에서도 특히 방수처리를 하는데 많이 쓰였는데요, 절대 물이 새서는 안되는 곳에 안팎으로 이 역청을 발라 방수처리를 하는 것이지요. 오늘날에야 배를 만들때 쇠로 용접을 하기 때문에 역청을 바를 일이 없지만, 나무로 배를 만들던 시대에는 역청으로 방수처리를 하는 것이 필수였습니다. 역청을 바르지 않으면 나무와 나무가 이어지는 사이 사이마다 물이 새서 배는 제대로 물 위에 뜨지 못할테니까요. 배를 만들 때 너무나도 당연하게 필요한 프로세스를 뭐 대단한 하나님의 명령인 것처럼 설교를 하냐 말 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이 구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역청은 방주(테바) 밖에 있는 물이 안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역청이 제 구실을 하고 있어야 배는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지요. 만약 조금의 틈이라도 생긴다면 이는 방주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생존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안팎으로 꼼꼼히 발라야 합니다. 혹 열이나 충격으로 역청에 문제가 생기면 곧장 보수를 해줘야 합니다. 절대 방주 바깥과 방주 안쪽 사이에 틈을 내주어서는 안됩니다. 틈을 내주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번지게 될 수 있으니까요.
이 시대의 구원의 방주인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지금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습니다. 방주가 물위에 떠 있던 것 같이 교회도 세속의 물결 위에 떠 있습니다. 방주가 아무리 잘 만들어졌다해도 방주 안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 방주는 물에 잠겨 가라앉아버리고 말 것임에 분명합니다. 이처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자 구원의 방주로서 세속의 물결 위에 떠 있지만 세속의 물결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이내 교회는 세상에 잠겨 가라앉아버리게 됩니다.
조금의 틈도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 조그마한 틈 사이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어느새 우리가 도저히 막아설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이러한 틈을 내어주게 되는걸까요? 무엇이 이러한 틈을 만들어내는 걸까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요한1서 2:15 (NKRV)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야고보서 1:27 (NKRV)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말라 말씀하신 세상은 세속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문화를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문화 속에 얼마나 많은 헛되고 무익하고 죄악된 사상들이 가득합니까? 유물주의, 인본주의, 세속주의, 다원주의의 사상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심히도 음란하고 폭력적인 세상 문화가 이제 교회 안에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중심, 그리스도의 구속중심의 복음 진리를 깨닫고 이 진리를 굳게 지키는 것만이 썩고 마구 썩히는 세상에 썩지 않는 것입니다. 방주가 일년이상 떠 있으려면 썩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에 세속이 들어오지 않고 썩어져 가는 세상에 따라 썩지 않으려면 진리말씀 가운데 행하는 것 뿐입니다. 세상에 침몰되지 않고 세상에 썩지 않아야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의 사명도 감당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문화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역청을 안팎으로 꼼꼼히 바르십시오. 혹여나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틈이 생겨났을 때 곧바로 그 틈을 메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