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이라는 용광로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76 viewsNotes
Transcript
찬송가 336장 - 사도신경 - 성경봉독
찬송가 336장 - 사도신경 - 성경봉독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지난 한 주 동안 새벽예배 시간을 통해 데살로니가전서를 나누었었는데요, 오늘부터는 3일간 데살로니가후서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서신이지만 중요한 내용, 특히 재림에 관련해서 깊이 생각해볼 만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앞으로 3일 동안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큰 은혜를 주셔서,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며 그날에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께 합당한 모습으로 세워져가게 인도해주시기를 바래봅니다. 고린도후서의 원래 제목은 헬라어로 프로스 데살로니가케이스 베타라고 읽는데요,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머무는 동안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지역의 소식을 가져오곤 했는데요, 이 지역의 성도들의 신앙을 지도하기 위해 먼저 쓴 편지로 데살로니가전서가 있었고, 이후 다시 이어서 쓴 편지가 데살로니가후서인 것이지요. 먼저 쓴 데살로니가전서를 가지고 갔던 디모데가 돌아오고 그들에 대한 소식을 바울이 들었습니다. 먼저번의 편지에서 그들의 신앙에 대해 칭찬했던 바울은 이제 바르지 못한 그들의 신앙생활을 잡아야 할 필요를 느껴 곧장 후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1절과 2절에서 바울은 먼저 데살로니가전서에서와 비슷한 인사로 편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살후 1:1-2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인사말에 대해서는 아마도 데살로니가전서를 다룰 때 했을 것 같으니 넘어가겠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이렇게 그의 편지를 이어갑니다. 살후 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여기서 바울은 독특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당연하다라고 번역된 본래의 헬라어 단어 ‘ὀφείλω’는 갚을 의무가 있는 빚을 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의 사역자들인 자신들이 감사할 수 밖에 없다고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먼저 믿음이 더욱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각기 서로 사랑하는 것이 풍성해져 가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역자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바울이 그토록 칭찬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다음절에 그 내용이 등장합니다. 살후 1: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바울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박해와 환난 중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로서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바울이 그토록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지역에서의 박해와 환난은 다른 지역에서 경험하던 것과 비교해 상당히 거칠고 난폭한 수준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그 내용이 등장하는데요, 바울과 일행이 데살로니가 지역에 복음을 전하자 그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모아다가 그들을 쫓아다녔습니다. 결국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을 쫓는 유대인들 때문에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베뢰아에서 아덴까지 도망을 가게 되지요. 후에 바울은 이 때를 회상하며 자신이 이 지역에서 3주밖에 견디지 못했고 그 후에 들어가서 격려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여기 본문에서 환란이라는 말은 본래 “들립시스”라는 헬라어인데요, 이 말은 무거운 돌에 가슴이 눌려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데살로니교회 성도들은 매일 무거운 돌로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어려움을 당했다는 것이며, 그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본문에서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이러한 박해와 환난을 견디고 있다며 현재형으로 표현을 하고 있는데요, 이는 박해와 환난이 과거의 일로 지나간 것이 아니라 바울이 편지 쓰고 있는 시점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뜻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부터 계속된 박해와 환난 중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며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와중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서로를 향한 사랑이 놀랍게 성장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칭찬을 아낄래야 아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박해와 환난을 받은 데살로니가교인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인내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도 바울은 그들이 소망의 인내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요, 여기서 인내란 헬라어로 “휘포모네”입니다. 이것은 억지로 참아내고 견뎌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주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참아내고 견뎌내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배고픈 아들이 주방에서 음식하는 엄마의 도마소리를 들으며 맛있게 먹을 것을 기대하고 배고픔을 참는 것 같은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가진 소망이 크고 확실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토록 심한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마도 그들에게 이렇게 교훈하였을 것입니다. 딤후 2:11-12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든 믿는 자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며 주님과 함께 왕노릇 하게 될 것임이 그들에게 밝히 드러났습니다. 이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기대하는 자들에게, 주와 함께 왕노릇 하게 될 것을 소망하는 자들에게 잠깐의 박해와 환난은 기꺼이 참아내며 견뎌낼만한 것이 되었습니다.
또한 휘포모네는 박해와 환난 속에서 그저 가만히 버티고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가운데에서 더욱 열심히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문이 닫혔다고 그 밑에서 마냥 참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다른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 문도 닫혔으면 또 다른 문을 두드리고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는 자세, 이것이 바로 ‘휘포모네’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의 정체성을 “나그네”라는 말합니다.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중에 있는 나그네의 길에 분명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가 있을 수 있지만, 거기서 멈추어 서서 그저 가만히 버티고 있는다면 그는 결코 본향에 이를 수 없습니다. 어려움과 장애과 있더라도 떨쳐내고 계속해서 걸어야 본향에 이르게 되는 법이지요. 크고 확실한 소망은 박해와 환난으로 지치고 무거워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발걸음을 다시 한 번 힘있게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이르게 될 천국을 향한 소망이 있었기에 하루하루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성실하게 믿음의 걸음을 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성도가 겪는 박해와 환난이 결코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거나 저주하시거나 심판하시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살후 1: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시려 박해와 환난을 주신다 밝히고, 또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고 교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구원받을만한 참 믿음이 있는지 드러내시기 위해 박해와 환난을 허락하십니다.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소망을 품고 인내하게 되구요,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집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더욱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그를 빚어가기 위해 박해와 환난을 허락하십니다. 이러한 박해와 환난은 사실 성도들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큰 박해와 환난을 주시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신앙의 성장을 이룰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과 환경을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교훈하였습니다.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야곱이 보낸 거친 나그네 세월이 마침내 그를 이스라엘로 변화시켰음을 기억하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보낸 인고의 세월이 그를 이스라엘의 목자로 변화시켰던 것도, 풀무불과 사자굴이 다니엘과 세 친구라는 신앙의 영웅을 만들어냈던 것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성장시키기 위해 얼마든지 박해와 환난을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받는 고난은 그들의 죄로 인한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라면 그것이 정금보다 귀한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이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마지막 단락입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박해와 환난 뒤에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살후 1:6-9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바울의 말처럼 악인에게는 심판이 의인에게는 안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믿음 때문에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그 고난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결국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게 되는 과정이라 교훈하며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수많은 구절이 마침내 우리가 받게 될 구원과 상급을 가리키며 반짝이고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구절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까! 생명의 면류관이 우리에게 예비되어 있고, 상급이 준비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보좌 앞에 둘러앉게 될 것을 마음 속에 그려보면 언제나 우리의 마음이 참 든든해집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교훈하였습니다. 벧전 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지금은 비록 성도들이 환난과 박해 속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으로 갚아주실 것이며, 기쁨으로 갚아주실 것이며, 영원한 삶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날은 반드시 속히 올 것입니다.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니 우리의 삶에 있어서 박해와 환난이 결코 어색하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우리의 신앙에 당연히 따라오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0:17-22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은 이렇게 교훈하였지요.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성도는 박해와 환난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의 삶은 매일 죄와 싸우고 세속적인 가치관으로부터 짓눌림을 당하는 삶인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선함과 악함을 분별하며 세속적인 것들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매일 말씀으로 싸우는 삶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의 삶에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겪었던 것과 같은 육체적인 박해와 환난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성도들을 향한 박해와 환난은 더욱 은밀하고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쾌락, 재물, 명예, 정욕의 유혹은 육체적 박해보다 더 심하게 다가오고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적 박해는 도리어 믿음을 강화시키지만 영적 박해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서서히 죽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란과 박해는 결코 저주가 아니다. 성도의 삶에 박해와 환난은 당연한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임을 인식합니다. 그 후로는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보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소망을 품고 휘포모네 하라. 유혹에 얽매이지 말고 전진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