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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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출애굽기 17:1-7, 사순절 셋째 주일, 2011년 3월27일
생존에 대한 요구
오늘 설교 본문인 출애굽기 17:1-7절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광야시절에서 겪은 일종의 에피소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이라는 곳에 이르러 장막을 쳤습니다. 몽고의 유목민들을 생각하면 이들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는 곳을 찾아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도착한 르비딤에 마침 물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다투는 이야기가 두 번 반복됩니다. 한번은 2절입니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책임을 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다른 한번은 3절입니다. 그럭저럭 시간이 좀더 흘렀던 것 같습니다. 물 문제는 해결이 안 되고 사람들은 목이 더 말라갔습니다. 백성은 모세에게 따지고 들었습니다. 모세를 원망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백성은 모든 책임을 모세에게 전가했습니다. 애굽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우리를 왜 끌어냈느냐는 겁니다. 끌어냈으면 최소한 먹고 마시게는 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광야에서 물이 부족한 상황은 모세도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광야로 나온 이상 모두 그것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백성이 모세를 향해서 ‘당신 때문이야. 책임 져.’ 하고 나옵니다. 이런 정도면 막가자는 이야기입니다. 백성의 입장을 이해 못할 것은 없습니다. 어른들이야 목마른 걸 그런대로 참는다고 하지만 노약자들에게는 치명적입니다. 자칫하면 가나안은 둘째 치고 광야에서 모두 물이 없어 전멸할지도 모릅니다. 물은 실제로 생존의 필수조건입니다. 백성들은 애굽의 나일강이 기억났겠지요. 비록 소수민족으로 불이익을 받는다 해도 마실 물만은 풍부했습니다. 나일강에서 목욕도 하고, 고기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모두 목이 말라 죽을 지경입니다. 이럴 바에야 애굽에 머물러 있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는 생각이 이심전심으로 들었겠지요. 그들은 모세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옆에서 조금만 참으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광야시절에 반복되었던 겁니다. 출 15:22절 이하에 따르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에 도착했을 때 물이 오염되어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백성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물을 마실 수 있게 된 다음, 다시 길을 떠나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먹을거리가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또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출 16장)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구체적인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을 공격하기 전에 각 지파에서 뽑은 12명의 정탐꾼을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정탐꾼이 돌아와서 보고했습니다. 10명은 가나안 족이 너무 강대해서 이스라엘은 마치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전했습니다. 맥이 풀리는 보고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10명의 보고는 객관적인 것이고, 2명의 보고는 주관적인, 또는 신앙적인 보고입니다. 백성들은 객관적인 보고를 받아들였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다시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민 14장)
우리는 이런 일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고 아주 쉽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분명해서 그들과 다르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그런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겁니다. 우리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을 경제성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이 생산하고 수출하고 달러를 벌어들이는 것에만 마음을 둡니다. 원전만 해도 그렇습니다. 원전이 우리 후손들에게 어떤 재앙이 될지 정확한 정보도 없으면서 지금 당장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원전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런 원전 건설에 우리나라가 전(全)세계적으로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돈벌이가 모든 가치를 압도해버리고 말았습니다. 3천5백 년 전 마실 물이 없다고, 먹을거리가 없다고, 가나안이 너무 강하다고 한탄하고 자중지란을 일으킨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세는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 할까요? 백성들을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설득으로 가능한 게 있고, 가능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여호와는 모세에게 이렇게 일렀습니다.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를 들고 호렙산의 반석을 치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었겠지요. 호렙산의 어떤 물줄기를 발견하게 된 것인지 모릅니다. 모세가 직접 찾아갔든지, 아니면 그쪽 지리를 잘 아는 어떤 누가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민 10:29절 이하에 따르면 모세의 처남인 호밥이 광야에서 가이드 역할을 했습니다. 어쨌든지 물을 얻게 된 백성들은 좋아라 했겠지요. 여호와가 살아계신 증거라고 찬송을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성서기자는 그 사건을 전혀 다르게 평가합니다.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은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다,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였다는 것입니다. 목이 말라 죽기 직전 절체절명의 순간에 물을 얻었다면 기적의 샘이라거나 생명의 샘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불신앙적인 사건이 벌어진 장소로 기억된 것입니다. 모세는 죽기 직전에 행한 설교에서 이 맛사 이야기를 다시 거론했습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고 말입니다.(신 6:16)
표적 신앙
원래는 르비딤이라고 하고 나중에 맛사, 또는 므리바로 이름이 바뀐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일이 정말 크게 잘못된 것일까요? 그들이 노골적으로 우상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살인을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마실 물이 없어서 그것을 달라고 한 것뿐입니다. 아주 현실적인 요구였습니다. 그것이 정말 나쁜 일이었다면 아무리 그들이 물을 원한다고 해도 주지 말아야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반석의 물을 허락하셨다는 걸 보면 그들의 요구가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서기자의 판단에 따르면 그것은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어 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은 표적을 보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오고 물이 나오는 것과 같은 표적들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광야에서 생존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들과 함께 하신다면 당연히 받아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대단히 상식적으로 현실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일까요? 왜 그것이 성서가 주목하는 죄일까요?
마태복음 16:1절 이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시험의 내용은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는 표적을 요구한 것입니다. 여기서 표적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런 요구가 약간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원래 많은 이들의 병을 고치셨고, 오병이어를 일으키기도 했고, 악한 영을 내어 쫓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알고 있었을 바리새인들이 또 다시 기적 운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보다 더 큰 기적을 요구한 건지, 아니면 예수님에게 그런 일들이 별로 없었다는 건지 정확하게 알기는 힘듭니다. 예수님의 답변에서 이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마 16:4)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큰 고기 뱃속에서 밤낮 삼일동안 지낸 사건을 가립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기대한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뱃속의 3일은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이야기의 그 3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외에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그 어떤 표적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영적인 숙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표적이 절대 아닙니다.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고 미련한 것입니다. 이미 바울이 그것을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메시아가 무기력하게 죽었다는 사실이 어떻게 생명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표적이 될 수 있습니까. 부활은 세상 사람들에게 경험되지 않는 종말론적 생명사건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경험이 안 됩니다. 이는 마치 뜨거운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의 경험이 다른 이들에게는 무미건조한 것과 비슷합니다. 거리낌의 대상인 십자가와 경험이 불가능한 부활을 가장 중요한 신앙의 토대로 삼는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보다는 심리치료나 도덕성을 중심으로 삼는 것이 덜 위험합니다. 그런 것은 누구나 좋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취미생활로 교회를 다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죽음과 삶의 문제이지 삶의 취향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여호와를 시험한 맛사 이야기를 보십시오. 광야의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늘 생존의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기에 그들이 표적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는 것은 이해할만하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들의 생각은 예수님에게 표적을 구한 바리새인들의 생각과 똑같습니다. 이들은 모두 표적 신앙의 대표자들입니다. 이 대목에서 여러분은 좀 혼란스러울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표적을 구하는 게 왜 잘못이냐, 하고 말입니다. 신구약성서 전체에 그런 표적이 지천으로 널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도 그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표적들이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표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표적을 요구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표적은 나중에 드러납니다. 그것을 미리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 표적을 미리 요구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시겠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그것이 표적으로 나타납니다. 그 표적을 아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기대하는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잘못된 표적 신앙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표적 신앙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그 답은 명백합니다. 표적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요구하고 기대하는 표적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자기의 짧은 경험으로 아는 최선의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사실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 것인지를 판단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무조건 자기의 기준으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요구와 기대에 치우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심심하고 무기력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얼마나 새롭고 놀라운지를 조금이라도 눈치를 챈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내 눈높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높이에 여러분의 운명을 맡기는 게 참된 신앙입니다. 예수님마저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그의 행위를, 그의 섭리를, 그의 생명 통치를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마십시오. 여호와를 시험하지 마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