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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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니지요?”
마태복음 26:14-25, 사순절 마지막 주일, 2011년 4월17일
오늘은 사순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고난주일, 또는 종려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종려주일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는 사실에서 유래합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왕을 환영하는 듯한 멋진 장면입니다만 실제로는 비극적인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고난과 죽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십자가에 처형당합니다. 33살의 나이로 죽음을 눈앞에 둔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대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간 것일까요? 제자들은 왜 스승의 처형을 막지 못한 것일까요?
복음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넘겨주기로 약속하고 돈을 받았다고 합니다. 유다가 자기 스승인 예수님을 판 이유는 복음서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유추는 가능합니다. 말 그대로 돈에 욕심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은 30을 받고 스승을 파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인격이 파탄된 인물입니다. 유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맡을 정도로 예수님의 신임을 받았고, 열두 제자들 중에서 학문이 가장 깊었던 사람입니다. 메시아 관이 충돌했기 때문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유다는 무력혁명도 불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만을 선포했습니다. 이런 차이를 결국 극복하지 못해서 배신했다는 말도 가능합니다. 복음서를 사실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체포 장면에서 유다의 역할은 미미했습니다. 제사장의 사병(私兵)들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유다가 예수께 입을 맞추는 것뿐이었습니다. 유다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사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유다의 배신에는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따라가기 힘든 어떤 곡절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체포에 관련된 미묘한 사태를 이해하는데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다음입니다. 배신은 유다만의 문제가 아니라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에게 해당됩니다. 마 26:31절 이하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시고, 대표자로 베드로를 지목합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유다와 베드로의 행동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베드로는 자기 행동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했지만 유다는 자살로 끝냈다는 차이는 그렇게 결정적인 게 아닙니다. 오히려 유다가 자기잘못에 대해서 더 엄격했는지도 모릅니다. 같은 자리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부인한 베드로의 잘못이 더 엄중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베드로에게는 너그럽고 유다에게는 인색합니다. 복음서도 그런 입장을 견지합니다. 거기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어떤 상황이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가룟 유다에게만 모든 책임을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당시 배신에서 자유롭지 못한 제자들을 대표할 뿐입니다. 그 내막이 어떤지를 알려면 본문을 꼼꼼히 살펴야합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넘겨주겠다는 계략을 꾸미고 돌아온 뒤에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먹게 되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은 모든 유대인들이 지키는 의식입니다. 양을 잡고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습니다. 이런 특별한 먹을거리는 출애굽 사건에 기원합니다. 유월절(逾越, pass over)은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죽음의 천사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유대인의 집만은 비켜갔습니다. 민족 멸절의 위기를 넘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양을 잡고, 그것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기억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먹으면서 자신의 운명이 유월절 양과 같다는 생각을 하셨겠지요. 피하고 싶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21절) 제자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근심에 싸였습니다. 각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아니지요?”(22절) 예수님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제자들은 이 말씀을 실감나게 들었을 겁니다.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다는 말은 한 상에 둘러앉은 가족이나 형제, 친구처럼 아주 가깝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이어서 예수님은 스승을 판 이가 감당해야 할 운명의 짐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좋을 뻔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징벌을 없습니다. 존재할 가치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 되니까요. 초기 그리스도교에는 이에 관한 신학적인 논란이 벌어졌을 겁니다. 지금 우리도 생각해야만 할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인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고 한다면 가룟 유다의 행위도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른 것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만약 유다의 배신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인류 구원이 불가능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그럴듯하지만 역사를 원인과 결과라는 실증적인 관점으로만 보는 견해입니다. 복음서 기자는 그런 견해와 논란을 한 마디로 잠재웁니다. 스승을 판 제자는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못한 운명에 처해진다는 것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가룟 유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자신의 음모가 들통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까요? 아니면 이 위기를 모면할 궁리를 짜느라 정신이 없었을까요? 그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겁니다.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25절) 이미 앞에서 다른 제자들이 한 말입니다. 유다도 말했을 텐데, 양심이 찔린 탓으로 다시 확인하고 싶었겠지요. 도둑이 제 발 저려한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라고, 진리를 거스르지 않는다고, 스승을 배신하는 철면피가 아니라고 발뺌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여기서 예외는 아닙니다. 모든 제자들은 배신의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 모두 도망갔습니다. 일부 여자들만 빼고 모두 그랬습니다.
“나는 아니지요?”라는 제자들의 발언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위기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속한 모든 이들이 이런 불안을 안고 신앙생활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30대 초반의 한 유대인 남자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추종자들을 조직하거나 지금 우리가 말하는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고, 부처나 공자처럼 천수를 누리면서 많은 가르침을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남아 있는 것은 죽어서 무덤에 장사되었던 예수님을 생명의 실체로 만났다는 일부 제자들의 경험뿐입니다. 그것에 근거해서 주변의 눈총을 받으면서까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남아 있기는 어렵습니다. 아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떠났을 겁니다. 그냥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 배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아직 떠나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기회만 오면 떠날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남아 있는 사람들이 받을 정신적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나는 아니지요?”라는 발언에는 배교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정신적 불안감이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배신과 배교를 믿음이 없는 탓이라고 나무라고 싶은 분들도 있겠지만, 오늘 우리가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그들과 똑같이 배교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를 등한히 여긴다거나 떠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교회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신앙생활에 열정을 보이면서도 내면적으로 예수님을 은 30에 팔 수 있습니다. 이중적으로 얼마든지 처신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나는 아니지요?” 하고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명합니다. 물론 일부러 이렇게 위선적으로 신앙생활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신앙으로 끌려들어갑니다. 무엇이 예수님의 뜻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주로 그리스도교가 교권으로 자리 잡을 때 일어납니다. 교회가 말씀과 영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교회권력에 사로잡히는 것을 가리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와 20세기 초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던 정교회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이야기는 교권에 찌든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전합니다.
많은 분들이 오늘 한국교회도 이런 증상을 보인다고 걱정을 합니다. 기독교계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속 사회에까지 크게 불거진 사건도 적지 않습니다. 부도덕성, 분열, 개교회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개교회 안에서도 싸우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별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주먹다짐을 하기까지 합니다. 한기총의 대표회장 선거에서 거액의 돈봉투가 오갔습니다. 감리교회는 감독회장 선거 후유증으로 수년 동안 사법 재판을 받았고, 판결이 났는데도 여전히 해결될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한국교회에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이런 행태는 본문이 명시적으로 말하는 제자들의 배교와 행간에 들어 있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배교와 다를 게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설교를 듣고 이제 정신 차려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말이구나, 바른 믿음을 지키라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제자들처럼 유치하게 살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바른 믿음을 지켜나가도록 노력하십시오. 그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대표하는 유다의 배신으로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을 향한 인류의 배신입니다. 예수님의 처형에는 유다만이 아니라 유대교 지도자들과 민중들, 그리고 로마 제국이 모두 연루되었습니다. 그들은 인류 전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살해자가 곧 인간입니다. 니체는 1882년에 쓴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 제3권 ‘미친 사람’이라는 제목이 붙은 단락에서 “신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미친 사람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신은 어디로 갔는가? 나는 이것을 너희들에게 말하려고 한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니체의 그리스도교비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기 위해서 음모를 꾸민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현실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살기 힘든데 그렇게 거창하고 고상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허투루 읽는 겁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그리스도교 영성 안으로 들어가기는 힘들겠지요.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의 실상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뒤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가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나를 팔리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각자 “나는 아니지요?” 하고 대꾸한 제자들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인류의 비겁하고 영악하고 비루한 배신과 변명의 역사를 헤치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내셨습니다. 그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분께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구원 신비를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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