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 받으신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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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 받으신 예수
마 4:1-11, 사순절 첫째 주일, 2014년 3월9일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독일의 대문호로 불리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대표작은 <파우스트>입니다. 이 작품은 괴테가 20대에 착상을 시작해서 죽기 직전인 82세에 완성했다고 합니다. 자그마치 60년에 걸쳐 집필된 작품입니다. 그 작품의 기본 골격은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파우스트 박사를 유혹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악마는 노년의 파우스트에게 젊음을 통한 삶의 향락을 허락해주는 대신 죽을 때 영혼을 자기가 소유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자 파우스트는 그런 조건으로 악마와 계약을 맺습니다. 이런 구상은 구약의 <욥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욥도 악마의 유혹을 받았지만 파우스트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인간은 크고 작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유혹과 전혀 상관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처음 사람인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은 받아서 타락했다고 말합니다. 그게 인간의 실존이라는 뜻입니다. 믿음 생활을 아무리 잘해도 유혹을 받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도 유혹은 있습니다. 죽어야만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주기도에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내용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도 유혹을 받으셨다고 복음서 기자들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마 4:1-11절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출가 후 광야로 나가셨을 때 마귀가 나타나서 예수님을 세 가지로 유혹했고 합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마귀와 대화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좀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마귀가 실제로 나타난다는 건 만화나 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고 말입니다. 하기야 교인들 중에는 성서에 묘사된 마귀를 뿔이 달리고 시커멓게 생긴 어떤 실체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으니, 오해할만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신데 어떻게 시험을 받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문점을 염두에 두고 본문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를 통해서 의문점이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1) 마귀가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당시 예수님은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게 먹을 거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마귀의 요구는 예수님에게도 아주 실존적인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요구는 더 근본적인 유혹이었습니다. 먹을거리 문제는 인간 생존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일단 먹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인간 문명도 가능하고 현실적으로 신앙생활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그걸 약속으로 내겁니다. 몇 년 후에 3만 달러, 4만 달러 소득을 올리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밥 먹듯이 내뱉습니다. 국민들은 그런 말에 솔깃해합니다. 마귀의 유혹은 이렇게 매력적인 겁니다. 4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마귀에게 신 8:3절을 인용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2)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려봐라.’ 하고 유혹하면서 시 91:11절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시켜서 예수님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안전히 지켜줄 것이라는 겁니다. 마귀도 성경을 인용합니다. 성경이 인용되었다고 해서 그게 다 옳은 게 아니고, 오히려 악하게 사용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경을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사용하고 해석을 왜곡하는 겁니다. 마귀의 이 유혹도 아주 매력적인 겁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신에게 초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소위 신유집회가 한국교회에서 오랫동안 유행했고, 지금도 그런 치유사역을 전문적으로 하는 집단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큰 병에 걸린 사람을 기도로 고치겠다고 약속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합니다. 허황된 말이라도 혹시나 해서 귀를 기울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이렇게 이용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마귀의 유혹과 다를 게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 6:16절을 인용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3)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고,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마귀가 허튼 약속을 한 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유혹은 그럴 듯합니다. 그가 약속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과 그 위엄을 가리킵니다. 로마의 황제나 귀족이 되거나 로마의 경제 권력을 잡는다고 가정해보십시오. 당시 여기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마귀의 이 유혹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보다는 오늘 우리에게 더 실감이 납니다. 요즘 젊은이들을 비롯해서 모든 현대인들은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도 돈과 권력을 손에 넣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시고, 신 6:13절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위에서 간단히 설명한 마귀의 세 가지 요구, 또는 약속, 또는 유혹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돌을 떡으로 만들어서 모든 굶주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도 새처럼 가볍게 땅에 내려앉을 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세상의 권력과 명예를 손에 얻을 수 있는 인생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마귀의 유혹이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 유혹 앞에서 예수님은 ‘사탄아!’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예수님의 운명을 막으려던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이 던지신 말씀(마 16:23)과 표현이 똑같습니다. 고난을 무조건 저주하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부추기는 것은 곧 사탄의 유혹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더라도 이왕이면 그런 능력이 있으면 좋지 않으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그런 능력을 성취하는 게 바로 예수를 믿는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인생이 거덜 날 것처럼 위협하는 교회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철저한 기복주의이고 세속주의 신앙입니다. 그게 바로 마귀의 유혹입니다. 한국교회는 상당한 정도로 성령이 아니라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말이 될까요?
제가 보기에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자체 모순에 빠져 있습니다. 신앙의 내용은 내세적이고 초월적인데 실제 삶의 내용은 철저하게 기복적이고 세속적입니다. 신앙이 성속이원론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권력 지향적이고 자본주의적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단지 신앙의 형식으로만 남아 있고 교회의 힘을 세속적으로 나타내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그런 행태를 보이기에 일반 신자들은 그게 옳은 것으로 여깁니다. 지난 주 목요일(3월 6일) 서울 코엑스 D홀에서 제46회 국가조찬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소식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서 정, 교계 인사 3천여 명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겠다는 생각은 누가 뭐라 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자도 아닌, 오히려 불교에 가까운 대통령까지 앉혀놓고 기자들 카메라 세례를 받으면서 조찬을 겸해서 기도회를 연다는 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땅바닥으로 낮추는 가장 거룩한 종교행위인 기도회라기보다는 권력을 추종하는, 또는 기독교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 모임에 가깝습니다. 세상 모든 나라와 영광을 주겠다는 마귀의 유혹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본문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요구한 세 가지 항목을 하나로 묶으면 ‘당신이 메시아라는 증거를 보여라.’입니다. 그 세 가지를 성취할 수 있다면 메시아로 추앙받을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자신이 메시아라는 증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 없이 메시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돌에게 명령을 내려서 떡이 되게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요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초능력이 있다면, 그리고 세상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다면 사람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습니다. 마귀의 이런 요구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도 연관됩니다. 로마제국을 향한 유대인들의 무력독립운동인 유대전쟁은 기원후 70년에 실패로 끝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힘만으로 로마 제국과 맞선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건 로마 제국을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메시아의 도래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실제적인 힘으로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준 세 가지 대답을 기억하시지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게 하나이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게 다른 하나이고,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라는 게 또 하나입니다. 각각 신명기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이걸 하나로 묶으면 ‘하나님만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능력을 보이라는 마귀의 요구와 하나님만 믿으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마귀의 요구는 아주 실제적이고 실용적이고 구체적입니다. 사람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것들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의 대답은 막연해 보이고, 추상적인 것처럼 보이고, 비현실적으로 보입니다. 하나님만을 신뢰하라는 게 손에 잘 잡히지 않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하나님을 믿는 게 밥 먹여주나,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현실적으로 필요한 문제들을 간과한 채 하나님만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그 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떡이 필요하고, 특별한 능력이 필요하고, 세상의 영광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그런 걸 완전히 떠나서 사는 게 아닙니다. 마귀의 요구는 우리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입니다. 예수님도 그것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수단들이지 생명 자체는 아닙니다. 그것에 매달리면, 또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면 생명을 얻는 게 아니라 오히려 훼손시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귀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하나님만 신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이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님의 메시아 능력을 제시하라는 요구를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신뢰하면서 사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걱정거리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도 걱정거리를 머리에 이고 삽니다. 자신의 인생이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귀의 요구에 길들여져 있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마귀의 방식으로 생명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어떻게 하면 돌을 떡으로 만들지, 기도를 얼마나 해야 이런 능력이 생길지에만 신경을 세우고 삽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자기에 대한 염려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그런 자기염려에 빠지라고 유혹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세 가지 유혹은 결국은 자기염려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성취하려는 염려이자 연민이며 열망입니다. 이것보다 더 강렬한 것도 없습니다. 현대 문명은 그걸 자극시켜서 상품을 팝니다. 티브이 프로그램도 이런 걸 자극하기 위해서 막장으로 내닫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죄는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에게 집착할수록 점점 더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동의하시나요?
어떻게 하면 마귀의 달콤한, 그리고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는, 그러나 결국은 미망과 죄와 죽음에 빠지게 하는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하나님만 온전히 신뢰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비관적으로 보면, 아담 이후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할 운명으로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제가 여기서 어떤 뾰족한 길을 안내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당장 내일 아침부터 완전히 새로운 삶과 믿음의 차원에 들어갈 수 있는 왕도를 제시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길을 대신해서 전해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의 제2독서인 롬 5:12-19절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설명입니다. 19절에서 이르기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앞의 한 사람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취한 아담이고, 뒤의 한 사람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는 의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에 집중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삶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뻔한 설교라고 생각하시나요?
세상의 원리로 설명해야겠네요. 사람들은 존경받는 사람 곁에 가면 그 사람의 기운을, 또는 영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명훈 같은 지휘자가 함께 있으면 음악적인 기운이 전달되는 거와 같습니다. 거꾸로 돈만 밝히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그런 기운이 전달됩니다. 예수님이 옆에 있다면, 즉 우리가 그분의 생각과 그분의 운명에 가까이 간다면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생명이 전달됩니다. 예수님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은 어쩌다가 유혹에 떨어졌다가도 다시 벗어납니다. 여러분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 모르겠으나, 다음의 한 가지 사실만은 잊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이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으나 이기시고 생명의 주인이 되셨으며, 바로 그분이 지금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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