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여호와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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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여호와의 영
삼상 16:1-13, 사순절 넷째 주일, 2014년 3월30일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자녀들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윗처럼 살기를 바라십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요즘 젊은이들 표현으로 ‘대박이다.’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저 같으면 곰곰이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인물인 게 틀림없지만 인생살이로만 본다면 별로 행복하게 산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는 흔히 말하듯이 성군이 아닙니다. 세상에 성군은 없습니다. 정치는 그 속성이 권모술수이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사울 왕의 부마이자 경호 실장으로 활동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왕위 찬탈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도 흠이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자식교육에도 실패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서 야반도주하듯이 도망 다녀야만 했습니다. 소위 왕자의 난으로 인해서 자식들끼리 골육상쟁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의 아들인 솔로몬을 편애했습니다. 솔로몬은 배 다른 형제들을 모두 제거하고 다윗의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있었는지 몰라도 백성들의 마음을 사지 못했습니다. 나라가 남유대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된 일차적 책임이 솔로몬에게 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윗에게도 있습니다.
볼 거 못 볼 거 다 겪어 영혼의 상처가 아주 깊었던 다윗을, 그래서 제가 그런 방식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여긴 다윗을 성서는 위대한 왕으로 규정합니다. 시편의 대부분이 다윗 이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조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삼상하와 왕상하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게 다윗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의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증거입니다. 신약성서도 다윗을 높이 평가합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고대 교부들은 다윗을 그리스도의 예표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가지 약점이 많았던 다윗을 신구약성서와 교회 역사가 이렇게 위대한 인물로 여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삼상 16:1-13절에 그 대답의 단초가 나옵니다.
다윗 이야기는 대략 3천 년 전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고대 이스라엘은 부족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대표한 인물은 사무엘입니다. 그는 제사장이자 선지자이며 사사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전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는 왕을 세워달라는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입니다. 심사숙고해서 사울을 첫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 이후 사무엘은 종교를 대표하고, 사울은 정치를 대표했습니다. 종교와 정치의 분리가 시작된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무엘과 사울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사무엘은 결국 사울을 배척하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워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심을 밀고나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왕이 된 사울은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였습니다. 다른 왕을 세운다는 것은 반역입니다. 사울 왕이 그 사실을 눈치 치면 사무엘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사무엘은 이 일을 아주 비밀스럽게 진행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형식으로 묘사된 본문 2, 3a절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사울의 눈을 속이고 새로운 왕을 옹립할 수 있는 묘책이 나온 겁니다. 사무엘은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부근의 마을로서 예수님의 출생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전합니다. 특히 누가복음은 베들레헴을 ‘다윗의 동네’라고 지칭합니다(눅 2:11). 베들레헴 원로들은 사무엘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사무엘의 카리스마에 주눅 든 겁니다. 사무엘은 일종의 마을 축제도 겸하는 제사를 드리러 왔다는 말을 하고, 그 동네에 사는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제사에 청했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들을 면접했습니다. 그들 중의 하나를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워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큰 아들은 엘리압입니다. 사무엘이 보기에 흡족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7절에서 다른 답을 주셨습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가 데리고 온 일곱 명의 아들을 다 보았지만 여호와께서 찍어주는 인물이 없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더 이상 아들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이새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막내가 하나 남았는데, 그는 이런 제사의식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기도 하고 준비가 안 됐다고 말입니다. 막내가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집안 일 중에서 가장 쉬운 양 지키기를 하는 중입니다. 사무엘은 다윗을 꼭 봐야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다윗이 왔습니다. 양을 지키다가 부름을 받고 급히 왔으니 복장도 시원치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사무엘의 눈에는 다윗이 빛나 보였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도 평범해 보이기도 하고, 아무런 꾸밈이 없어도 빛나 보이기도 합니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달라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사무엘의 관점이 아니라 여호와의 관점입니다. 사무엘은 다음과 같은 여호와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은 그 명령에 따라서 다윗의 머리에 왕을 상징하는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 장면은 왕 즉위식입니다. 문무백관과 국외 사절단이 모이지 않았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왕 즉위식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 연출된 겁니다. 이로써 사무엘은 자기의 역할을 다 끝냈습니다. 그는 라마로 돌아갔고, 그 뒤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주도권은 이제 다윗에게로 넘어갑니다. 상당한 세월에 걸쳐 다윗은 사울 왕과 각축을 벌입니다. 그 과정에 많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사울 왕과 그의 아들인 세자 요나단이 죽자, 다윗이 명실상부한 통일 왕국의 왕이 됩니다. 그는 다른 나라에 꿀릴 것 없을 정도로 국력을 키우면서 다윗 왕조의 토대를 탄탄하게 세웠습니다.
앞에서 저는 다윗의 인생살이가 그렇게 행복한 것만도 아니고, 그의 인물됨이 모범적인 것만도 아니었는데도 그가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과 초기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인물로 평가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답은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인 삼상 16:13절에 나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성서기자는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다.’고 진술했습니다. 특히 ‘이날 이후로’라는 부사구를 보십시오. 지금 한 순간이 아니라 평생을 계속해서 여호와의 영이 그와 함께 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전쟁 전문가로서, 정치 대가로서, 다윗 궁을 지은 위대한 건축가로서, 또는 그리스도의 조상으로서 다윗을 존경하거나 우리 인생의 롤 모델로 삼으려는 게 아닙니다. 그가 평생 여호와의 영에 감동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여호와의 영에 감동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오늘 본문을 다시 머릿속에 그려보십시오. 사무엘이 뿔병에 담긴 기름을 다윗에게 부었습니다. 뿔병은 소나 양의 뿔을 잘라서 만든 그릇입니다. 세례 때 목사가 세례 받을 사람의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만 본다면 기름을 붓는 의식을 통해서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어떤 종교적 세리모니를 통해서 각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이라는 세리모니를 통해서 두 사람이 더 깊은 사랑을 경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런 세리모니에 어떤 주술적인 능력이 있는 건 아닙니다. 양을 지키는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 사로잡혔다는 말은 그의 평생에 걸친 삶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입니다. 오늘 우리의 성령 경험도 이와 같습니다. 한 순간 마음이 뜨거워지는 게 아니라 삶의 전 과정을 통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게 중요합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영, 즉 성령의 인도를 평생 받을 수 있다면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게 가능할까요?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도 ‘성령이여, 임하소서.’라는 기도와 찬송을 많이 불렀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도 성령을 부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태도가 중요하기는 하나 이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성령이 누군지를 아는 일입니다. 모른 채 구하면 성령이 아니라 악령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소위 은사운동의 차원에서 성령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하고, 병도 고치고, 다른 사람의 미래를 점쟁이처럼 집어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방식은 성령을 주술이나 미신의 차원으로 떨어뜨리는 겁니다.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되었다는 말의 참된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뜻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판단, 그런 의지, 그런 열정이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말의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너무 밋밋하고 너무 쉬운가요? 아닙니다. 이것처럼 역동적인 삶이 없으며, 이것처럼 어려운 삶도 없습니다. 이건 그냥 되는 일이 아닙니다. 구도와 수행의 차원에서 삶을 생각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가지 않습니다. 교양과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나름 존경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 이상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거나 인격적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에 따라서 살고 싶지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나,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도 이해하십시오. 부부 사이가 너무 나빠서 함께 살기 힘든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이혼하는 게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참고 사는 게 하나님의 뜻인지 아무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 이런 비슷한 일은 우리 일상에 널려 있습니다. 교회를 정하는 것도 그렇고, 사람을 사귀는 것도 그렇고, 사업하는 것도 그렇고, 정치적인 판단도 그렇습니다. 북한을 윽박질러야 할지, 달래야 할지 판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다윗도 그런 곤란한 경우를 많이 당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정확한 뜻을 찾는다는 게 근본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도 아니고, 제삼자도 아니고, 성령만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판단에 모든 걸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 결정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 수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우리가 가야 할 방향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길을 인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서 천사들과 카드놀이를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개입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성서기자들은 빛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했습니다. 생명의 빛입니다. 생명, 즉 삶을 비추는 빛입니다. 하나님을 생명의 빛으로 경험한 사람은 인생살이에서 시행착오를 거쳐도, 그리고 아무리 심각한 어려움에 빠져도 절망하지 않고, 또 끝없이 방황하지 않고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죽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시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생명의 빛으로 경험했는지,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경험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의 제3독서인 요 9:1-12절에는 이 빛을 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다가 만난 한 시각장애인을 고치셨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놀래서 시각장애인이었던 그 사람에게 어떻게 눈이 떠졌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어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초자연적인 기적 이야기로만 읽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장애도 고침을 받고, 망해가던 사업도 다시 복구된다는 식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생명의 빛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시각장애인을 고치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9:5)고 말씀하셨고, 그에 앞서 요 8:12절에서도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서론 부분인 요 1:9절에서 이미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생명의 빛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빛이기에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의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이 여호와의 영, 즉 성령에 크게 감동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빛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냐, 어떤 증거가 있냐, 하고 묻고 싶으신가요? 저의 설교는 이 질문 이전까지에만 해당됩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하며 불필요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생명의 빛으로 경험한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남녀 사랑에서도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하는지 기웃기웃 찾으려는 것은 아직 사랑의 능력에 휩싸이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여러분에게 이렇게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보십시오. 그를 증언하는 신약성서 기자들의 말에 영혼의 귀를 더 기울여보십시오. 다윗에게 크게 감동되었던 여호와의 영이 여러분에게 임해서 시각장애를 겪다가 볼 수 있게 된 어떤 사람처럼 예수님을 생명의 빛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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