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연약한 마음 (마 13:11-1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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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악과 의심”
마 13:11-15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성경전서 새번역 13장
15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귀가 먹고 눈이 감기어 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귀로 듣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고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1995 Update (13:15)
FOR THE HEART OF THIS PEOPLE HAS BECOME DULL,
WITH THEIR EARS THEY SCARCELY HEAR,
AND THEY HAVE CLOSED THEIR EYES,
OTHERWISE THEY WOULD SEE WITH THEIR EYES,
HEAR WITH THEIR EARS,
AND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RETURN,
AND I WOULD HEAL THEM.’
Nestle-Aland Greek New Testament, 28th Edition (Chapter 13)
15 ἐπαχύνθη γὰρ ἡ καρδία τοῦ λαοῦ τούτου,*καὶ τοῖς ὠσὶν ⸆ βαρέως ἤκουσανκαὶ τοὺς ὀφθαλμοὺς αὐτῶν ἐκάμμυσαν,
μήποτε ἴδωσιν τοῖς ὀφθαλμοῖςκαὶ τοῖς ὠσὶν ἀκούσωσινκαὶ τῇ καρδίᾳ συνῶσινκαὶ ἐπιστρέψωσιν καὶ ἰάσομαι αὐτούς.
여기서 ‘완악’이란, (지속적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지 않으려는 의지적인 결단을 의미한다. 그 결과 그 마음이 둔하지고, 들을 수 없게 되고 눈으로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무엇인가를 깨닫는 과정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마음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멀어질때, 먼저 마음이 멀어지고, 그 사람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으며, 점차로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어 눈으로 볼 일이 없게 되는 것처럼)
그러므로, 이런 순서에 의해 완악해지면, 마음이 둔하여져서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게 된다. 이런 현상을 씨뿌리는 비유에서 설명하고 있다.
뒤 이은 씨뿌리는 비유에 의해, 마음이 완악한 자는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한다. 그보다 나은 사람은 말씀을 받되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좀 더 발전한다면 뿌리는 내리지만, 세상 염려와 유혹으로 열매 맺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완악한 마음으로는 결실하여 열매맺지 못한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기다려주지만 몇 해가 지나도 결실하지 못하면 찍어버리라는 말씀도 있다. 이는 그냥 내버려진 포도 나무가 아니라, 포도원 안에서 농부의 가지치기와 정성어린 돌봄에도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의 예처럼 하나님의 악한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 완악해진 사람도 있겠고, 포도원 안에 있으며 주인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열매맺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을 거부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있음과 이제껏 나를 인내로 기다려주시고 나의 지난 삶을 통해 열매 맺도록 이끌어가신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나의 고집과 애착을 포기하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길 소망한다.
완악이 하나님의 의도하셨던 나의 무너지지 않은 견고한 진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민감해진다면 주님의 사랑은 한 없고 오래동안 기다리시며 한없는 애정으로 나를 대하시는 따뜻함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완악할 수 없다.
그 사랑에 녹아진다. 주님의 사랑에 압도되어 내 안의 불순물들, 주님의 복음과 사랑이 미치지 않은, 깊숙히 파묻힌 어둠과 죄의 잔재들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아간다. 나의 오래되고 묵혀진 감정들, 표현되지 않아 변질되고 염증을 일으켜 그 독성으로 내 인격을 파괴하고 거짓 자아로 살아가게 하는 것들을 이제는 직면하고자 한다. 그것이 나였음을 주님께 고백한다. 그래서, 더욱 주님이 필요하다고, 도와달라고 말씀드린다. 예전에는 나를 도와줄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마음 속 깊이 담아 두었던 얘기들을 이제는 주님께 할 수 있다.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1995 Update (Chapter 14)
31 Immediately Jesus stretched out His hand and took hold of him, and *said to him, “You of little faith, why did you doubt?”
31 εὐθέως δὲ ὁ Ἰησοῦς ἐκτείνας τὴν χεῖρα ἐπελάβετο αὐτοῦ καὶ λέγει αὐτῷ· ὀλιγόπιστε,* εἰς τί ἐδίστασας;
여기서 의심이란,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바람을 바라보는 것을 뜻하나?
바람과 그에 따른 풍랑이 분명히 눈 앞에 펼쳐져있지만, 그것만큼 명백하게 주님이 눈 앞에 계시는 상황에서, 나는 주님보다 커 보이는 상황과 문제 가운데서 주님을 향한 초점을 잃고 나를 집어 삼켜 바다 깊은 곳으로 끌고 갈것만 같은 집채만한 파도에 압도된다.
Q. 나는 어떤 의심을 한 것일까?
Q. 그리고 그 의심의 뿌리는 무엇일까?
틴데일 신약주석 마태복음 (4)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14:22–33))
〈28–31〉 마태는 다른 곳에서도 베드로를 제자들의 대표로 혹은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제자의 전형으로 소개하는데, 이 이야기에서도 그와 같은 목적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믿음에 대한 좋은 본보기이다. 동시에 이 이야기는 베드로의 충동적이며 약한 성격을 보여주면서, 꾸며 낸 설화가 아니라, 그의 실제 경험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해석가마다 베드로의 요청이 모범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지에 대해 의견을 달리한다. 만약 모범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이는 제자들이 주님의 능력을 받아(28, 29절에 나와 있는 대로,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없이 행동을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주목하라), 그의 부르심에 순종하면서, 불가능한 것을 행하며, 소망하도록 가르친다. 이것은 믿음에 달려있다.
베드로의 믿음의 감소(‘작은 믿음’은 올리고피스토스[oligopistos]인데, 마태가 다른 곳에 자주 쓰는 단어이다. 참조, 6:30; 8:26; 16:8; 17:20. 이는 불충분한 믿음이라기보다 불신을 의미한다)는 예수님의 능력보다 물질적인 것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데 있다. ‘의심하다’는 문자적으로 ‘둘로 나눠지다’는 뜻인데, 진정한 믿음은 마음을 하나로 모아 예수님에게 집중하는 것을 뜻한다.다른 이들은 베드로가 여기서 적어도 일시적으로 무모하고 유치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잘못된 제자도의 예로 나와 있다. 예수님을 닮고자하는 그의 바램은 주제넘게 여겨진다(참조, 4:5–7;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에 대한 설명). 예수님이 베드로의 요청을 허락한 것은 그의 실수를 통해 그를 가르치려고 하신 것 같다.87 그러나 31절은 베드로의 잘못이 그의 잘못된 요청에 있다기보다, 그의 확신의 부족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역경을 헤어나지 못한 참 믿음의 예로 읽혀지는 것이 낫다.
참고: “정서적으로 건강한 영성 (195p)” by 피터 스카지로 (두라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