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를 보는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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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책 한권의 제목을 듣게 되었습니다. ‘니고데모의 안경’이라는 책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기에 안경을 쓰시는 분이 계실까요? 보통 안경을 쓰다 보면 도수를 맞추러 안과에 가게 됩니다. 안과에 가면 의사 선생님께서 여러 안경 알들을 안경태에 넣어주시면서 잘 보이는지를 물어봅니다. 그리고 그 안경을 맞추고 나면 우리의 눈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신세계가 펼쳐지게 됩니다.
안경과 함께하는 삶은 처음에는 굉장히 불편했습니다만,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 안경부터 찾습니다. 안경이 없으면 똑바로 볼 수도 없고 어딘가로 갈 수도 없게 됩니다. 이 안경을 쓰기까지의 과정이 오늘의 본문과 참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경설명

본격적으로 이에 대해서 설명하기 전에 늘 그렇듯 함께 나눌 말씀의 배경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에 있었을까?
장소는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인데 왜 장소는 예루살렘일까요? 유월절이라는 명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 명절마다 성전에 올라가 예배를 드렸는데, 그 성전이 있는 곳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전에 올라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새언약의 선포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는 장사꾼들로 가득해진 성전의 시장을 엎으시고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세우실 것을 선포하십니다.
유월절의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직접 유월절의 어린 양이 되셔서 새로운 출애굽을 보여주실 것과 예수님께서 곧 성전이심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이외에 기적과 표적들을 일으키셨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으며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반응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믿음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을 보고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믿음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닌 행하신 표적을 보고 믿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니고데모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늘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를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1. 바리새인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누구입니까? 성경에서 항상 예수님께 비판받고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꾸중만 들어서 별 것 아닌 유대인 무리들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들은 조국 이스라엘의 독립을 꿈꾸는 사람들이었으며 동시에 거룩을 추구하며 율법에 충성된 자들이었습니다. 부활을 믿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들이기도 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성경을 외우고 율법을 외워서 그것을 가르치는 율법교사들이었고 유대교에서 명망높고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 유대지도자
또 그는 유대 지도자였습니다. 이때 당시 지도자는 산헤드린 공회원을 의미하는데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들의 입법/사법/행정을 담당하는 가장 높은 고위기관이었습니다.
3. 명망 높은 가문 / 이름의 뜻
또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는 니고데모의 가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는 명문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백성의 정복자.
4. 부자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사당시 몰약과 침향을 가져옵니다.
즉, 니고데모는 지성, 명예, 부를 골고루 갖춘 엘리트 중에 엘리트였던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을 대표한다고 보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니고데모, 예수를 찾아가다.

이제 유대인의 대표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밤’이라는 단어의 해석 - 유대 문화
밤이라는 단어에는 많은 해석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니고데모가 진리에 목마른 사람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진리를 발견했으나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혹은 눈치가 보여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물론 설득력이 있는 해석입니다만, 우리는 그보다 좀 더 현실적으로 그리고 유대인스럽게 생각을 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로 그는 매우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업무 시간이 끝나고서야 예수님을 찾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시간은 밤이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유대인들의 습관입니다. 유대인들은 일과를 마친 후에 율법을 정리한 책인 토라에 대해서 토론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간 이유는 예수님과 말씀을 가지고 토론하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인물은 부족함이 전혀 없는 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눈을 피해서 밤에 다니는 인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밤’이라는 단어의 해석 - 문예적 해석
또 다른 해석은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의 문예적인 해석입니다. 밤은 어둡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때문에 보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합니다. 어둠은 니고데모와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를 말해줍니다. 유대인들은 빛이 어둠에 비추이는데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비유로는 최후의 만찬에 떡 조각을 받고 예수님을 팔러 나가는 유다의 영적 어두움을 묘사할 때에 ‘밤'이라는 시간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요13:30)
니고데모의 태도 해석과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찾아와서 과하리만큼 예수님을 높입니다. 30여세밖에 되지 않은 청년 그것도 뒷배경이 목수인 예수님께 무려 ‘랍비'라는 칭호와 ‘하나님께서 보낸 선생'이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랍비는 보통 나이가 지긋하고 명망이 높은 선생님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는 인사치레였을 확률이 높습니다. 상대방을 세워준 뒤에 논쟁하면서 한 판 붙어보자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여느 유대인들과 같이 ‘표적'을 보고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진리를 구하고 인생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율법에 관련하여 논쟁하고 또 토론하기 위해서 예수님과의 독대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이유 - 비본질을 보기에
교회에 찾아오게 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진리를 찾기보다는 교회의 활동, 사역, 인간관계 등을 계기로 찾아오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동기가 나쁜 것은 아님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본질이 아닌 부수적인 것들만을 보고 교회에 오게 된다면 그 믿음은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쉽게 흔들리게 됩니다.
또 교회에 논쟁하거나 논리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그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마음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둘로 나뉘는 듯 합니다. 말씀 앞에 무릎을 꿇거나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며 떠나거나.
니고데모와 우리가 교회에서 배울 것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배울 것이 있었겠습니까? 돈, 명예, 종교적 지위, 율법에 대한 가르침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에게는 이미 충분한 지식과 명예 그리고 부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저 예수라는 청년이 궁금했고 그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배우기 위해 말씀 앞으로 나아오셨습니까? 돈이나 명예 혹은 삶을 사는 지혜 등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동냥하는 거지를 향하여 ‘내게 은과 금은 없다’고 말했듯, 하나님의 말씀은 돈을 버는 방법이나 삶을 더 윤택하고 멋지게 사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견문이나 학식을 넓히고 싶거나 따듯한 감동을 얻기 위해서는 차라리 토크 콘서트나 각종 학회 세미나, 인문학 강의를 듣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한참 어리고 또 부족한 제가 여러분에게 어떤 선한 것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통해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와 니고데모수님

예수님의 대답 - 거듭나야 하리라
아주 귀한 손님이 찾아왔을 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통 차라도 한 잔 대접할 법 합니다. 그리고 칭찬에 대해 아유 과찬이십니다. 명망 높으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며 너스레를 떨 법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태도는 싸늘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이미 니고데모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고 그에게 필요한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특히 예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계신 분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인격적인 예수님 죠아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니고데모에게 대화의 주제를 꺼내신 것입니다. 이 주제가 오늘 우리가 살펴볼 주제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보지 못하리라 -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다.
니고데모를 비롯한 유대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명망높고 존경받는 바리새인이야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 통념을 뒤집어 엎으십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이에 대해서 ‘제가 나이가 좀 있는데 다시 태어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합니다. 니고데모가 진지하게 이 대답을 한 것인지 혹은 위트있게 받아 친 것인지는 몰라도 이 대답은 예수님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한 대답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씀은 한 치의 거짓이 없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고 메시아를 간절히 소망하던 집단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바리새인이지만 그는 눈 앞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두고서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이 보이십니까? 거듭나지 않으면 볼 수가 없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눈높이가 달랐습니다. 그는 거듭남을 ‘다시 태어남’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남’의 의미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왜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거듭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 -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니고데모의 시선이 다른 답변에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제 생각에 이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인격적이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은 니고데모에게 안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적인 초점맞춤식 교육은 여기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납니다.
첫 번째 시력교정(겔36:25-27)
예수님의 말씀은 겔 36:25-27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학자였던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듣고 대번에 이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즉,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물과 성령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고 굳은 마음을 제거하여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의무감이나 종교심에 지키는 율법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나님의 규례를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정리하면, 거듭나야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있고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하면, 거듭나지 않으면 똑바로 보지 못하고 못 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두번째 시력교장(육과 영의 원리)
예수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원리로 이를 잘 설명해주시고 계십니다. 육은 땅의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예로는 표적을 보고 믿는 유대인들의 아주 얕은 믿음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닌 표적을 보았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표적이 보이지 않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지속적으로 눈높이를 맞춰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 놀랍게 여길만한, 말도 안 되는 말이 아니라 당연한 말임을 설명해 주십니다. 네가 지금 초점이 맞지 않았었다고, 육으로 난 것들을 추구하고 있었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육이 아닌 영(시력교정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며 수많은 표적들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역사하시고 기독교는 그것을 체험하는 체험의 종교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그 일들을 행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우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우리는 영적인 시야를 키워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시선에 우리의 시선을 맞추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더욱 은혜가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격적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안과에 갔을 때 초점을 계속해서 맞추는 일을 하는 것처럼, 택함받은 백성들에게 지속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세 번째 시력교정(구원, 거듭남의 주권)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거듭남,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요 2:9 에서 연회장은 포도주가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것을 바꾸신 분이 예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물 떠온 하인들은 안다고 했지만, 그 물 떠온 하인들조차도 그 과정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구원이 그런 것과 같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그것을 알지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구원이 우리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사람들이며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하지만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구원의 방법을 안다면,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신비를 안다면, 구원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역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이 우리에게 은혜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주권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신비에 있다.
니고데모를 비롯한 유대 종교인들은 거듭남의 영역, 구원의 영역이 할례로부터 혹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세상은 이를 부, 명예, 사랑, 시간 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그것은 초점이 나가서 잘못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거듭남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도덕시간에 성선설과 성악설 그리고 성무선악설에 대해서 배웁니다. 사람은 태어날때부터 어떠하다는 것에 대한 관점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타락 이후 사람의 본성이 선한 것 그러니까 하나님을 추구할 수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가긴 했지만 결국 니고데모의 마음을 열고 움직이신 분은 예수님이시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신 여러분들에게도 인격적으로 맞춤 안경을 제작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살 수 있도록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안경을 맞추어주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듭남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물과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세상의 가치관과 죄로 인한 더러운 마음을 씻어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또 굳은 마음을 풀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삶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초점은 이 땅이 아닌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그 나라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초점을 맞추어주는 안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이십니다. 그런데 앞서 다루었다시피 우리 힘으로 그 안경을 쓸 수가 없으니 안경이신 예수님께서 어두운 밤에 다니는 우리를 위해서 직접 오셔서 안경을 씌워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나라이십니다.
안경을 맞추어주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 우리의 안경을 어떻게 맞추어 주셨습니까? 우리를 위해 오셨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예수를 바라볼 때에, 그 사실을 믿을 때에 우리는 비로서 거듭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십자가를 의미한다. 아직 되어지지 않은 십자가 사건을 미리 예언하심으로서 초점을 맞추어주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놋뱀을 본 자들마다 살아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자마다, 누구든지, 죄인이든 창기든, 세리든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1:12)
우리가 바로 그 하나님께로부터 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안경을 처음 쓰면 불편하고 어지럽다. - 가치관의 혼동
ㄹ하지만 처음 안경을 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어떻습니까? 어지럽습니다. 예수라는 안경을 쓴 니고데모와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게 됩니까? 쉴 틈없이 휘몰아치는 유혹 속에서 우리의 시선은 어지럽게 흔들립니다. 결국 너무 어지러워서 안경을 벗고 육을 향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의 매일은 니고데모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불편한 시간을 조금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어지럽지 않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 뿌옇게 보이고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행복이 시작됩니다. 예수라는 안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표적이 아닌 예수님께 맞출 때입니다. 땅이 아닌 하늘에 맞출 때입니다. 어지럽고 힘들어도 그 시선을 예수께 맞추고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고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그 나라를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안경과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안경을 쓰고 있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우리에게 주권이 있는 일이 아니기에 끊임없이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 예수님의 안경을 쓰고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말씀을 붙잡고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의 주권, 우리의 시선을 내려놓고 예수라는 안경을 쓰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님의 시선과 마음을 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우리가 정결케 되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 우리는 비로소 눈을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또 그곳에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거듭남의 참 의미와 은혜를 살아가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흔들리고 넘어집니다. 가치관의 혼동 속에서 또 불편함 속에서 어지럼증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십시오. 니고데모는 끝내 예수 그리스도의 안경을 쓰고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일들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그것을 체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거듭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안경을 쓰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모든 동서울 광염교회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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