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05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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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216 성자의 귀한 몸
본문 롬14:1-8
하나님, 날마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크고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이 사랑을 기억하며 나의 영광과 나의 자랑을 위한 삶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옵시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가득 채워져서 그 사랑이 형제들을 향한 사랑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혼란이 가중되는 시대이다. 옛적 사회는 비교적 권위가 있어 문화와 가치관의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이래선 안 된다’ 혹은 ‘이래야 한다’는 생각들을 서로 공유했다. 그러나 오늘 날의 양상은 전혀 다르다. 다양성이 존중되어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딱히 정답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 게다가 개인의 권리나 개성이 중시된다. 결과적으로 현대인들은 규정하고 어떤 틀에 가두는 걸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중에 한 가지는 교회의 답답함이다. 뭔가 굴레를 씌우고 강제 하는 게 싫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특히 그렇다. 유교주의적인 사상과 맞물려서 율법주의적인 경향이 강하다. 이것 하지마라 저것 하지 마라 규범은 많은데,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잘 가르치지 않는다. 그냥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따르라는 경우가 많다. 우린 관습이 이러했으니,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래왔으니 그냥 따르라는 경우였다. 로마교회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유대인들이 헬라인들을 자신들만의 틀에 끼워 맞추려 했고 비난하고 정죄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음식문제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우상에 바쳐진 제물을 먹지 않았는데, 헬라인들은 하층민들이 대부분이라 신전에 바쳐졌다가 시장으로 나온 저렴한 고기를 사서 먹어야 했다. 이 문제는 고린도 교회에도 똑같이 중요한 이슈가 된 바 있다. 그런데 로마 교회는 유대인과 헬라인들 사이의 갈등이 이 문제를 더욱 부각시켰다. 유대인들은 헬라인들이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다 하여 율법에 빗대어 그들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은근히 자기를 자랑하였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 상황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자 하는가?
우선 음식은 그냥 먹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음식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비난하였다. 유대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부정한 것을 취하지 않도록 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먹는 음식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며, 너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너희 입에서 나오는 것이 오히려 더럽다고 하셨다. 악한 생각과 살인과 음란이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입 밖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바울의 관점도 그러하다.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음식은 음식일 뿐이다. 따라서 비록 신전에 바쳐진 고기라고 할지라도 믿음이 강한 자들은 그것을 먹어도 괜찮다. 왜냐하면 고기는 고기일 뿐이고 감사히 받으면 버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진리가 아닌 문제여서 교회가 수용이 가능한 문제들을 신학용어로 ‘아디아포라’라고 한다. 이러한 아디아포라는 상황과 결과에 따라 적용이 달라진다. 아디아포라는 그것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것이 가지고 올 결과나 그것이 적용되는 상황에 따라 문제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14절에서 자기가 속되게 여기면 그것이 속되다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진리의 문제가 아닌 이상에는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우상의 제물이라도 그 제사에 함께 참여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음식을 먹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바울은 고전10장에서 그리스도의 성찬을 먹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것처럼 우상의 제사에 참여하면 귀신과 연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신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한 가지 다른 문제를 살펴보자.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절기를 지켰다. 사실 어떤 날을 기념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버이주일이 문제가 되나? 아니다. 그러나 그 날을 자신의 공로로 삼거나 어떤 실제적인 효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아디아포라에 대처하는 바울의 요구는 무엇인가? 원론적으로는 서로 관용하고 존중하라고 말씀한다. 진리 외의 것들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 바울의 신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관용은 실로 크고 위대하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향해서도 저들을 용서 해달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나를 반대하는 자가 아니면 우리를 위하는 자라시며 폭넓은 관용을 보이셨다. 그런데 진리의 문제가 아니고 충분히 수용이 가능한데도, 자기들의 기준 때문에 다투거나 교회의 건덕을 헤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위배하는 일이다. 바울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용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한다.
첫째로, 판단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음식을 안 먹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 자는 판단하지 말라고 하고, 음식을 자유롭게 먹는 자는 깔보지 말라고 한다.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은 판단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시킨다.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이다. 공적으로 범죄사실이 없으면, 그를 판단하실 이는 하나님이시다. 반대로 깔보는 자에게는 사랑을 말한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희생한다. 절제하고 인내한다. 결론적으로 죄가 아니라면 아디아포라 문제를 가지고 서로 비난하는 거나 깔보지 말라는 것이 바울의 명령이다. 오히려 바울은 서로 존중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배려하라고 말씀한다.
바울이 서로 관용하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바울의 말의 핵심은 무엇인가? “뭣이 중요하냐”는 거다. 고작 음식 때문에 그리스도가 피로 사신 형제를 정죄하고 시험에 빠지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는데, 그를 사랑하지는 못할망정 그를 비난하고 깔보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데 있지 않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희락과 평강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의를 행하고 서로 기뻐하며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그런데 음식 때문에, 먹는 것이라는 그 지극히도 사소한 문제 때문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무너진다. 먹는 것이야 무엇을 먹든지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잘 먹는다고 더 잘사는 것도 아니고 못 먹는다고 더 못사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 스스로도 마찬가지이다. 이걸. 먹으면 되냐? 안되냐? 몰래 먹으면서 스스로 죄책감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있다. 그런 정죄의식과 가책은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를 빼앗는다.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귀할진대, 그것이 내게서 그리스도를 빼앗아간다면 우리가 버리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두번째 교훈은 예수를 믿는 자라면 그리스도를 위해 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 출석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지만, 한 가지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피로 사셨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유 하였기 때문에 심지어 음부의 권세도 우리를 속박할 수 없다.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께 메였다. 뭔가 구속받기 싫어하는 세상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메여야 할 유일한 대상이 있다. 계속해서 이 세상은 너의 길을 가라고 말한다. 자유롭게 살라한다. 하고싶은대로 하며 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더욱 그리스도께 메이길 원하고 그 분 안에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바울은 7-8절에서 우리가 죽어도 주를 위해 죽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산다고 고백하지 않던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될 수 없다. 예수를 위해 살지 않는 자들은 결국 주님 앞에 서지 못한다. 따라서 여러분,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려야 한다. 예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예수를 위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시기 때문이다.
특별히 바울은 음식에서 자유한다는 헬라인들에게 이 말씀을 강조한다. 자유할 수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음식은 별 것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드는 믿음이 약한 자들이 있다면, 그거 안 먹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가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마땅한 권리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바울은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내가 일평생 고기 안 먹고 살수도 있다고 했다. 바울은 고전10:31 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한다. 내가 옳다고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도 무조건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셨다. 우리에게는 최상의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서로 관용하고 서로 배려하고 서로 절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란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의 주요한 생활 원리는 무엇인가? 확신할 수 있는 일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결론이다. 바울은 각기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고 한다. 밝은 빛 가운데 걸어가야 한다.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거나 모호함과 무지함 뒤에 숨어서 회색의 삶을 살아가지 말라. 우리의 신앙생활은 “에라 모르겠다”가 아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이 분명히 가리키는 그 곳을 걸어가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믿음 안에서 행해야 한다.
세상은 혼란스럽다. 교회도 마치 사사시대처럼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 가치관이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지표가 없이 그냥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혹은 본능에 이끌리는 대로 살다보면 분명 혼돈과 무질서함 속으로 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23절에서 믿음으로 하지 않은 것은 죄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대로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믿음을 따라 살기를 힘써야 한다. 진리는 미묘하지 않고 명확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란다.
말씀을 맺는다.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가?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다. 진리가 아닌 영역에 대하여 내 생각과 내 판단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없는 혐의를 덧씌우지 말자. 하나님이 판단하신다. 또한 전통이나 자기 생각에 메여있는 연약한 자들을 쉽게 무시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받아주심 같이 우리도 누군가를 받아주고 용납하며 사랑하자. 마지막으로 자기 판단에 갇히지도 말고 좀 안다고 교만하지도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하시는 그 길을 담대히 걸어가는 이 자리의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양문교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도하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가장 귀한 우리 주님,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셨던 것처럼 연약한 지체들을 받아주고 용납하며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운데 명확하게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따라 담대히 신앙생활하는 우리 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