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이룬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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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views1. 담은 무엇인가 2. 초대교회를 이루는 사람들 3. 초대교회의 문제 4. 교회는 어떤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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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나눌 말씀에 ‘담. 벽’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14절에 나옵니다.
‘담’ ‘벽’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저는 ‘담’, ‘벽’이라고 하면 제가 어렸을 때 동네에서 자주 봤던 벽이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CCTV도 많고 집을 보호할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주 봤던 벽은 그렇게 높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위에 깨진 유리병 조각들을 일렬로 붙여놓기도 했고, 벽 끝에 봉을 세우고 그 중간에 철사를 꼬아 길게 이어 놓았던 담이 많았습니다.
왜 깨진 유리병 조각을 붙이고, 철사로 막아 놨던 것일까요? 이것들은, 눈치채신 것처럼 도둑들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일차적 방어선의 역할을 합니다. 도둑이 아니더라도 일반인들이 지나가며 그것을 보면 뾰족한 유리조각과 철사들을 보고 위압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담’, ‘벽’이라는 것은 사람을 차단하는데 사용됩니다. 나의 영역으로 누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하며 동시에 나를 보호하기도 합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담 안에서만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나와 친한 사람들과만 지내기 위해 높은 담을 쌓고 그 안에서 우리끼리만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시야가 좁아지게 될 것이고,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안에 있는 것이 최고라는 착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담 밖에 있는 누군가와도 교류하지 않게 되고, 내가 해왔던 것이 아닌 일이 벌어지거나 혹은 익숙하지 않은 상황을 만나게 되면 거부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담’ ‘벽’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세워지고, 그 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예배하고 그리스도를 따를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거든요. 그것은 바로 노예와 주인의 관계 설정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주종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주인은 종을 사랑하고 배려해주고, 종은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그런 이상적인 관계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주인들은 노예들을 ‘열등한 존재’ ‘짐승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격적인 대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인간이지만 열등하고, 대화는 통하니 짐승보다는 좀 더 나은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주인들이 이렇게 행동합니다. 그럼 그 대우를 받는 종들은 어떻게 주인들을 대했을까요? 앞에서는 말을 잘 듣고 따랐겠지만 그 마음 속에는 엄청난 분노들이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주인을 향한 경멸과 분노가 가득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초대교회는 크게 세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 중 그룹은 다른 그룹을 짐승보다 더 나은 존재로 대했던 사람이었고, 한 그룹은 그들을 향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 분위기가 어떠했을까요? 예배를 드릴 때는 서로를 축복하고 또 기도했겠죠. 감히 겸상을 할 수 없는 신분의 차이인데, 같은 자리에 앉아 말씀을 들었겠죠.
그 자리가 그들에게 편했을까요? 저는 불편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평등하고 동등한 존재이죠.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지금 초대교회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는 서로를 축복합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가면 다시 현실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 열등하고 무시 당하는 사람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서로를 영적으로 동등한 존재로 대하라! 라고 말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들이다 라고 이야기를 해도 그들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씀과 자신들의 삶이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맞고 좋은 말을 앞에서 한다해도, 그것이 내 상황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냥 좋은 말로만 남게 되거든요.
인도에는 카스트 제도가 있습니다.
제사장 계급의 브라만. 왕족,귀족 계급은 크샤트리아, 상인 계급 바이샤, 평민 수드라. 그리고 그 계급제도에도 끼지 못하는 불가촉천민. 이 카스트제도는 법적으로 폐지 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설교를 준비하며 찾아보니 인도사회의 근간이기에 폐지되지는 않았고 낮은 계급을 보호하는 법들이 많이 생겼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 다양한 계급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제사장, 왕족, 상인 계급이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일단 외국인이기에 이 제도에 끼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였습니다. 한참 여기저기껴서 무리들과 지내던 중 한가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계급끼리더 친하게 지낸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모습들은 코두가 잘 지내는 것 같고, 또 함께 어울려 다니는 것 같지만 밥을 먹을 때나 어떤 팀 과제를 수행할 때는 같은 계급끼리 모여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계급을 완전 나눠서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비율이 좀 더 높았습니다.
이런 계급의 차이를 확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숙사 경비 아저씨가 있었는데, 저는 그 분을 보면 항상 목례를 하며 인사를 했고, 간식을 사서 들고 올 때 그 분 것도 챙겨 드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20대 초반의 한 학생이 60대의 경비 아저씨를 세워놓고 소리를 막 지르면서 청소를 시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고 봤더니 기숙사 문 앞이 더러웠던 것이죠. 아저씨는 평민 계급이었고, 이 학생은 최상위 계급이었습니다. 이 학생은 당연히 그 아저씨를 부려 먹었습니다. 자신보다 못한 존재. 계급이 낮은 열등한 존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다가가서 왜 이렇게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 친구의 대답을 들으며 제가 내린 결론은 “이 친구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모른다.”였습니다. 그 친구에게 계급은 당연한 것이고, 낮은 계급의 사람을 부리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저씨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드리고 있었구요.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보았을 때 이해가 되지 않는 이러한 모습들이 초대교회 안에 있었던 것이죠.
초대교회는 크게 세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했죠. 한 그룹은 다른 그룹을 짐승보다 더 나은 존재로 대했던 주인들, 한 그룹은 그들을 향해 분노를 갖고 있던 노예들이었습니다. 마지막 한 그룹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왔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유대인들과 달리,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이 한 그룹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담’은 주인과 종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향한 분노를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방인들을 향해 높은 담을 쌓았습니다. 주인과 종은 서로를 향해 좋지 않은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대할 때는 마음이 합해지곤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절대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죠. 유대인 신자들은 복을 주신 하나님의 인자와 그 용서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분노와 증오를 드러냅니다. “어떻게 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 올 수 있지” “어떻게 저주 받은 이방인이 나와 함께 있을 수 있지!”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형식상으로라도 사랑을 나누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꾸 담을 쌓아 올리면서 그들을 밀어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고립시킵니다. 이방인들을 향해 할례를 받지 않았기에 구원 받을 수 없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복을 이방인들은 받을 권한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생각에 빠져 그들을 또 무시합니다.
이방인들을 향한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을 바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12절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유대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 즉 버림 받은 자”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 즉 할례를 받지 않았음” “세상에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다. 즉 사는데로 살아가던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죠.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평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라고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향해 “할례”를 받아야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그에게 약속하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쉬고)
진짜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까요? 할례가 복의 기준이 될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은 성경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유대인들의 말에 흔들렸고 할례를 받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갖고 있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숨겼던 진실을 지금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 구원받았습니다. 할례는 그저 육체적인 구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믿었기에 그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가 할례를 받았기에 의롭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교묘하게 진실을 숨기고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을 것을 강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구원과 의는, 할례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방인들은 원래 그리스도 밖,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즉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신을 의지하는 것 외에, 계속해서 자극적인 선택들을 하며 이방신을 섬기던 사람들입니다. 응답하지 않는 신을 향해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다 여겨 자녀들까지 바치는 비극적인 삶을 살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그 분이 주는 복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모세처럼 따로 약속을 한 적도 없습니다. 삶에 대한 이유와 목적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사는데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겐 그리스도가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제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고 복을 받는 자리에 나아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에 모아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아주신 그 교회에, 또 그리스도로 인해 새로운 삶들을 갖게 된 이들이 교회에 모였는데, 담을 세우고 서로를 비방하고 밀어내기에 급급해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14절 이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
이 것은 단순히 서로를 향해 대립하던 그룹들의 벽이 무너졌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겐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 성전을 잘 보면 이방인의 뜰과 나머지 구역을 분리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성소와 그 주변을 두른 담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들어가다 잡히면 죽습니다. 이방인들은 절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죠.
예수님이 허무신 것이 바로 이 담입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간의 경계를 세우고 서로를 향해 적대감을 갖게 했던 이 벽을 허무셨습니다.
벽이 무너지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분하고 밀어내던 그 장소가 이제는 유대인이 이방인을 전도하고,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는 유대인들에게 다가가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벽이 있었을 때는 사소한 것에도 마음이 상했고, 괜히 서로를 미워했었는데 서로를 마주하게 되자 이제 새로운 관계들을 맺게 된 것이죠.
이 새로운 관계는 하나님께 함께 나아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전까지는 서로를 향한 적대심과 분노 그리고 무시하고 인정하지 못함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제 우리 모두는 공통적으로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그분이 보내주신 한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분은 서로의 교제를 막고 있던 담을 허무셨다.
이제 우리는 한 가족이 되었다. 그러니 서로를 향한 반목과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라는 한 아버지 아래 우리는 자녀들이며, 가족이다. 하나님 앞에서 차별 없이 동등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이야기 합니다.
성전 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입니다. 20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이라고 표현합니다. 모퉁잇돌은 전체 건물의 지지대입니다. 가구나 벽이나 건물이나 구조물의 모든 부분을 꼼꼼하게 연결하는 돌이 모퉁잇돌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재단해야 한다고 합니다. 결함이 있거나 뒤틀리면 건물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우리의 모퉁잇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완벽한 모퉁잇돌입니다. 무너질 수 없는 돌입니다. 부서지지 않은 완벽한 모퉁잇돌이 바로 우리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자신들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진짜 신뢰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말을 듣고도, 예수님이 허무신 벽을 다시 쌓아올려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에베소 교회는 더이상 교회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겉모습만 교회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곧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의 신앙의 연수, 사역의 연차 등이 나도 모르는 나의 고집과 벽을 쌓고 상대를 바라보게 만들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을 통해 나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사람이기에 자칫하면 벽을 높게 쌓아올리고 그 안에 들어가 나의 생각과 믿음이 옳다고 여기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를 돌아보며 서로에게 도전을 주고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21-22절의 말씀처럼 계속 더해짐을 통해 함께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어갈 수 있게 되거든요.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가 참 특별하다 생각합니다.
혼자 달려가는 것이 아닌 주위를 돌아보고 함께 걸어가려 노력하는 모습을 모두가 보이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 말씀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정말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고 섬겨주는 공동체 그래서 겉과 속이 같은 진짜 교회로 날마다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되시는 인천제2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