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게 좋다'는 타협에서 벗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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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가문의 벧엘 정복 이야기, 벧엘 성에서 나오던 한 사람과의 모종의 거래, 그것으로 인한 정복과 벧엘의 옛 이름 루스 성의 재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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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게 좋다’는 타협에서 벗어나라
(사사기 1장 22-26절)
■ 광고
장례 등의 광고가 올라오면 헌금소개 전 광고를 한다. 장례 광고는 2번 읽음
■ 헌금소개
귀한 예물 드린 손길 있습니다. 십일조, 건축, 장학, 선교, 일천번제 예물, (기도제목 읽고) ㅇㅇㅇ성도님 드렸습니다.
■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정성을 다하여, (예물과) 예배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들이 되길 원합니다. 온전히 받아 주옵소서. 이 시간에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실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들을 수 있는 마음 또한 허락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말씀봉독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사기 1장 22-26절 말씀입니다. 구약 361페이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 인사 및 설교
할렐루야! 2교구와 월드휴먼브리지, 그리고 사회선교부를 담당하는 이영석 목사입니다. 오늘 이 새벽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신앙과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을 두고, 너무 관용이 없다, 타협점이 없고, 편협하다는 이야기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면서 적절하게 타협하고 세상과 융화하며 살아가는 타종교의 스타일을 들먹이면서 그것이 더 좋아보인다고 조롱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믿는 신앙,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은 결코 적당히 타협하거나 세상과 융화되면서는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지난 주일날 그 똥된장의 비유를 다 기억하실 겁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섞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닌 것이죠.
저는 오늘 본문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22절은 요셉 가문이 벧엘을 치러 가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요셉 가문이란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손들을 이야기하는 것인데요. 여기서도 어제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유다와 함께 하셨다고 했던 것처럼 동일한 표현을 하면서,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냥 표면적으로 보면요. 요셉가문이 세운 작전 덕에 벧엘이 잘 공략된 것처럼 보입니다. 먼저 벧엘을 공략하기 위해서 정탐을 하러 갔다고 하죠.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그 성읍의 예전 이름은 루스였다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마치 영화에서 복선이 깔리는 것처럼 지금 어떤 단서가 뿌려지고 있습니다. 잘 기억해두시면 잠시 후에 그 의미가 들어나게 됩니다.
아무튼, 옛 이름이 루스였던 벧엘을 정탐하러 갑니다. 그런데 그때 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죠. 그리고는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됩니다.
이 벧엘 성읍의 입구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주면, ‘우리가 너를 선대하겠다’고 합니다. ‘헤세드’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려주면, ‘은혜를, 자비를 베풀어주겠다’라고 일종의 거래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아주 성공적이었죠. 우리 25절과 26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 곳의 이름이 되니라
결과는 성공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서로 원하는 것을 얻었죠. 요셉 가문은 원하던대로 벧엘을 쳐서 가졌고, 그들에게 정보를 주었던 그 ‘한 사람’은 가족들과 함께 ‘헤세드’ ‘자비’를 얻어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야 앞에 깔려 있었던 복선이 발동이 됩니다. 이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서 살기는 하는데, 헷 사람들의 땅으로 가서 마을을 세우고, 그곳의 이름을 다름 아니라, 벧엘의 옛 이름인 ‘루스’라고 지었다는 것이죠.
재밌지 않습니까? 벧엘에서 탈출한 한 사람이, 벧엘의 옛 이름이었던 루스라는 성읍을 세우고 새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왜 성경 저자는 23절에서, 벧엘의 옛날 이름을 미리 알려준 다음, 26절에 가서 그 옛 이름의 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고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한 것일까요?
보통 사사기는 정확한 시대를 알 수는 없지만, 사무엘이나, 또는 사울과 다윗의 그 사이, 그러니깐 왕정 시대 때 기록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이때 요셉 가문이 ‘한 사람’과 했던 이 모종의 거래가, 지금 사사기서를 기록하고 있었던 왕정 시대에까지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된 결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직접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진 않기에 본문을 좀 더 해석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그냥 보면, 마치 여호수아 초반부에 나오는 기생 라합의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라합도 여리고를 무너뜨릴 때에, 정탐꾼들을 숨겨주기도 하고, 그들이 도망가는 길까지도 안내했었죠. 이스라엘로부터 공격을 당했던, 여리고 사람들이나 벧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라합과 오늘 등장하는 이 한 사람을 보면, 둘 다 똑같이 그저 나쁜 배신자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라합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그리고 신앙의 고백이 있었고, 이 사람에게는 없었죠.
그리고 라합은 여호수아 6장 25절을 보면, 결국 이스라엘 중에 함께 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의 한 일원이 된 것이죠. 그러나 이 사람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서 살아남은 이 한 사람이 루스라는 성읍을 세운 행위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그것은 그냥 하나님께서 멸하라고 하신 가나안 사람을 이스라엘의 섣부른 타협으로 살려두었다 정도의 의미를 뛰어넘어서, 가나안의 문화가 버젓이 살아남게 되었다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요. 사사기를 쭉 보시면 거의 매일 매일 아슬아슬하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어제 본문도 기억해보시면, 유다 지파가 산지 주민들은 몰아냈는데,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병거가 있었기 때문에 몰아내지 못했다고 하고, 어제 다루진 못했지만, 베냐민도 여부스 족속을 다 몰아내지 못하고, 그냥 함께 거주했다고 합니다. 뭔가 꺼림직합니다.
오늘의 본문도 벧엘을 점령하고 요셉 가문은 기뻐했을지 모르겠지만, 그 벧엘의 문화, 가나안의 문화를 그대로 가진 한 가족이 잡초처럼 살아남아 루스라는 성읍을 세웠고, 사사기를 기록하고 있는 오늘까지 그곳의 이름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 찝찝하게 남아있죠. 이 전쟁이 그냥 땅따먹기와 같은 것이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나안 정복 전쟁은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가나안의 문화를 모두 몰아내고, 이 땅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거든요.
그러니 문제인 것입니다. 지금 계속해서 그 땅을 정결하게, 거룩하게 하는 것에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요? 그냥 ‘좋은게 좋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방법을 원하실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냥 자신들이 생각했을 때 편한 방식대로, 자신들이 판단했을 때 유리하고, 합리적인 방식대로, 이 땅의 백성들과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거래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번주도 그랬지만, 얼마 전 주일에 살펴본 솔로몬의 이야기도 그랬지 않습니까? 이방 여인들과의 혼인도 문제였지만 결국 그 혼인을 통해서 그들의 문화, 특별히 우상숭배와 같은 것들이 흘러들어온 것이 계속해서 문제가 되었죠.
그래서 사도 바울도 뭐라고 합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좋은 게 좋은거라며’ 그들의 가치관과 그들의 생활 방식을 아무 생각 없이 따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항상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
이것이 요셉 가문 또한 가졌어야 했던 마음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융화되면서 살아가는 부분이 없는지 이 시간 살펴보셔야 합니다. 이미 너무도 일상이 되어버려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날카롭고 민감하게 분별하려고 하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그것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옛 이름으로 둔갑하고 우리의 삶에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을 취했던 요셉 가문을 기억하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아내겠노라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 찬송 오늘 말씀을 생각하시면서 찬송가 00장 박수 치시며 부르겠습니다.
■ 기도
1. 월요일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날입니다.
저를 따라 기도합시다.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X3, 통성으로 기도합니다.
2. “연하여 기도하겠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작은 틈을 타는 것입니다. 항상 깨어 있어서, 우리 삶에 침투하려고 하는 영적인 타협과 죄악들을 물리칠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쉽게 생각했던 일 때문에, 오랫동안 이스라엘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기억하며, 나의 작은 신앙적인 타협으로 인하여 나 뿐만 아니라, 우리 가정과 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매 순간 민첩하게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이 시간, 간절하게 주님 이름 3번 찾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찾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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