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식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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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식의 사랑 / 사랑받는 자녀답게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자.
[서론]
어릴적 부모를 닮았다고 말하면 칭찬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커갈 수록 이런 소리를 들으면 욕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 커서 엄마가 너는 진짜 아빠를 똑닮았구나라고 하시면 그건 엄마의 칭찬이 아니라 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아빠 사진을 보면서 놀라는 것은 제가 나이가 들수록 아빠와 모습이 비슷해지는 것 같아서입니다.
심지어 손 크기도 비슷해지더라고요.
여러분들은 누구를 점점 닮아가시는 것 같습니까?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습 자체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관계와 성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닮아야 할 하나님의 모습은 무엇인지 깨닫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에베소서는 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1-3장은 이론을 다루는 장으로서 우리가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는 지 알려줍니다.
거기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분의 자녀가 되었으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교회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반면 4-6장은 실천을 다루는 장으로서 1-3장에서 말한 정체성에 따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의 핵심구절을 찾자면 4장 22-24절입니다.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 사람을 옷입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새 옷’이란 우리의 존재와 신분, 정체성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럼 새 사람을 옷입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란 어떠해야 할까요?
1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란 하나님을 본받는 삶입니다.
여기서 ‘본받는 삶’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단순히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단어를 영어성경으로 보면 ‘이미테이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테이션하면 안좋은 의미로 짝퉁을 생각하지만 원래는 ‘모방하라’는 의미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듯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전에 본 레위기의 핵심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을 닮아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거룩, 긍휼, 공의 등 하나님의 성품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로 요약한 대표적인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장 7,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쓰신 연애편지가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의 사랑을 닮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삶의 첫번째 원리입니다.
그럼 과연 하나님의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말로만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주셔서 그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9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많은 자식들 가운데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게 아닙니다.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허물과 죄로 죽었던 죄인인데도 말입니다.
‘참 사랑은 그 어디에’라는 책을 보면 이 세상에는 세가지 방식의 사랑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어떤 방식의 사랑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행복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합니다.
첫번째 방식의 사랑은 ‘만일’, if 사랑입니다.
‘당신이 나한테 잘해주면 나도 당신을 사랑할께’라고 말하는 조건부 사랑입니다.
그러다보니 내가 사랑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줘야만 합니다.
이렇게 보상을 요구하는 사랑은 매우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두번째 방식의 사랑은 ‘때문에’ because 사랑입니다.
첫번째 방식의 사랑보다는 낫지만 이것 역시 조건부 사랑입니다.
‘너가 예뻐서 사랑해’, ‘성격이 좋아서 사랑해’ 이런 식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도 그런 조건이 사라지면 사랑이 식어버립니다.
또한 이런 사랑은 사랑받으려면 그만한 자격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기때문에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뻐서 사랑받았다면, 그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긴장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진짜 모습이 들통날까봐 불안해하고, 혹시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항상 두려움을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부부사이에도 처음에는 이 사람의 이 점이 좋아서 결혼했는데 살다보니 아니었다 또는 살다보니 변했다며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두가지가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경험하는 사랑의 방식들입니다.
그러나 세번째 방식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 방식의 사랑입니다.
‘만일’ 사랑처럼 어떤 조건도 필요없고, 보상도 요구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때문에’ 사랑처럼 사랑받을 만한 어떤 것을 꼭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내면 깊은 곳에서 이런 사랑을 목말라 합니다.
때로는 가족에게, 친구에게, 아내에게 이런 사랑을 원했지만 알고보니 결국 ‘만일’ 사랑이나 ‘때문에’ 사랑으로 밝혀져 실망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그 분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부터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만약 너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내가 사랑해줄께’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 분은 ‘너가 착하기 때문에 사랑해줄께’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 분은 ‘너가 예배드리니까, 기도하니까 사랑해줄께’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악한 일을 할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사랑에는 어떤 조건이나 보상이 붙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8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우리를 사랑하신게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부터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아무 조건이나 보답없이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본받는 삶의 첫번째 원리입니다.
이런 사랑을 하는게 분명히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점차 그렇게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럼 두번째 원리는 무엇일까요?
2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동전의 앞면이라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동전의 뒷면과 같습니다.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 대신 하나님의 형벌을 자발적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은 어쩌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를 미워하는 원수들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내 목숨을 희생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아무 조건이나 보상없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내 목숨을 희생해서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무게와 질량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향기롭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처음부터 온전히 닮아갈 수는 없습니다.
누가 자기 목숨을 사랑을 위해 쉽게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조건이나 보상없이 내 것을 조금이나마 희생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 한스푼이 될 것입니다.
가령,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를 힘써 돕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가 구제헌금 보내는 것이 이에 해당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본받는 삶, 하나님을 닮는 삶의 원리는 두가지입니다.
첫째, 아무 조건이나 보답없이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 내 목숨을 희생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 새 사람을 옷입은 자들의 삶입니다.
이제 이러한 원리에 따른 삶의 방식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행동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3절입니다.
음행이나 온갖 더러운 행위나 탐욕은 그 이름조차도 여러분의 입에 담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에게 합당합니다.
음행, 온갖 더러운 행위는 성적인 죄를 의미합니다.
탐욕은 말 그대로 돈과 명예, 쾌락을 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이러한 죄들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당시 에베소는 항구도시로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 가는 매우 큰 도시였습니다.
사람과 돈이 모이는 매우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마치 부산같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는 여러 우상들로 매우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에베소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바람에 큰 소동이 일어난 장면이 등장합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우상이 아데미 여신이여서 그 조각상을 파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바울때문에 그 우상을 만들어 팔던 자들이 장사가 안돼 바울을 매우 미워했습니다.
바울이 우상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어리석은 것이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라며 복음을 전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을 쫓아냈습니다.
실제로 에베소에는 높이 100미터가 넘는 어마어마한 아데미 여신상이 있었습니다.
이 거대한 여신상을 에베소 사람들은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이 여신은 풍요와 다산의 여신으로서 유방이 24개나 달려있었습니다.
여전히 현재 바티칸이나 터키 박물관에 가면 이 신상 조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상은 당시 사람들이 가진 욕망의 대체물입니다.
그들은 풍요와 다산이 자신들의 욕망이기에 이런 우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이 여신을 흥분시키기 위해 성적 행위들이 많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신을 본받고, 닮아가고 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어떤 신을 섬기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 신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누구를 닮아가느냐가 곧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죄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사는 곳은 어떻습니까?
에베소와 다릅니까?
비록 눈에 보이는 아데미 여신은 없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거대한 음란한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거대한 돈과 성공의 신을 모시며 그 신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신을 섬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를 닮아가고 있습니까?
이제 새 사람의 변화된 삶은 우리의 행동뿐만 아니라 우리의 말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4절입니다.
더러운 말과 어리석은 말과 상스러운 농담은 여러분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감사에 찬 말을 하십시오.
더러운 말,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은 모두 자기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하는 말들입니다.
여기에는 성적인 대화나 세속적인 대화들, 시덥잖은 농담들을 말합니다.
당시 에베소에는 이런 더러운 유머들이나 말들이 너무나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철학자들, 웅변가들이 이 말들로 사람들에게 쾌락과 즐거움을 주곤 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말들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에베소와 뭐가 다를까요?
유튜브, 텔레비전을 보면 얼마나 많은 유머와 농담이 쏟아집니까?
성적인 농담이 이제는 공영방송에서도 너무 많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영상과 말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점령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유튜브같은 SNS에서 만드는 밈들과 신조어들이 우리의 입에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때 집값이 많이 오르고, 주식도 많이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 그 얘기만 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만나면 그 얘기가 주를 이뤘습니다.
삼전은 존버해야 한다, 청약 어디 당첨되서 얼마 벌었다 등등 말입니다.
이런 말들이 오늘 성경이 말하는 어리석은 말들입니다.
세상을 본받고, 세상을 닮으면 이런 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말은 감사하는 말입니다.
감사의 말은 내 욕망을 채우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말입니다.
감사는 남의 것을 탐하는 욕심과 달리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말입니다.
지난번에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감사의 말은 주님께 사랑받는 자녀들이 보여야 할 합당한 반응이자 주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제 우리의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옷입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는 우리의 삶이 누구를 닮아가고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한 뉴스에 보니 15년 넘게 자식을 키웠는데 아무리 봐도 아들이 자신을 닮은 것 같지 않아 결국 유전자 검사를 해보니 자기 자식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이 우리를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시면 어떻합니까?
아무리 봐도 너는 나를 닮지 않았구나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것이 5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상속받을 몫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의 우상들을 닮지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는 우리 다카포 식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