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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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모든 백성이 함께
성경 : 느8:1-12
현대교회가 몰락하는 이유는 정체성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지, 복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오늘은 교회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현대인들은 교회를 ‘내 필요를 채워주는 곳’으로서 이해한다. 자녀교육이나 돌봄 그리고 부부의 문제나 자녀와의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내 마음의 필요를 채워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주일날 위로받고 싶어 하고 내 마음의 원함을 채워주기를 원한다. 마치 주유소를 연상케 한다. ‘나를 만족시켜 달라’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더 저렴한 물건과 원스톱으로 구매하는 마트로 생각한다. 그래서 원하는 프로그램과 행사를 주지 못하면 마트를 옮겨가듯 교회도 옮겨 간다. ‘내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다. 이것을 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유소도 아니고 마트도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곳은 아주 디퍼런트한 곳이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사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500년전부터 많이 사용되었던 단어였다. 우리가 한 번쯤은 들어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도 사용했던 단어였고, 고대사회에서 왕의 통치 가운데 사용된 단어였다. 왕의 통치와 함께 부름을 받은 신하들이 있었다. 그들은 왕의 부름 앞에 충성하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포스톨로스가 되어서 왕의 통치와 다스림을 전하는 자들이었다.
우리는 어둠의 세상에서 빛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며, 영원한 사망에서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빛을 전하는 자들로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되고 그 성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모습을 보았다. 이 모습은 세상 어느 나라에서나 보이는 모습일 수 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모든 백성이 다 함께
1절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교회는 어느 한 사람의 의해 움직이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한마음으로 묶어 주신다. 물론 겉으로 보면 목사님이 리더 하지만 교회가 한마음을 가지지 못하면 결국 진행하는 모든 일은 무너지게 되어 있다. 물론 순종하지 않거나 튀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마음을 가지게 한다. 지금 말하는 한마음은 인간적으로 으쌰으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주의 일을 할 때는 모두에게 같은 마음을 주신다.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복음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도행전도 겉으로는 바나바나 바울이 이끌지만, 하나님은 바울팀에게 한마음을 가지게 하신다. 특히 16장부터는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뀐다. 그때가 2차 선교가 시작되고 하나님께서 아시아로 가려던 바울 일행을 막을 때였다. 그때부터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라”로 그 내용이 바뀐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왔던 느헤미야서를 돌이켜보면, 느헤미야의 주도하에 많은 일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심이 되었다. 물론 이런 반응이 나오기까지는 예비적 단계가 있었을까. 그것은 에스라서 9장부터 나오는 내용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모습을 보며 회개하는 장면이 나오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함을 전한다. 이 사건을 이 수문 앞 광장에서 일어난 예비적 단계로 해석한다. 부정하지는 않지만, 느헤미야의 시선은 조금 달라 보인다.
지난 7장에서 느헤미야는 고향으로 돌아온 1차 명단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이주시키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러니까 성벽이 재건되고, 모든 외적인 것이 모습을 갖추게 되자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곳에서 특별한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학사 에스라에게 말씀을 요청한 것이다.
1절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첫째로, 이것이 세상 나라와 다른 모습이다. 그것은 성회로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번에는 느헤미야가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도하였다. 1절 주어가 ‘이스라엘’이다. 백성들이 절기를 지키며, 준비된 말씀을 청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두 문장은 “일곱째 달”과 “모든 백성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절기상 7월이 되면 나팔절이 시작된다. 나팔절은 7월 1일에 시작된다. 2절에 “초하루에”라는 말이 나온다. 유대력 7월(태양력 9–10월) 1일에 지킨 성회이다. 유대력 7월은 가나안 민간력 1월에 해당하는 달로서 새해가 시작되는 달이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분들도 있는데,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유대력을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유대 대학자중에 임마누엘 토브라는 교수님이 있는데 그분도 유대력을 중심으로 성경을 읽을 것을 말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유대력으로 7월에는 10일의 대속죄일, 15일부터 1주간 초막절이 있다. 한 해의 중요 절기가 모여있는 달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날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 숫양의 뿔(양각)로 된 나팔을 불어 그 모임을 알렸고, 모든 백성(남녀 종들도 포함됨)이 하루를 쉬면서 성회를 열고 희생 제사를 드렸다.
원래 이스라엘은 1월 14일 유월절을 시작으로, 무교절, 초실절 그리고 50일 이후에 오순절을 지낸다. 그리고 3달 동안은 농사 기간으로서 절기가 없다. 그리고 7월 1일 나팔을 불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모여 나팔절을 시작으로 속죄일과 초막절을 지내면 1년이 지나간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이 절기를 위해 1년을 살아간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예루살렘 공동체는 나팔절을 맞이했다. 원래는 나팔이 불리기전까지 이스라엘은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성벽재건을 위해 많은 시간을 헌신했다. 거의 2달 가까이 성벽을 완성하고 나팔절을 맞이한 것이다. 얼마나 기뻤을까.
그때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져와 들려주기를 요청한다. 그 당시에는 책이 두루마리였기 때문에 두루마리를 가지고 왔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율법책이 아니라 율법책의 부분 부분을 설교했을 것이다.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을 중심으로 말씀 듣기를 청하고 있다.
은보 가족 여러분은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삶의 루틴을 살펴보자. 우리 삶이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가.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안식일을 중심이었다. 6일을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가 안식일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넓게 본다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지난 시간에는 가나안 성도에 대해 짧게 말했지만, 저는 삶이 예배(?)라는 말을 한국교회가 굉장히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행하면서 내적인 부르심과 외적인 부르심을 강조했다. 내적 부르심은 우리 구원이고 외적 부르심은 직업에 관한 부르심이었다. 사제가 아니어도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삶이 예배라는 말은 우리가 할 수 없는 파이와 같다. 마치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선교 헌금도 드리지 않는 사람이 세계 선교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말과 같다. 너무 크고 넓다. 물론 6일 동안 우리가 교회 밖에서 지내는 삶도 소중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과 약속된 주의 날은 삶의 예배보다 중요한 시간이다.
우리가 한 주를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분이 사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열심히 사는 이유는 주일 때문이다. 우리 일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함이다. 천국이 왜 천국이며, 지옥이 왜 지옥인가. 그곳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가, 하지 못하는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 땅에서의 삶도 동일하다. 그곳에서 우리는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님을 경배한다. 이것이 세상과 구별된 교회인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가 일주일을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기를 바란다. 이분법적으로 나눌수는 없겠지만, 우리 일상도 중요하지만, 주일이 더 중요하다.
우리에게 가족이 주어지고,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허락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그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기 위한 것일까. 물론 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방해된다면 우리는 검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 검이 진짜 검은 아니다.
대구 화원에 보면 설화교회라는 곳이 있다. 그곳에 예전에 교인이었던 어린 소녀의 이야기이다. 이 소녀는 일찍 아버지를 여이고, 어머니와 오빠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나이가 차면서 학교 가고 싶었는데, ‘여자가 무슨 학교냐’고 보내주지 않았다. 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했다.
집에서 일하고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가서 장사도 같이 했다. 그런데 다리가 어느날부터 이 소녀의 다리가 오무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이상 스스로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친구들처럼 학교도 가지 못하고 장애를 안고 집 안에만 있어야 하는 이 어린 소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약을 써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소녀에게 옆집 할머니가 ‘교회 가면 다리 났는다’라는 말을 전해 준다. 그리고 도움을 얻어 화원에 있는 설화교회에 참석한 것이다. 놀랍게도 다리가 펴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경험한 소녀는 학교는 가지 못했지만, 주일마다 교회가서 배우고 예배 드렸다. 어린 딸의 다리가 고침받는 것을 보고서도 어머니와 오빠는 ‘예수 믿으면 집안 망한다’며 반대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오빠가 반대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칼을 던져야 할까.
토요일이 되어서 주일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내일 모내기 해야 하니까 교회갈 생각하지 마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소녀가 오랜 시간 근심하다가 늦은밤 홀로 논으로 가서 밤새 모를 심었다. 그리고 해가 뜨고 집에 들어왔다. 그때 모를 심기 위해 나설 준비를 하던 엄마와 오빠와 마주쳤다. 그리고 그 소녀는 엄마와 오빠에게 ‘모를 심고 왔어요’라고 말했다. 믿지 못하던 가족은 논에 가서 확인했다. 그 다음부터 이 소녀가 교회 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고 황금 기도원 원장님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소천하신 제 스승님 어머니의 이야기였다. 이것이 검을 던진다는 의미다.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약속된 시간을 이렇게 소중하게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는 사랑하는 가족도 친구도 하나님을 예배함에 방해가 된다면 검을 주고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이다.
2. 말씀을 듣는 무리
3절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두 번째로 우리가 세상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무엇을 하든 말씀이 중심이다. 그래서 교회는 말씀을 펼치는 자와 해석해주는 자와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성경은 그냥 읽어서는 깨달을 수가 없다. 제가 학생 때 요한계시록이 궁금해서 어떤분에게 물었더니 100번 읽으면 된다고 해서 거의 100번을 읽었는데, 글자는 알겠는데 그래도 내용은 모르겠더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과정속에 여러 사람을 통해 길을 열어 주셨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가 작은 흔적을 남길 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 말씀을 해석하고 전달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7절 말씀을 보면, 학사 에스라 외에도 말씀을 돕는 자들이 있었다. 8절에 에스라가 낭독한 것을 해석해주었다. 아마도 그 당시 익숙한 언어가 아람어였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된 율법을 에스라가 읽으면 아람어로 통역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분, 이렇게 교회는 말씀으로 무장된 리더들이 양육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의 교회다워진다. 우리는 세상 동호회와 다르기 때문이다. 교회가 말씀이 흥왕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모범적이라 말하는 안디옥 교회도 바나바와 바울이 말씀을 가르칠 때, 무리의 수가 더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도 얻게 된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맛소라’라는 말이다. 맛소라에 대한 어원이나 의미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지만, 제가 좋아하는 페이지 켈리 선생님은 ‘전달하다’의 의미를 높이 샀다. 교회는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들이 많아져야 한다.
두 번째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5절을 보면, “일어나서” 말씀을 들었다. 유대교 랍비들은 모세 시대부터 율법을 읽을 때 일어나는 것이 관례였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알수는 없다. 단지 느헤미야의 주도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주도로 말씀 사경회가 이뤄졌고, 그들이 기대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다.
제가 예전에 섬겼던 교회는 교역자가 목사님과 그 당시 전도사였던 저뿐이었다. 그래서 제가 9시 30분에 유초등부 설교하고, 바로 올라가서 10시쯤 중고등부 설교하고, 점심 먹고 청년부를 사역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제가 6년이라는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교사들의 도움이었다. 제가 오기전부터 담임 목사님께 잘 양육받은 상태여서 함께 일할 수 있었다.
저는 정말 말씀과 기도였다. 그리고 나머지 일은 선생님들이 다 알아서 하셨다. 수련회나 특별 예배도 아이들이나 선생님들이 어떤 말씀을 듣고 싶어하면 제가 공부하고 연구해서 설교했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제가 설교자로서 많은 자랐다.
이스라엘은 일어나서 말씀을 들었고, 그들에게 일어난 반응을 느헤미야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6절에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축복했다. 우리 성경은 송축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땅에 완전히 엎드렸다. 우리 성경에는 경배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9절 말씀에는 말씀을 들으며 울었다. 저는 제 설교 영상을 보지 않는다. 닭살이 일어나고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다(예전에 교사 모임때 김주옥 집사님이 수요예배때 ‘우우리기도를’ 들려 주시는데, 우~ 도망가고 싶었다^^).
그래서 저는 설교 원고를 잘 남기지 않는다. 제가 우리교회 와서 한 설교 90%는 새로 작성한 설교다. 한 번씩 남아 있는 옛 원고를 읽으면 경악한다. 수준이 너무 떨어져서 놀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 한번은 어느 교회 헌신예배가 나갔었는데, 서론을 마치고 첫 대지부터 집사님 한분이 울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말씀이 마칠때까지 펑펑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그 집사님이 생각났다.
은보 가족 여러분, 우리가 말씀 앞에 서서 내 가슴을 두드려본 기억이 언제인가. 말씀 앞에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하나님께 죄송하며, 내 죄를 자백하던 것이 언제인가.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예배 자리에 오르셨는가.
이스라엘의 안전은 성벽이 아니라 성벽 되시는 하나님이셨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그들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의 싸움이었다. 우리의 싸움도 동일하다.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 우리 안전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10절에 “....Ⓒ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하고” 할 때, “힘”이 ‘피난처, 요새, 산성’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7편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에 ‘능력이시니’라는 말씀이 ‘요새, 산성, 피난처’라는 힘과 같은 말이다. 이스라엘이 기뻐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에 ‘피난처 요새 산성’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결론>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서 구별된 자들이다. 우리는 어두움에서 불러내 주신 그분의 나라를 살아가는 자들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벽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이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