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길을 주시는 하나님

킹덤스토리 해설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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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에 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만 그 은혜를 잊고 하나님께 불평을 표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왜 이렇게 불평하게 되었는지 이렇게 불평을 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눠보려 합니다.
1-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원망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원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생활을 하는 중의 이야기입니다. 21장 1절에서 3절 사이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마라는 땅을 점령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애돔 땅을 지나서 가나안 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애돔을 쭉 둘러서 올라가는 길을 가게 됩니다. 20장 21절을 보시면 에돔의 왕이 이스라엘 백성이 에돔의 영토를 거쳐서 지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에돔 땅을 지나가면 이스라엘을 대적할 것이라 엄포를 놓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할 수 없이 에돔 땅을 빙 둘러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는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빙둘러서 간다고 하면 얼마를 빙 둘러서 가는지 저도 성도님들도 감이 잘 안잡힐 것 같아서 지도를 한 번 보겠습니다. 왼쪽 아래 축적을 표시해놓은 것이 30km입니다. 애돔 땅을 그냥 지나쳐서 가면 한 30km 정도 한 2, 3일 행군 하면 지나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하지만 저렇게 빙둘러가면 최소로 잡아도 120km입니다. 아마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2주-3주는 걸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군인이 있는게 아니라 노약자, 어린이도 있고 유목민처럼 천막과 재산을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에 길이 험할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이 더 빠지고 지치는 가운데 행군을 해야 합니다. 여기 지형도 행군을 하기 좋은 지형이 아닙니다. 애돔 지역가 네겝 산지의 높은 경사지를 지나야 합니다. 기후도 불규칙적입니다. 간헐적으로 비가 오고 더운 지역입니다. 본문 4절에서 보면 이 길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학자들은 마음이 상했다는 번역보다 인내심이 없어졌다는 번역을 추천합니다. 길을 돌아가야 하는데다가 지형도 날씨도 모든 것이 다 인내심을 갉아먹는 것들 밖에 없습니다. 인내심이 동이 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성령의 열매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내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습니까? 성도는 인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모든 환경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고 결국 참지 못하고 불평을 쏟아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또 다시 모세를 향해 원망합니다. 늘 하던 원망 그대로 똑같은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광야 1세대가 아니라 광야 2세대입니다. 처음 광야에 들어왔던 사람들은 죽고 그 자녀들의 세대인데 그 부모 세대와 똑같은 원망을 합니다.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한다는 것은 아시는 것처럼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에게 약속의 땅을 정탐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21장 1절 – 3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호르마를 점령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붙드시면 전쟁도 이기게 하십니다. 광야에서 죽일 것 같으면 전쟁하다가 죽게 하면 되지 뭐하러 광야까지 질질 끌고 가시겠습니까? 또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다고 하는 말도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반석에서도 물을 내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지 않습니까? 먹을 음식들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굶어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수고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 산다는 것은 감사제목이지 불평을 할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인도해주시고 광야에서 돌봐주신 은혜를 잊으니까 광야 길을 걷는 것에 대해 모든 것이 불평거리가 되고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한다고 말합니다. 이 음식은 그저 배만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시는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선택받아 언약을 맺었고 하나님께 얼마나 특별한 은총을 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나온 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 길을 돌아가고 길이 불편한 것인데 이 환경적인 불편함을 하나님에 대한 불평으로 치환하고 있습니다. 멀쩡한 만나와 메추라기를 폄훼하고 그들 조상이 종살이 했던 애굽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예를들어서 IMF가 왔다고 해서 일제강점기 때가 좋았다 이렇게 말하면 안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식의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인내하지 못하게 되니까 하나님께 대항하여 불평하게 됩니다. 인내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돌봐주신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힘들 수 있습니다. 불규칙적으로 비가 내리고 험한 지형을 걸어야 하고 직진으로 갈길을 빙 둘러서 몇 주 늦게 가야하고 조바심이 나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자신을 절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우리 생각과 말과 행동이 말씀의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상황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상황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들이 상황을 극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한 때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그만큼 사람은 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맹모삼천지교라고 해서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이나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상황과 조건이 중요한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세계에서 나의 믿음이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은 어려운 상황을 지날 때입니다. 이 어려운 상황을 지날 때 감정의 폭풍 앞에서 바짝 엎드릴 수 있는지 아니면 그 감정의 폭풍에 휘말려서 자신을 잃어버리는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느냐 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적용) 우리가 좋을 땐 뭐든지 좋습니다.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고 나의 앞길이 탄탄대로고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어 있으면 감사의 고백이 흘러나오고 얼마든지 내가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느껴지고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과 환경이 어려워질 때 우리의 밑바닥이 드러납니다. 분노가 끌어 오르고 절망이 진득하게 달라붙습니다. 짜증이 치밀어 오릅니다. 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에 이런 감정이 생기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은 이때 감정에 마냥 휩쓸려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다시 한 번 인내하게 됩니다. 뭐하러 성경이 인내를 가르치겠습니까? 믿음생활을 하다 보면 인내가 필요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인정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인내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순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죄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용서의 길을 여신다.
(설명) 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께서 용서의 길을 여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부터 시작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는 사건들이 나옵니다. 그중에 물이 없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불평하는 사건이 나올 때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느정도 정당한 것이라 인정해주시고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주시며 그 요구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불만은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6절에 보시면 설득의 여지 없이 바로 그 백성을 심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셔서 죽은 자가 많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불뱀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물리면 몸에 독이 퍼져서 마치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을 주기 때문에 불뱀이라고 불립니다. 아직도 이 지역에서는 이 불뱀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이 지역에 불뱀이 있다는 사실은 성경 외에 고대문헌에서도 증언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5절에 모세가 불뱀과 전갈을 언급하면서 광야에 이런 위험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불뱀을 보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불뱀을 보냈다고 했을 때 이 보낸다는 뜻은 단순힌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무엇을 옮긴다는 뜻이 아니라 풀어놓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그동안 하나님이 불뱀을 묶어놓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불뱀을 그냥 두셨더라면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뱀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불뱀을 붙들고 계셨기에 이스라엘은 안전하게 광야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은혜는 당연한 것이 아니며, 은혜를 잊으면 은혜 내리는 것을 중단시키시는 방법으로 심판을 내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불뱀을 통해 심판 받은 사건을 두고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0: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합니다. 이 시험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평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시험 당하시고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배신을 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을 길을 내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하지 않도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 확인하시고 용서의 길을여십니다.
7절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이 재빨리 회개합니다. 하나님과 모세를 대해서 원망해서 범죄 했다는 것을 자백합니다. 모세에게 기도해서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데 이스라엘의 요청과 하나님의 응답의 내용이 다릅니다. 이스라엘이 요청한 내용은 뱀을 떠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장대 위에 놋뱀을 만들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놋뱀을 장대 위에 달아서 보면 물린 자마다 살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해달라는 용서는 뱀을 떠나게 해서 아직 뱀에 물리지 않은 사람을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베푸신 용서는 뱀에 물려서 죽을 위기에 있는 사람도 용서해주시고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생각하는 용서보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는 더 크고 더 강력한 용서입니다. 이 살려주시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뱀을 보는 것입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뱀을 제작할 때 금으로 만든 뱀도 아니고 백향목 나무를 깎아서 뱀을 만들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청동기 후반 시대를 살고 있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인 놋을 가지고 만들라고 했습니다.
놋뱀을 만드는 것도 쉽고, 쳐다보는 것도 쉽지만 믿음이 수반되지 않으면 이 쉬운 동작조차 하지 않고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으면 말도 안 되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놋뱀을 보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평하고 원망하여 심판 받는 백성들에게 용서의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 백성들이 충분히 접근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용서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냥 값싼 용서를 베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도 함께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용서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 용서의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할 은혜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이 죄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 나중에 아주 엉뚱한 일이 생깁니다. 우리교재 206페이지에 보시면 알겠지만 광야에서 들린 이 놋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놋뱀을 통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중요한데 나중에 이것은 잊어버리고 이 놋뱀을 우상숭배하게 됩니다. 히스기야 때 이 놋뱀을 없애버린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죄인은 또 딴 짓을 하고 우상숭배를 하게 됩니다. 이 용서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증명) 이 불뱀은 심판의 상징인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복음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 놋뱀을 가지고 설명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하고 말씀하시고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광야에서 뱀을 들고 그 뱀을 보는 것을 믿음의 행위로 해석하십니다. 그리고 3장 16절에 복음에 대한 성경 구절 중 가장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구약 시대에 불뱀에게 심판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놋뱀을 통해 살려주신 것처럼 신약에 이르러서 가장 잔인한 처형도구인 이 십자가를 통해, 십자가에 예수님을 내어주시는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용서, 영원한 생명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아담이 선악과를 탐하고 하나님을 저버리듯 늘 하나님을 배반하고 저버리는 죄인이지만 새로운 놋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이 영원한 용서에 대한 그림을 언제부터 보여주셨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께 저항할 때부터 이 영원한 용서와 복음에 대한 밑그림을 보여주셨습니다. 죄인은 자기 감정과 기분이 내키는대로 죄를 짓지만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오랜 세월동안 묵묵히 진행되고 숙성되어왔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분의 용서의 깊이가 한 없이 깊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적용)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죄성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불평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반대되는 행동을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넘어지고 낙심하게 될 때 다시 우리는 십자가를 붙잡고 일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고 심판하시기보다 용서하시는 것을 더 즐겨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할 때 그것은 우리의 회개를 전제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회개하지 않았는데 용서하는 것은 없습니다. 회개 없는 용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회개하기 전에 미리 용서할 수 있겠지만 그 용서는 아직 용서의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 용서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싸웠을 때 내가 저 사람을 마음으로 미리 용서한다고 해서 실제 만나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한 것처럼 관계가 회복되진 않습니다. 회개 없는 용서는 그 효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할 때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저항합니다. 그래서 심판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해 용서의 길을 여셨습니다. 남은 한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용서의 하나님에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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