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사랑한 그 제자 4] 지체된 사랑, 그 사랑을 보라(요11:1-16)
Notes
Transcript
일시 : 2022년 9월 14일 수요일
소제목 : 예수가 사랑한 그 제자 4
제목 : 지체된 사랑, 그 사랑을 보라
본문 : 요한복음 11장 1-16절 *신164
결단찬양 : 주가 일하시네
[대표기도]
언제나 우리를 보호하시며 감찰하시는 그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그 사랑에 힘 입어 주 앞에 나아가오니, 말씀 가운데 임하사 그 말씀에 은혜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주님의 종이 주의 말씀을 대언하오니,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주님의 동일한 은혜가 임하게 하여 주시옵고, 우리의 삶을 통해 말씀을 실천하는 삶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봉독]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1장 1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는 신약 164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다 찾으신 줄로 알고 한 절씩 교독하신 후 마지막 16절은 합독하시겠습니다. 제가 먼저 1절 봉독해 올리겠습니다.
[도입]
성도님들 중에 ‘기적’을 경험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예를 들어, 누군가 나의 다친 팔을 붙잡고 기도하더니, 다친 팔이 바로 회복되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던가, 또는 누군가 나의 몸 안으로 손을 넣어 암세포를 끄집어 내어 암으로부터 자유하게 했다던가 말입니다. 저는 단연코 없다 생각하며, 저 또한 그런 기적을 경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그런 기적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정말 많은 기적들이 사복음서를 통해, 아니 이 성경을 통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 없고 또 믿음에 대한 확신이 조금도 없는 자가 성경을 읽는다면, 허구 소설을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에서만 등장하는 몇 가지 사건들 중 우리가 함께 수요일마다 다루었던 사건들을 보아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사건은 어떻습니까? 결코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그저 하인들은 항아리에, 그것도 밖에 다녀오면 손을 닦고, 발을 닦기 위해 물을 담아두는 그 항아리에 물을 부었을 뿐인데 결과는 ‘이제서야 좋은 포도주를 내놓는다’며 극찬을 받는 포도주가 나왔습니다.
또 맹인의 눈에 그 진흙이 붙어있도록, 어쩌면 정말 많은 침을 뱉고 또 뱉었을지도 모르는, 맹인 입장에서는 충분히 PTSD가 올만하며, 더럽다면 더럽다할 수 있는 그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놀랍게도 그 맹인의 눈을 번쩍 뜨게 했습니다.
굳이 오늘 본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요한복음에서, 아니 이 성경에서 수도 없이 많은 기적들과 이적이 드러나고 있음을 알게 하며, 또 보게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적을 통해 ‘일하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작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이적을 행하시는 그 주님의 놀랍고 또 큰 권능을 붙잡고 기도하며, 또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데, 이상하리만큼 우리의 삶에서 고난이 오면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기보다, 그저 기적만을 바라는 것 같습니다.
나의 육신의 불편함이 생긴다면, 그저 그 육신이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는, 또 나의 생활고에 어려움이 생긴다면 그저 그 생활고의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 따뜻한 국밥 한 그릇하기를 바라는 그 모습이, 마치 묵상과 실천에서 다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이 본문을 함께 나누며, 다시금 믿음의 주체요 또 기적을 행하시는 그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사건의 흐름 1 :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오늘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셨다는 사실과, 무엇보다 나사로의 죽음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본문의 시작은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3절입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마리아와 마르다가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 전합니다. “주님, 주께서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에 들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베다니에서 예수님께로 나아왔을 시점이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한다면, 보고 당시 나사로의 상태는 어떠한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사망이 아닌 병에 들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또 이에 예수님께서도 4절을 통해, “이 병이 죽을 병이 아니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망이 아닌 병에 걸려 힘들어 하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사실 나사로의 병의 결과를 생각할 때 어쩌면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조금은 가볍게 여긴 것인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4절에서 분명 그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말했지만, 하지만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또 말장난을 하는 것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라고 말씀하시며, 마리아와 마르다는 그래도 나름 심각한 상황 속에서 어줍잖게 의사를 찾는 것보다 예수님을 찾는 것이 더 지혜롭다 생각하여 사람을 보냈을 것인데, ‘나사로의 병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대답만 늘어놓으실 뿐입니다.
거기에 5절을 보니,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평소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수 많은 인물 중 하나가 아닌, 가까웠고, 또 친했던, 그렇기에 사랑한다는 수식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인물이 바로 나사로 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사로의 질병을 향해 ‘죽을 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 말하니 듣는 이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서운할만 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이가 아플 때, 그 사이에 관계가 없다면 사실 나 몰라라 하겠지만, 아니, 요즘은 모르는 사이더라도 소식만으로도 안타까워하는 것이 현실인데, 더욱이나 가까운 사이였다면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한 모습일 것입니다. 설령 제 자녀가 아픈데 나 몰라라 한다면 이는 부모로써 결코 해서는 안되는 행동을 취한 것이겠지요. 또 저의 오랜 친구가 아파 병상에 누워있었더라면 저는 짬을 내어서라도 그 병상을 방문했을 것입니다. 그게 당연한 조치이자 또 가까운 사이로써 취할 수 있는 자세입니다.
[사건의 흐름 2 : 이틀 더 유하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신다 말씀하시며,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행동이 무엇입니까? 6절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만약 제가 마리아나 마르다의 입장이었더라면 너무 화가 났을 것입니다. 유능한 의사를 찾아 나서기보다, 이 모든 것을 능히 치료하실 것이라 믿었고 또 그랬기에 그 즉시 사람을 예수님께로 보낸 것인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그 보고를 들으시고 하시는 말이, ‘그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리곤 이틀을 더 거기에 머물러 계신다니 화가 어찌 안나겠습니까? 차라리 ‘사랑하는 자’라고 말이라도 안하셨다면, 더 좋았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상황 속에서 마리아와 마르다만 애가 타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향해 ‘사랑하는 사람’이라 표현할 수 있음은 그만큼 친하다는 것이기에, 예수님과 늘 함께 했던 제자들 입장에서도 나사로는 가까웠고 친했던 관계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마리아와 마르다 뿐 아니라 제자들도 애가 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은 답답하고 느린 예수님의 행동에 이들은 속이 타들어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건의 흐름 3 : 유대로 돌아가자]
그런 와중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한 번 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십니다. 7절입니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10장 22절 이하의 내용을 보면 왜 제자들이 유대를 기피하고 있는가 알 수 있습니다. 10장 33절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네가 선한 일을 해서, 그 모습이 꼴보기 싫어서 우리가 돌을 던지는게 아니야. 우리가 돌을 던지는 이유는 네가 자칭 하나님이라 떠들고 다니기 때문에, 잘못된 신앙을 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처럼 행동하는거야.’라고 말합니다. 이때 이 돌이 예수님께만 날라들었겠습니까? 아니요. 옆에 있던 제자들에게도 함께 그 돌이 날아 들어왔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방금 전 이 상황을 겪었고 그리고 이제서야 막 갈릴리에 도착한 것이지요. 그런데 다시 유대로 돌아간다니, 제자들 입장에서는 엎친데 덮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겠습니까?
[사건의 흐름 4 : 나사로가 죽었다]
참 알 수 없는 것이 가득한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혼돈이 왔을지 모릅니다. 거기에 지금 예수님께서 정점을 찍으십니다. 11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그리고 이 말씀을 정작 깨달지 못한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14절과 같이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아니 이틀 전만 해도, 나사로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으면서, 제자들 입장에선 그저 한 숨 자고 일어나면 회복될 것처럼 말씀하셔놓고선, 이틀이 지난 이 시점에 그가 잠들었다니요? ‘아니, 주님.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요즘 주님 왜 그러십니까? 나사로를 향해 죽을 병이 아니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또 그를 사랑하신다더니 이틀을 더 유하시고서는 그리고선 정작 우리가 죽을 뻔 했던 유대로 다시 돌아가자 말씀하시고, 또 이제와서는 죽을 병이 아니라던 그가 죽었다니요?’
정말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주님의 계획에 제자들이 힘들어함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들의 삶을 보며 마치 우리의 모습이 오버랩 되지는 않으십니까?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했는데, 정작 하나님께서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 우리는 혼돈과 어려움을 호소하지는 않습니까?
[나사로 사건의 핵심 : 믿게 하기 위함]
제자들의 심정이 그랬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15절,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아니 예수님, 기뻐하신다니요? 지금 나사로가 죽었자나요!’ 제자들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쌓이고 더 쌓여만 갑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의 핵심 메세지가 뒤에 담겨져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나사로 사건의 핵심은 ‘믿게 하기 위함’ 입니다.
이 모든 사건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믿게 하기 위함”에 핵심이 있습니다.
[나사로 사건의 초점은 나사로가 아니다. 예수님이다.]
제자들의 믿음은 여전히 연약했습니다. 16절에서 우리는 도마의 고백을 보게 되는데,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합니다. 도마의 외침이었지만, 사실 제자들 모두의 심정을 대변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동일한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죽을 병이 아니었는데 죽었고, 유대에서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다시 유대로 돌아가자 하시니, ‘됐다. 걍 죽자!’라는 생각이 제자들에게 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연약한 신앙을 지닌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믿게’ 하기 위하여 ‘나사로 사건’을 활용하신 것입니다. 굳이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는 사용하셨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하필 사랑하는 자의 죽음이어야 했을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직 그들 앞에 놓여진 ‘믿음의 충격’을 견딜 준비가 되지 않았다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부활 소망에 대한 비전을 심겨주고자 했으며, 또 이후 자신을 향해 다가올 십자가 죽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이 나사로 사건의 초점은 나사로가 아닙니다. 마리아나 마르다도 아닙니다. 우리도 죽자 말하는 도마도 아닙니다. 이 나사로 사건의 초점은 그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건의 주인공이자 주연인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이 여러분들은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의 지체된 사랑]
예수님의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알겠고, 또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 우리에게, 그 사랑을 아는 크리스천들에게 너무나 힘든 것이 무엇인가를 영국의 알렉산더 맥클라렌은 “delay love”라 표현했습니다. 지체된 사랑.
성경은 우리를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에게 능력을 주겠노라.’ 수도 없이 말씀하시고 우리를 향해 다짐 또 다짐하게 만드시며, 우리도 이를 신뢰하고 또 우리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데, 정작 우리가 힘들 때 주님은 즉각 임하지 않으실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나는 너무 힘들어서 다 포기하고 싶고, 또 지금 당장 이 문제를 속히 해결하고 싶어서 울부짖으며 기도해도 즉각 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힘들어 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악인의 승승장구를 허용하시면서도, 우리를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씀하시면서도 우리가 너무 힘들어 부르짖을 때 침묵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는 너무나 힘들어 합니다.
많은 것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한 치 앞만이라도 조금 보여주신다면, 아니면 내게 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조금의 방향성이라도 즉시 보여주시든, 알려주시든, 응답하시든 했으면 하는데 왜인지 하나님은 침묵합니다. 알렉산더 맥클라렌이 말한 것처럼 그 ‘지체된 사랑’이 우리를 너무 힘들게 합니다.
[지체된 사랑에도 예수를 향한 진실된 고백을 한 마르다]
마리아도 이를 원망했을련지 모릅니다. 읽지는 않았지만 21절을 보면,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말하며, ‘우리가 사람을 보냈을 때 주님께서 바로 오셨더라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벌써 4일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죽을 병이 아니라던 말씀이 무색할 정도로 나사로는 이제 죽어 이 자리에 없습니다.’
원망일지 모르겠지만, 반대로 믿음의 고백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의사는 살릴 수 없었을 것이고, 그 어느 훌륭하다 말하는 사람이 와도 나사로를 회복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이 놀라운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분임을 내가 압니다.’ 라는 믿음의 고백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그녀가 22절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리아와 마르다 입장에서는 분명 ‘주님, 너무 늦게 오신 것 아닙니까?’ 라며 원망할 수 있었을 것인데, 유대의 핍박을 피해 도망간 예수님께서 늦게 오심을 그들은 원망할 충분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니 이런 이유로 예수님을 원망하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도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라 고백하며, 그 사랑을 확증하고 또 확증합니다.
무엇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까?
기적을 행하시는 주체를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마르다는, 마리아는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는데, 나사로가 왜 죽었냐’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습니다.’고 고백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을 수 없는 사건이고, 이를 설명할 수 없는 나사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음은, 우리가 기적을 믿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시는 주체를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허락하시고 또 고난 길 가운데서 울부짖음에 침묵하셔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음은, 우리가 기적을 기대하기보다, 기적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길 바라기보다 그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며, 어떤 길이든 결국 주가 인도하시는 그 길이 가장 아름답고 완벽하며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너무 힘들어서 다 던져버리고 도망가고 싶고, 모든 걸 포기하고 잠적하고 싶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예배의 자리를 지켜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과 같이 지키고 사수해야 하는 이유는 기적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시는 그 주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단 한 순간도, 어떤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를 떠난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어떠한들 늘 자리를 지키셨으며 언제나 우리를 바라보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때론 침묵하는 것 같아도, 즉시 일 하시지 않아 우리가 어려워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가져야 하는 자세는, 마리아처럼, 또 마르다처럼 지체된 그 사랑에 원망함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가장 완벽한 때에 일하실 것이고 또 채우시며 인도하시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기적을 우리의 삶 가운데 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진교회가 그런 하나님을 바라보며 세워져 가길 소망합니다. 사람을 보기보다, 기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이를 행하시는 주님을 보며 함께 세워가는 교회되길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1) 지체된 사랑, 그 사랑을 바라보는 자가 되게 하소서
2)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일 하시는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며 나아가게 하소서
